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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미와 달/권혁수-거미/박성우-늙은 거미/박제영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10. 9. 2. 1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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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미와 달/권혁수

 


듣자니, 거미란 놈이 거리의 나뭇가지에다
미니홈페이지를 개설했다는군요


손님을 기다리시는 모양인데


하루 종일 푸른 하늘을 배경화면으로 깔고
구름과 시원한 비바람을 실시간으로 서비스해도
파리새끼 한 마리 얼씬거리지 않는다네요


아무래도
수억 광년 떨어져 있는 별이나
흘러간 팝송 같은 개울 물소리라도
메뉴판에 더 얹어놔야 할까봅니다


목이 길어 목마른 밤


달덩이 하나 덜렁 거미줄에 걸리자
허기진 녀석이 졸다 말고 덥석
마른 이빨로 꽉, 깨물었네요 정신없이
엄마 젖 빨 듯 달빛을 빨아대네요


저런!
하루하루 쭈그러드는 달이 안쓰럽네요
오는 그믐밤엔 당신
거미줄에 걸리는 꿈을 꾸게 될지도 모르겠군요
그렇거든, 복권 사세요
행운이라도 혹은 불운이어도
걸리는 건 어차피 운이 아니던가요

 


 
-시집『빵나무아래』(천년의시작, 2010)
2010-08-31 / 23시 57분

 


거미/박성우

 

 

거미가 허공을 짚고 내려온다
걸으면 걷는 대로 길이 된다
허나 헛발질 다음에야 길을 열어주는
공중의 길, 아슬아슬하게 늘려간다


한 사내가 가느다란 줄을 타고 내려간 뒤
그 사내는 다른 사람에 의해 끌려 올라와야 했다
목격자에 의하면 사내는
거미줄에 걸린 끼니처럼 옥탑 밑에 떠 있었다
곤충의 마지막 날갯짓이 그물에 걸려 멈춰 있듯
사내의 맨 나중 생(生)이 공중에 늘어져 있었다


그 사내의 눈은 양조장 사택을 겨누고 있었는데
금방이라도 당겨질 기세였다
유서의 첫 문장을 차지했던 주인공은
사흘만에 유령거미같이 모습을 드러냈다
양조장 뜰에 남편을 묻겠다던 그 사내의 아내는
일주일이 넘어서야 장례를 치렀고
어디론가 떠났다 하는데 소문만 무성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아이들은
그 사내의 집을 거미집이라 불렀다

 

거미는 스스로 제 목에 줄을 감지 않는다


(2000년 중앙일보 신춘 문예 당선작)|
2010-09-02 / 낮 12시 40분

 

 

늙은 거미/박제영


  늙은 거미를 본 적이 있나 당신, 늙은 거문개똥거미가
마른 항문으로 거미줄을 뽑아내는 것은 본 적이 있나 당
신, 늙은 암컷 거문개똥거미가 제 마지막 거미줄 위에 맺
힌 이슬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것을 본 적이 있나 당
신, 죽은 할머니가 그러셨지 아가, 거미는 제 뱃속의 내장
을 뽑아서 거미줄을 만드는 거란다 그 거미줄로 새끼들
집도 짓고 새끼들 먹이도 잡는 거란다 그렇게 새끼들 다
키우면 내장이란 내장은 다 빠져나가고 거죽만 남는 것이
지 새끼들 다 떠나보낸 늙은 거미가 마지막 남은 한 올 내
장을 꺼내 거미줄을 치고 있다면 아가, 그건 늙은 거미가
제 수의를 짓고 있는 거란다 그건 늙은 거미가 제 자신을
위해 만드는 처음이자 마지막 거미줄이란다 거미는 그렇
게 살다 가는 거야 할머니가 검을 똥을 쌌던 그해 여름, 할
머니는 늙은 거미처럼 제 거미줄을 치고 있었지 늙은 거
미를 본 적이 있나 당신

 

 

-시집『뜻밖에』(애지,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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