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영환 지상 시 창작 강의 28
현대시란 무엇인가?
우리는 현대시란 말을 자주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요즘 쓰여지고 있는 시들을 일컬어 현대시라고 이름한다. 그러면 시인들은 모두 현대시를 쓰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현대시를 지향점으로 삼고 그것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인가? 우리가 부르는 현대시란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야 홀바른 해석일까. 다시 말하면 현대시가 가지고 있는 현대적인 의미는 무엇인가? 우리는 그것이 가지고 있는 정확한 의미도 모른채 그냥 쉽게 부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되짚어봐야 할 것이다.
한편의 시를 읽을 때 우리는 그것이 가지고 있는 세계를 밝혀 보고자 한다. 담고 있는 세계가 이미 누군가에 의해 말해졌거나 낡은 기법일 경우에 쉽게 식상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범람하는 작품들에서 무엇이 현대적이고 근대적인가에 대하여는 유심히 살펴보지 않고서는 알 수가 없다. 그러나 대체로 알려진 바에 의해 그것을 판단하는 기준은 있게 마련이다.
현대에 쓰여진 모든 작품이 현대시의 범주에 들어갈 수는 없다. 현대시라고 했을 때 그것은 현대가 가진 정신적인 흐름을 대변하고 있지 않으면 현대시라고 규정 지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면 현대시가 가진 정신적 흐름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런 물음에 초보적이면서 쉽고 간단하게 답한다면 그것은 20세기라는 시대적 상황에 밀착하여 나타내는 시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20세기 상황은 무엇인가? 그것은 20세기를 가로지르는 몇가지 대별되는 정신상황으로 파악할 수 있다. 이 세기의 정신상황을 대변하는 철학자로는 니이체, 프로이드, 마르크스를 들 수 있다. 니체의 허무주의적 상황과 더불어 일체의 의식적 사고는 무의식의 내용이라 할 것이며 이 둘의 충돌들의 가면이라고 주장하는 프로이드의 의식과 마르크스의 허위의 개념, 언제나 그 자체의 편향된 시각에서 세계를 봄으로 허위의 섹라 설파하는 곧 이데올로기의 허위성이 그 내용이다.
20세기 출발은 하우저의 지적대로 세계 제1차 세계대전에 둘 수 있으며 또한 이 세기에 접어들면서 어지럽게 개화하는 예술의 양식들, 이를테면 입체파, 표현주의, 초현실주의 등 여러 이즘을 우리는 현대예술의 패턴으로 일을 수 있게 된다. 이들 여러 예술적 경향은 모두가 한결같이 전시대의 예술경향들인 사실주의나 인상주의와 연결되며, 한편 그 연결관계를 원칙적으로 폐기하려는 몸짓으로 이해된다. 하우저의 표현에 따르면 반인상주의 경향을 띤다는 것이다.
그 특질을 들면 다음과 같다.
1) 현실의 환영을 추구한다는 사실주의적 요소를 강력하게 부정한다. 자연 물체의 고의적 왜곡을 통해 예술가는 자기의 인생관을 표현하게 된다고 요약된다.
2) 마술적 자연주의에 속한다. 마술적 자연주의란 브라끄, 샤갈, 루오, 피카소, 달리 등의 그림에서 무섭게 깨닫는 비현실적 세계, 그의 표현대로 제2의 세계를 지향하고 있다.
3) 20세기 예술의 반인상주의적 경향으로 우리는 그것이 보기 싫은 예술의 세계라는 점에서 착안한다. 보기 싫은 예술의 세계란 인상파의 부드러운 화음, 색조를 거부하고, 한마디로 그로테스크한 세계를 지향한다는 말이다. 그것은 우리 시대의 예술가들인 피카소, 카프카, 조이스 등의 작품에서 우리가 읽을 수 있는 암담, 우울, 고통의 이미지라 할 수 있다.
하우저는 이것은 결국 감각적, 쾌락주의적 감정에 대한 투쟁이라 하며, 이러한 태도는 그후 특히 시의 경우에 테러리스트와 레토시안이라는 두 가지 그룹으로 시인들을 양분하게 된다. 전자는 새로운 허무주의로 요약되는 상징주의, 초현실주의 계열의 시인을 의미하며, 후자는 상징주의적 경향을 지속하면서도 전자처럼 언어의 테러행위가 아니라 어떤 전달성을 목표로 하는 시인들 이를테면 말라르메, 발레리, 엘리엇 등으로 포괄 할 수 있다. 후자들에 비해 전자들은 언어에 대한 철저한 테러는 침묵이기에 초현실주의자들에게서 보듯 수사학은 자살행위요, 이런 자살행위는 예술가로서 자기기만이라는 지적을 한다.
위와 같은 현대시의 개요 속에서 우리가 마주치는 예술적 태도는 언어에 대한 테러냐 아니면 언어에 대한 레토릭이냐 하는 것은 현대시를 포괄적으로 이해하려는 우리에게 매우 바람직한 방법론을 암시한다고 할 수 있다.
유난히 바람이 많이 불었다
세 그루의 측백나무가
서로의 어깨를 맞닿으며 윙윙거리던
철길 옆 늦은 봄까지 언제나 바람이 그치지 않던
그해 오월
낮은 돌담들은
더욱 낮게 엄드리어 소리죽여 바람에 항거하였다
뿌리만 남았던 아카시아의 줄기에서
어느새 먼길까지 향기 날리는 꽃망울을 달고
푸르름에 항거하듯
눈부시게 일렁거리는 오후
원색의 파도는 지평선 가까이에서
더욱 그 푸른빛을 발하였다
고요한 바닷길을 따라
가끔씩
물속의 먹이를 쫓는 두 마리의 갈매기가
바람을 타고 우리들의 곁으로 다가 올 즈음
황혼을 등에 지고 귀가하는 아낙네들
그들의 길게 젖은 그림자 위로도
아직도 푸른 찔레의 망울같은
향기로운 삶의 무게가 실려 있었다.
독자의 시 <바다부근> 전문
그런 점에서 우리는 위 독자의 작품에서 현대성을 찾아 볼 수 없음을 느낄 수 있다. 물론 습작기이기에 그럴 수밖에 없다고 단정한다면 할 말은 없겠지만 현대적인 의미의 작품을 만들어 보는 것도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시인의 삶이라 할 수 있다.
날이 갈수록
뼈 속에 바람이 자주 분다
(뼈 하나 간수하기 힘든 세상)
오늘은 밤길을 걷다
느닷없이 떨어지는 별똥별을 보고
본능적으로 감싸안던 내 뼈
무사하구나
뼈만 노린다는 바람과 꽃과 별떨기 속에서
용케 상하지 않은, 고마운 것
적당히 리듬타고 흔들 줄은 알지만
쉽게 부러지지 않는
내 뼈에 대해서 관대해지기로 결심한 날
애써 지키지 않아도 단단히 여문 뼈 속에
적이라 여겼던 바람을
나는 보았다
뼈 속이 그들의 안락한 근거지였음을,
김영은 <뼈> 전문
우리가 현대시라고 할 때 대체로 그것은 두 가지 점에서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첫째로 현대란 구체적으로 <언제>를 지적하는 문제와 둘째는 현대는 이런 시대구분을의 문제를 떠나서 구체적으로 어떤 특성들로 집약되는가의 문제이다. 시의 경우에는 일반적으로 제1차 세게대전을 전후해서 나타나는 이미지즘, 다다이즘, 쉬르리얼리즘, 미래주의 등 여러 이즘을 내포하는 시들을 현대시라고 부르고 있다. 이것은 19세기말의 대표적인 시의 양식이었던 상징주의의 변용이거나 거부를 그 특성으로 하고 있다. 한마디로 상징주의에 내재한 낭만주의적 요소를 그 평가기준으로 볼 때 그런 특성을 지닌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자면 반낭만주의가 곧 주지주의라는 등식의 성립을 이 점에서 보게 되겠지요. 그러나 스피어즈의 견해에 따르면 현대시의 이해는 좀더 면밀하게 전개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과거에 대한 의식을 단절한다는 인식으로서 현대성은 사실 1920년대가 아니라 그 이전으로 올라간다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초기 주지주의의 많은 활력을 니체나 입센, 버틀러, 쇼우 등에게서 보게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대시가 주지주의라는 견해 역시 주지주의의 개념을 어디에다 두는가에 따라 그 인식의 편차가 드러남을 숨길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20세기는 초기 주지주의와 50년대 중엽에 점진적으로 확산되어 나타나는 새로운 형태의 문학까지를 파악해야 함으로써 그 지적 상황이 이해된다는 데에도 유의해야할 것이다.
넓은 뜻의 주지주의는 서구 문명의 경우, 르네상스 시대를 기점으로하여 그 후 종교개혁 이후의 정치적, 과학적, 사회적 측면의 여러 발전 및 개혁을 일관하는 개념으로, 상징주의 시인 랭보의 의식이나 전술한 20년대 시운동의 공통적 특질을 지향한다고 보는 것이다.
결국 그것은 1)인습의 죽은 손아귀에서 해방됨과 2)전통, 신념, 의미의 상실을 의식화 하는 개념이다. 협의의 주지주의는 이 두가지 사항 중 시적 인습의 저항이라는데 비중을 크게 두어 감정보다 지성을, 청각보다 시각을, 불명료보다 명료와 정확성을 강조하는 이름 그대로의 주지주의인 심상주의 및 이 주의에 영합되는 시들을 의미한다.
이런 특성으로 이해되는 현대시는 크게 반낭만적 경향을 띤다는데 유의하게 되지만 이러한 면면한 흐름이 그러나 크게 파국을 일으키는 시기가 1950년대였다. 그것은 정확히 1957년 우주선인 스푸트니크호 발사의 해이기도한 이 때를 기점으로 독창적이던 초기 주지주의가 사진술, 라디오, 영화, 자동차, 비행기의 발견과 관계되었음에 비해 새로운 주지주의는 스푸트니크와 관계지어 파악하는 것이다. 곧 새롭고 충격적인 기술과학의 발전에 의하여 문학의 제2의 혁명이 오게 된 것이다. 새로운 주지주의 곧 후기 주지주의는 뒤에 언급하겠지만 이 무렵에 나타나는 이오네스꼬, 베케트 등의 부조리 연극, 시에 있어서 필립 라아킨의 ,덜 속은 자>의 세계, 그리고 로버트 콘퀘스트가 펴낸 엔솔로지 <새로운 시들>의 미국 비트 시인들, 특히 ‘짓는다’의 긴스버그로 대표되는 그룹과 잭 케루악 등의 출현에 힘입고 있다. 이것이 포스트, 안티, 네오라는 에피셋트가 붙는 주지주의이다. 곧 후기주지주의, 반주지주의, 신주지주의가 그것이다.
현대시의 특성은 아마도 반주지에서 찾아질 수 있다. 초기주지주의의 기본 골격이었던 반낭만주의에 대한 저항, 환언하면 친낭만주의적 경향을 띠게 됨을 의미한다. 이런 관점에서 독자의 작품을 살펴보자.
여명의 빛을/되돌려주는 명경지수//
사방을 둘러봐도/바다로 가는/열린 문은 없고/나지막한 산들이/감싸 안은/낯익은 고향의 못//
작은 배들이/풀어 헤친/펄떡이는/숭어, 전어가/입맛을 돋우는/어촌의 아침을 연다.//
저 언덕빼기에/우뚝 서있는/대첩의 기념탑/아득한 그 함성이/고즈녁한 포구의/애정을 키운다//
1996.5.5 어린이날. 나들이에서 당항포.
독자의 시 <당항포> 전문
위 시는 이순신 장군의 전적지 중의 하나인 고성의 당항포를 관광하고 돌아와 쓴 기행시 중의 하나이다. 이런 기행시에 현대적인 의미를 찾는다는 건 다소 무리가 있겠지만 시의 창작에 있어서는 어떤 유의 작품에서도 현대성이 요구되는 것은 당연하다. 어떤 연에서도 그런 모습을 찾아 볼 수 없음은 이 시가 결코 현대적인 감각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할수 없겠다.
시에 대한 깊은 이해없이 시를 쓴다는 것은 피상적인 세계만을 드러내기에 더욱 조심해야할 부분이라 본다. 상식적이거나 피상적인 모습으로는 다양한 독자들의 요구에 따를 수 없기 때문이다. 독자 중에는 시인보다 더 높은 소양과 시적 이해를 지닌 전문가도 있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현대시의 현대적 의미는 또한 꾸준히 변화되고 있으며 그 도착지는 예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시인들에 의해 추구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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