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김백겸의 포엠 리뷰【7】문화의식의 다중세계(Polyverse)와 시들|김백겸(웹진 시인광장 主幹) 웹진 시인광장 2010년 8월호[통호 제18호] |작성자 웹진 시인광장
- 조정권「 머나먼...」(월간 『현대시학』 2010년 2월호) - 조용미「흰 꽃의 극락」(계간 『시인시각』 2010년 봄호) - 박성현「아프리카」(계간 『시에』 2010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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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의식의 다중세계(Polyverse)와 시들
시란 시인이 마음의 환상을 글자(기호)로 표현한 메시지이다. 본질상 두 남녀사이의 ‘사랑’과 다르지 않다. 다만 시는 세계를 대상으로 한 ‘사랑’을 표현한 ‘연애 편지’이다. ‘연애편지’라는 표현을 쓴 것은 나를 보아달라는 ‘외침’과 ‘발화’가 시 안에 타오르기 때문이다. 옛 사람들이 시를 쓰고 물 위에 흘려보냈다는 고사가 있다. 이때의 시는 시인내부의 자신(Self)에게 보낸 ‘외침’이다. 인간(人間)이 아니라면 ‘시’란 비둘기가 본 파르테논 신전의 ‘대리석’처럼 흰 종이위의 검은 무늬가 된다. 고가 그림을 구매한 부호는 캔버스의 물감과 액자가 아닌 작가의 예술적 환상에 돈을 지불한다. 전시장 앞의 관객은 환상의 ‘기쁨’과 ‘전율’을 위해 다리가 아픈 수고를 기꺼이 감내한다.
이 세계가 유니버스(Universe)가 아닌 폴리버스(Polyverse)라는 신과학자들의 생각이 있다. 불교의 ‘삼천대천세계’라는 해석과 맥락이 닿아 있다. 물리적 실체의 여부는 모르겠으나 인간의 심리환상구조는 폴리버스(Polyverse)가 맞는 것 같다. 후기정보사회의 문화생산력은 콘텐츠에 Multi와 Poly구조를 요구한다. 뒤집어 생각해보니 인간의 문화의식도 그만큼 복잡해 졌다. 복잡해진 세계(문화세계)를 대상으로 시를 쓰다 보니 시인들의 시도 복잡해진다. 그러나 시는 복잡함을 단순함으로 설명대신 암시로 표현하는 기법이 아니던가. 단순한 시에서 복잡함을 끌어내보자.
1.조정권
발은 늘 客地
죽어라 하고 뛰어내린 곳이
삶
(시 「머나먼...」,《현대시학》2010.2월호)
이 시는 일본의 ‘하이꾸’와 형식과 분위기가 닮았다. ‘하이꾸’의 대가 바쇼는 ‘시란 두 개의 현실을 결합해서 표현하는 것’이라는 금언을 남겼다. 조정권의 시가 이 정의에 대한 본보기가 아닐까. 인간존재를 “발”로 은유하고 세세년년 돌아다니는 영혼의 윤회 길을 “客地”로 은유했다. “죽어라 하고 뛰어내린 곳이 삶”이니 이승의 고해를 말한다. 피안과 차안의 풍경을 짧은 표현으로 결합했다.
하이꾸는 의표를 찔러야 하는데 단순한 ‘낯설게 하기’로서는 성공하기가 어렵다. 작은 이미지와 큰 현실이 이미지의 암시로 결합해야 한다. ‘아름답구나, 창호지 구멍으로 내다 본 밤하늘의 은하수여’라는 하이꾸가 있다. ‘창호지 구멍’이라는 작은 현실과 ‘밤하늘의 은하수’라는 큰 현실과 결합했기에 아름다운 시가 된다.
조정권의 시도 의미상으로는 이 시 이상의 큰 폭의 거리감을 드러낸다. “죽어라 하고 뛰어내린 곳”이라는 표현이 재미있다. 현애살수(懸崖撒手)라는 고사가 생각나서다. 제자가 절벽에 미끄러져 나무뿌리를 잡았을 때 "손을 놓아라"는 스승의 말에 상근기(上根機)는 손을 놓지만 하근기(下根機)는 땀을 뻘뻘 흘리면서 끝까지 절벽에 매달린다. 이 때 자비로운 스승은 사정없이 손등에 가죽채찍을 내리쳐 손을 놓게 한다 (어리석은 제자는 절벽을 가린 구름 때문에 발아래가 바로 바닥임을 모르기 때문에). 현실경험에 Context로서의 문화축적이 있어야 풍부한 해석의 아름다움이 가능하니 시란 참 복잡한 물건이다.
2. 조용미
泰山木에 꽃이 필 때,
그 향기는 죽은 아이의 혼백
病을 불러들이는 향기
꽃잎 한 조각 한 조각이 모두 향기의 덩어리인
태산목 커다란 흰 꽃이
극락처럼
피어날 때
그 그늘에서 한숨 잠을 자고나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저 두근거리는 흰 빛의 커다란 꽃등이
병을 불러들인다
꽃봉오리가 붓끝을 닮은 木筆
북쪽으로 고개를 두는
北向花
나의 침대는 자주 북향이어서
칠성판이 아니어도
북쪽으로 반듯이 마음을 누인다
열매가 붉게 익을 때쯤, 두근거림이 잦아들 무렵
병도 당신도 함께 데리고 나가
야윈 풍경들을 살펴줄까
(시 「흰 꽃의 극락」,《시인시각》 2010. 봄호 )
태산목을 인터넷으로 뒤졌더니 꽃집에서 관상으로 파는 흔히 본 꽃이었다. 목련과로 북아메리카가 원산이며 꽃과 잎이 다른 목련보다 크기에 태산목이라 붙였다고 한다. 그래도 그렇지 泰山木이라니... 과장이 심하다. 기표의 환상과 현실의 어긋남이 이상한 여운과 풍경을 제공한다. 사진을 보니 광택이 나는 이파리는 상록인데 동백처럼 생명력이 강한 식물로 보였다.
그러나 조용미는 이 꽃에서 죽음의 풍경을 본다. 화자의 마음은 태산목에 의탁해서 일상 저편세계를 드러낸다. 인식론이 말하기를 우리는 사물자체의 모습을 알 수가 없다고 한다. 인간의 변덕스런 의식과 사물이 부딪힌 관계가 세계풍경이다. 시는 시인의 무의식에서 길어 올리는 이미지이기에 무의식은 의식이 보지 못하는 풍경까지 본다. 화자는 몸이 아프고 병실에서 본 태산목 향기는 “죽은 아이의 혼백”처럼 느껴진다. “태산목 커다란 흰 꽃이 /극락처럼”피어나는 이미지가 아름답다. 그러나 극락(極樂)이란 절경(絶境)처럼 사람이 살수 없다는 반어가 들어가 있다. 기표와 기의가 삐딱하게 어긋나서 가시가 들어 있는 말이다.
시란 현실을 뒤집는 것이기에 대상과의 관계 시야가 멀수록 시는 성공한다. 이시의 아름다운 풍경이 절경(絶境)이지만 비장미여서 마음이 쓰인다. 건강한 시인이 이 시를 썼다면 비장미는 다른 색깔의 풍경과 아름다움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이 시가 시참(詩讖)의 이미지를 암시하고 있다면 마지막 연의 “열매가 붉게 익을 때”가 어둠 속의 등불처럼 달리 보이는 대목이다. “흰 빛의 커다란 꽃등”이 지는 시간이 오고 두근거림이 잦아들어 시인의 “야윈 풍경들”이 가을의 풍요 속으로 걸어가기를 기도하자.
3. 박성현
부디, 나무 그늘에는 앉지 마세요. 바비 원숭이가 떼를 지어 다니다가, 순식간에 당신의 눈을 파먹을 수 있으니까요. 당신의 권총과 수렵용 칼은 그늘에서 한가롭게 잠을 자다가 주인을 잃어버리기도 하지요. 그러나 그것은 가십도 아닙니다. 당신이 아프리카로 부르는 곳에는 흔한 일이니까요.
*
당신은 붉은 여우의 붉은 눈빛을 닮았습니다. 그래서 당신을 ‘우기의 붉은 여우’라 부르겠습니다. 폭풍이 부는 우기에, 당신은 여기, 탄자니아 북부에 도착합니다. 당신의 손과 혀는 당신과 당신을 엮고 가장 먼 당신을 부릅니다. 수많은 당신은, 대략 12월에 나무줄기를 엮어 활을 만드는 법을 알게 됩니다. 단지 활 하나만으로도 당신은 충분히 족장의 자격이 있습니다. 기린의 목을 뚫어
그 피를 나눠 마십니다. 마실 때마다 징표가 씨줄과 날줄로 얽히며 당신의 몸을 파고듭니다. 매년 우기 전에 찾아오는 모래 폭풍과 더위, 가뭄을 견디게 합니다. 당신은 대륙이 빙하로 덮였을 때가 있었다고, 바위에 무엇인가를 그립니다. 당신의 유전자에 새겨진 몇 개의 코드처럼.
우기와 건기, 건기와 가뭄이 수없이 교차한 후, 당신은 독초를 이겨 화살촉에 즙을 바릅니다. 평범한 내륙의 풀이 독이 될 때까지 당신은 많은 목숨을 잃습니다. 독은 유용합니다, 포도처럼 많은 고기를 만들 수 있습니다. 그늘에서, 당신은 짐승의 습격을 받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가십도 아닙니다. 상상할 수 없는 시간을, 그렇게.
1만 년 전부터
당신이 꿈을 만들었던 아프리카.
태양과 태양이 충돌하고,
그 빛의 파장 속에서
달과 달은 수면이 진동하듯
서로를 잡아먹습니다.
천체가 그러하니, 사람의 죽음 또한 불가사의였습니다. 동굴 내부에 새겨진 암각에서, 나는 당신의 수렵을 상상합니다. 아프리카에서 유럽으로, 알래스카와 남미에 이르는 긴 원환은 우리가 해탈이라 부르는 정신의 극단이 아닐까요. 습관은, 물 위의 부표처럼 지도를 떠다니다가 해초에 좌초되기도 합니다. 나는 당신의 허벅지 근육에 패인 상처와 상처의 길고 긴 습속을 만집니다.
당신은 아프리카에서, 사람들이 대륙을 이동하기 전에 시간의 순환을 만들어냅니다. 그것은 일종의 법이고, 감춰진 말씀입니다. 사람은 복종할 것이며, 그 뜻을 이해하기 위해 수많은 피를 흘릴 것입니다. 그 먼 시간을 돌아, 다시 당신은
아프리카에 왔습니다.
부디, 나무 그늘에는 앉지 마세요.
바비 원숭이와 암사자가,
당신의 잠을 할퀴고 갈 거니까요.
(시 「아프리카」,《시에》 2010. 봄호 )
태초의 에덴은 아프리카였다는 말이 있다. 왜 이스라엘이 있는 메소포타미아가 아니고 아프리카인가. 유전자 추적을 한 과학자들에 의하면 현생인류의 시조가 아프리카에서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생명나무의 뿌리에서 전 세계로 가지를 쳐 나간 인류의 모습이 지금의 복잡한 진화나무 군상을 만들어 냈다.
박성현이 바라본 세계인식의 공부가 만만치 않다. 원시인간이 바위에 그린 “그림”들의 외부표현이 인간의 “유전자에 새겨진 몇 개의 코드”인 내부표현과 하나라는 생각이 그렇다. 이 시가 우수한 점은 자치하면 추상으로 빠지기 쉬운 주제를 구체적인 표현과 스토리의 형식으로 그려낸 점에 있다.
진화론자들은 유전자 결정론으로 인간의 자유의지와 운명을 과학적 공식안에 가두고자 한다. 환원론자들은 이 세계를 유리처럼 투명한 과학의 거울안에 가두는게 목표다. 그러나 세계는 여전히 신비다. 인간의 형질을 결정한다는 DNA가 비유하자면 수학책이 아니라 문학작품이라는 사실이 최근에 밝혀졌다. DNA는 환경(해석)에 의해 다른 몸을 만들어내는 가능성과 가소성의 프로그램이다. 진화(進化, Evolution)는 서구이성의 목적론과 인간우월주의에 편승한 편협한 용어이다. 생명현상은 변이(變異, Variation)로 설명해야 그 시야가 더 넓어진다.
박성현은 이 긴 시에서 영원회귀의 시간에서 이루어지는 생명의 탄생과 죽음에 존재의 변환에 대한 서사를 그려냈다. 소시민의 일상과 퇴폐적 수사에 빠져있는 요즘 시단에서는 드문 주제이다. 이 시인의 생각에 대타자인 “당신”은 사냥꾼이기도 하고 “우기의 붉은 여우”이기도 한 주체와 객체를 넘어선 ‘영원’이다. 이 일자(一者)인 ‘영원’은 인간의 현전(現前)에서 “아프리카”이며 “독초”이며 구체적 감각으로서의 “시간”이며 “꿈”이다.
인간의 내면과 외부세계는 칡넝쿨처럼 복잡하게 얽혀있어서 인간의 의지와 운명이 세계상을 만들어내고 있고 예술도 그런 표현의 하나이다. 조지 엘리엇은 ‘예술이야말로 삶에 가장 가까운 것이다’라는 금언을 남겼다. 삶은 환원불가능한 세계상의 모습과 닮아있고 예술은 삶의 경험을 상상으로 증폭(Amplification)해서 관객에게 들려주는 음악이다. 세계상이 ‘시계’질서의 코스모스가 아닌 ‘구름’운동의 카오스라는 요즘의 과학은 그 스스로가 신비세계의 미로궁에 갇힌 테세우스가 되었다. 예술적 직관은 말한다. 과학이여, 네가 ‘아리아드네의 실’인 예술의 도움이 아니면 ‘지식의 미로’에서 영원히 탈출할 수 없을 거라고.
자연의 두 얼굴인 과학과 예술은 몸이 하나이지만 얼굴이 두 개인 ‘야누스’로 표상된다. 실재의 자연은 하나이지만 이를 해석하는 인간의식이 이원적이기 때문이다. 의식이 이렇게 변이(Variation)한 데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아마도 더 풍부한 세계상을 보고자 하는 생의 욕구였으리라. 자연의 힘 스스로도 중력 강력 약력 핵력의 다중구조로 물리세계를 디자인 했다. 인간의 마음이 다중구조인 까닭은 인간도 자연시스템의 일부이기 때문이 아닐까 상상한다. 시도 물론 당연히 다중구조로 삶과 세계의 모습을 암시해야 한다. 이미지와 이미지가 서로를 마주보고 있는 만화경의 풍경은 의미와 상상력의 증폭을 가져온다. 폴리버스(Polyverse)의 풍경 앞에 선 시인들은 고뇌한다. 자신이 발 디딘 세계의 좌표에서 어떤 시를 지렛대로 사용해야 다른 세계의 창문을 들여다 볼 수 있을까를 회의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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