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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호의 길 위에서 읽는 시] <4>이생진 시인의 ‘그리운 바다 성산포’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10. 3. 23. 0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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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고두고 사랑해도 다 사랑하지 못하고 또 기다리는 사람”
  • ◇성산포로 가는 해안도로에 희미한 일출봉을 배경으로 오징어들이 줄에 걸려 운다.
    처음부터 작정한 것은 아니었다. ‘올레’란 제주 방언으로 ‘골목길’에 해당되는 말인데, 그 길을 사랑하는 이들이 서귀포를 중심으로 제주 남서부 해안을 12코스로 이어놓았다. 어쩌다 행복하게도 3박4일 동안 그 올레를 걸을 기회가 생겼던 터에, 이생진(80) 시인의 ‘술에 취한’ 성산포가 보고 싶어 하루를 따로 떼어 홀로 제1코스(시흥초등학교~말미오름~종달리소금밭~성산갑문~광치기해변, 15㎞, 4~5시간)를 걸었다. 이 코스에서는 걷는 내내 성산 일출봉이 보인다.

    “성산포에서는/ 남자가 여자보다/ 여자가 남자보다/ 바다에 가깝다/ 나는 내 말만 하고/ 바다는 제 말만 하며/ 술은 내가 마시는데/ 취하긴 바다가 취하고/ 성산포에서는/ 바다가 술에/ 더 약하다”(‘그리운 바다 성산포 12 - 술에 취한 바다’)

    시흥초등학교에서부터 오름을 향해 걸어올라가기 시작했다. 햇빛은 환한데 바다에는 해무가 자욱하다. 길 양편에 장다리꽃이 보랏빛으로 무성하게 너울댄다. 저만치 커플티를 입은 젊은 연인이 손을 잡고 이미 걸어가고 있다. 이젠 올레가 제법 알려져서 신혼여행객들도 이 길을 걷는 모양이다. 가파른 나무 계단을 올라 말미오름 정상에 이르렀을 때 기대했던 성산 일출봉은 안개 속에 희미한 유령선처럼 떠 있었다. 이제 초입인데, 성산포에 닿으려면 한나절 내내 걸어야 하는데, 연무가 걷히기를 하세월로 기다릴 수 없는 노릇이다. 그나마 뭍에 조각보처럼 펼쳐진 유채밭들은 제법 선명하게 들어온다. 아쉬운 대로 유채 바다를 곁눈질하다가 유령선을 흘깃거리며 오름을 돌아 내려가는데 말들이 꼬리를 한가롭게 내두르고 있다. 가만히 보니, 그 말들보다 그들 뒤편으로 돌담을 두른 무덤들이 더 시선을 잡아끈다. 무덤 하나하나 돌담으로 에워싸였다.

    “살아서 고독했던 사람/ 그 사람 무덤이 차갑다/ 아무리 동백꽃이/ 불을 피워도/ 살아서 가난했던 사람/ 그 사람 무덤이 차갑다”(‘그리운 바다 성산포 80- 고독한 무덤’)

    시인이 시는 그리 썼지만, 햇볕이 따갑고 햇빛은 맑아서 무덤에서 고독이 느껴지지 않는다.  지난해 가을의 억새들이 아직 남아 무덤의 머리를 쓰다듬는 오름 아랫길을 다 내려와 종달리 소금밭을 향해 나아가려는데, 이 한적한 섬의 길가에 차들이 우우 줄지어 서 있다. 멀리 연기가 올라가고 포클레인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모여 있다. 웬일인가 싶어 가까이 다가가보니 파놓은 구덩이에서 사람들이 허리를 구부리고 신중하게 움직이고 있다. 일하는 사람은 두엇이지만, 뒷짐을 지었거나 두 손을 앞으로 가지런히 모았거나 혹은 고개를 길게 빼어 일하는 이들을 지켜보는 사람들은 많다. 먼발치서 줌렌즈를 당겨 사진 몇 장 찍고 천천히 다가갔는데 노인 하나가 더 가까이 가서 찍어도 좋다고 불쑥 말했다. 그들은 무덤을 열고 뼈를 추려 새 묘지로 옮기는 중이었다. 노인은 친근한 낯빛으로 “올레꾼이냐?”고 물었다.

    “가장 살기 좋은 곳은/ 가장 죽기 좋은 곳/ 성산포에서는/ 생과 사가 손을 놓지 않아/ 서로 떨어질 수 없다”(‘그리운 바다 성산포 9- 생사’)

    ◇성산포 등대. 이생진 시인은 어느글에서 등대는 별에게 부치는 외로운 이들의 우체통이라고 썼다.
    아스팔트 길을 걸어 종달리 소금밭 쪽으로 갔다. 제주에서 유일하게 천일염을 생산하던 소금밭에 지금은 갈대만 무성하다. 정오가 가까워도 여전히 연무는 가시지 않아 갈대 너머로 성산 일출봉 유령선은 더 크고 장엄하게 부유하는 중이다. 종달에서 처음 오름으로 출발했던 시흥까지 이어지는 해안도로를 걸어야 성산포에 이를 수 있다. 이 도로에서는 성산포와 일출봉이 내내 가까이 보인다. 한 발짝 내딛을 때마다 셔터를 한 번씩 누르는 꼴이니 걸음이 느릴 수밖에 없다. 누군가 나를 추월한다. 가만히 보니 그는 이미 나를 추월한 지 오래인데, 그걸 느끼지 못했을 뿐이다. 젊은 그는 높낮이가 다른 두 다리로, 여전히 껑충거리며 해안 길을 하염없이 걷는 중이다. 지팡이는 없다. 바다가 바로 곁에서 말을 걸어온다. 일출봉은 서서히 걷혀가는 안개 속에서 얼굴을 내밀기 시작했다. 청청한 소주 빛깔 성산포 바다, 멀지 않았다.

    “바다는/ 마을 아이들의 손을 잡고/ 한나절을 정신없이 놀았다/ 아이들이 손을 놓고/ 돌아간 뒤/ 바다는 멍하니/ 마을을 보고 있었다/ 마을엔 빨래가 마르고/ 빈 집 개는/ 하품이 잦았다/ 밀감나무엔/ 게으른 윤기가 흐르고/ 저기 여인과 함께 탄/ 버스엔/ 덜컹덜컹 세월이 흘렀다”(‘그리운 바다 성산포 30- 바다의 오후’)

    이생진 시인을 만난 건 제주에서 올라와 김후란 시인이 운영하는 ‘문학의 집·서울’ 수요모임 ‘만나고 싶었습니다’라는 공개 문학강좌 자리에서였다. 운이 좋았다. 일부러 노시인에게 전화를 걸어 이것저것 묻는다는 게 썩 편치 않은 마음이었는데, 다행히 청중 속에 섞여 그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게 됐던 거다. 시인은 이날 여러 이야기를 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감동을 준 건 그가 어떻게 시에 대한 열정을 사르었는지, 물증을 들고 나온 대목에서였다. 그는 40여년 동안 중고등학교에서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교사로 살면서, 시를 심장에 넣고 섬과 섬을 떠돌았다. 아직 정식으로 등단하기 전 1955년부터 내리 4년 동안 매년 자신이 쓴 시를 등사를 하고, 표지를 만들어 니스를 칠해 그늘에 말리고, 철사를 ㄷ자로 구부려 일일이 제본을 해서 200권씩 만들어서 선후배와 친지들에게 회신용 엽서를 동봉해 보냈다고 했다. 그는 그 시집 몇 권과 엽서 몇 장을 보여주었다. 객석에서 작은 탄성이 터져 나왔다.

    시에 대한 그의 사랑은 헌신적이었다. 토요일이면 인천 춘천 망우리 같은 서울 근교를 떠돌면서 느낀 걸 즉석에서 엽서에 깨알처럼 적어 자신의 주소로 부쳤다. 그러면 화요일쯤 집에서 그 엽서를 받아보게 되는데, 그 스스로 엽서의 독자가 되어 당시의 심정과 대화를 나누는 식이었다. 그러다가 섬으로 떠돌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우리나라 섬이 3188개가 있다는데 그중 1000여개는 내가 다녔다”며 “어선을 타고 우리 바다 어디를 지나가도 대충 내가 어딜 가고 있다는 걸 감각적으로 느낀다”고 했다. 왜 그리 섬으로만 떠돌았느냐고 물어보자 그는 “외로워서 갔다”고 했다. 그는 “이열치열(以熱治熱)인데, 이독치독(以獨治獨)은 말이 안 되는지” 물었다. 따지고 보니 그는 불행한 청년기를 보낼 수밖에 없었던, 헤밍웨이가 ‘해는 또다시 떠오른다’의 서문에서 말했던 ‘잃어버린 세대’(Lost Generation)였다. 성장기는 일제강점기였고, 20대 청춘기에는 6·25전쟁과 폐허가 이어졌다. 다시 가난을 극복하자는 군대식 행진이 청년의 푸른 감성을 짓눌렀다.

    “모두 막혀 버렸구나/ 산은 물이라 막고/ 물은 산이라 막고// 보고 싶은 것이/ 보이지 않을 때는/ 차라리 눈을 감자/ 눈을 감으면/ 보일 거다/ 떠나간 사람이/ 와 있는 것처럼/ 보일 거다// 알몸으로도/ 세월에 타지 않는/ 바다처럼 보일 거다/ 밤으로도 지울 수 없는/ 그림자로 태어나/ 바다로도 닳지 않는/ 진주로 살 거다”(‘그리운 바다 성산포 66- 보고 싶은 것’)

    지치고 허기가 져 내내 적당히 점심을 해결할 곳을 두리번거리며 걸었는데 주변에 식당은 보이지 않고 종달해안도로만 썰렁하게 성산봉을 바라보며 이어지는 길이었다. 제주의 등 푸른 고등어를 조려서 차진 그놈의 살에다 자글자글 붉은 국물을 얹어 소주 반주로, 오전의 피로와 고독을 보상받고 싶었다. ‘해녀의 집 식당’ 간판만 덩그랗게 눈에 띄는데, 그것 말고는 앞으로도 한참을 더 걸어야 할 막막한 풍경이다. 해녀의 집에 들러 해삼 한 접시와 소주를 시켰다. 해삼은 맑고 붉었다. 홀로 다 먹기에는 큰 접시다. 시인과는 반대로 소주 한 잔에 해삼 두 점을 먹었다.

    “나는 떼놓을 수 없는 고독과 함께/ 배에서 내리자마자/ 방파제에 앉아/ 술을 마셨다/ 해삼 한 토막에/ 소주 두 잔/ 이 죽일 놈의 고독은 취하지 않고/ 나만 등대 밑에서 코를 골았다”(‘그리운 바다 성산포 45- 고독’ 전문)

    성산 일출봉 입구는 뭍에서 온 여자중학생들의 재잘거림으로 뒤덮여버렸다. 봄부터 수학여행을 떠나는 모양이다. 봄볕이 더워 이마에 흐르는 땀을 훔쳐가며 언덕 위로 올랐다. 멀리 섬 하나가 누워 있다. 파랗디파란 바다에 섬이 보이는데, 그 섬은 아닌 게 아니라 소가 배를 깔고 턱을 괸 채 먼 바다를 무심하게 바라보는 꼴이다. 우도는 우도(牛島)다. 무엇보다도 바다가 소주 빛깔보다 훨씬 더 파래서, 아무리 퍼 마셔도 취하지 않을 것 같다.

    시인은 처음 일출봉에 올라 그 섬이 ‘우도’라는 걸 몰랐다고 했다. 그래서 그는 그냥 ‘무명도’라는 제목으로 “저 섬에서 /한 달만 살자 /저 섬에서 /한 달만 /뜬 눈으로 살자 /저 섬에서 /한 달만 /그리운 것이 /없어질 때까지 /뜬 눈으로 살자”고 썼다.

    그는 나중에 그 섬 이름을 알고 난 뒤에도 그냥 ‘무명도’를 고집했다. 이름이 있다면, 이름을 안다면, 고독이 사라질지 모른다. 그는 1978년에 내놓은 이래 지금까지 30년 넘게 독자의 사랑을 받고 있는 시집 ‘그리운 성산포’ 서문에 “일출봉에서 우도 쪽을 바라보며 시집을 펴면 시집 속에 든 활자들이 모두 바다로 뛰어들”것이라고 썼다. 나는 그의 연작시 중에서도 “성산포에서는/ 바람이 심한 날/ 제비처럼 사투리로 말한다”(‘그리운 바다 성산포 36- 감탄사’ 부분)는, 높고 쓸쓸하고 서글픈 ‘백석’ 같은 대목이 좋다. 그리고 “덜컹덜컹 세월이 흘렀다”고 쓴 ‘바다의 오후’ 그 대목도 시리다. 강물이 흐르는 것처럼 잔잔하고 지루하게 살다가(이것만으로도 크나큰 축복이겠지만), ‘덜컹덜컹’ 사랑하고 갈 수 있다면 더 무슨 말을 붙일까.

    선임기자 jhoy@segye.com

    그리운 바다 성산포

    살아서 고독했던 사람 그 빈자리가 차갑다
    아무리 동백꽃이 불을 피워도
    살아서 가난했던 사람 그 빈자리가 차갑다.
    난 떼어놓을 수 없는 고독과 함께
    배에서 내리자마자 방파제에 앉아 술을 마셨다.

    해삼 한 토막에 소주 두 잔 이 죽일 놈의 고독은
    취하지 않고, 나만 등대 밑에서 코를 골았다.
    술에 취한 섬 물을 베고 잔다.
    파도가 흔들어도 그대로 잔다.
    저 섬에서 한 달만 살자.
    저 섬에서 한 달만 뜬눈으로 살자.
    저 섬에서 한 달만 그리움이 없어질 때까지


    성산포에서는 바다를 그릇에 담을 수 없지만
    뚫어진 구멍마다 바다가 생긴다.
    성산포에서는 뚫어진 그 사람의 허구에도
    천연스럽게 바다가 생긴다.

    성산포에서는 사람은 슬픔을 만들고
    죽어서 취하라고 섬 꼭대기에 묻었다.
    살아서 그리웠던 사람 죽어서 찾아가라고
    짚신 두 짝 놓아 주었다.

    삼백육십오일 두고두고 보아도
    성산포 하나 다 보지 못하는 눈
    육십 평생 두고두고 사랑해도
    다 사랑하지 못하고 또 기다리는 사람


    ■이생진

    ▲1929년 충남 서산 출생

    ▲1965~1969년 김현승 시인의 추천을 받아 ‘현대문학’으로 등단

    ▲‘산토끼’ ‘바다에 오는 이유’ ‘그리운 바다 성산포’ ‘섬에 오는 이유’ ‘외로운 사람이 등대를 찾는다’ ‘혼자 사는 어머니’ ‘서귀포 70리길’ 등 시집 31권, 수필집 ‘아무도 섬에 오라고 하지 않았다’ ‘걸어다니는 물고기’ 등.

    ▲윤동주문학상, 상화시인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