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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예 평론가 나민애가 뽑은 이달의 좋은 시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10. 9. 19. 0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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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예 평론가 나민애가 뽑은 이달의 좋은 시
 
나민애
□ 시가 낳은 '사자후(獅子吼)'의 내공

여기 와서 시력을 찾는다.
여기 와서 청력을 회복한다.
잘 보인다. 아주 잘 들린다.
고추잠자리까지, 풀메뚜기까지
다 보인다. 아주 잘 보인다.
풍문이 아니라, 설화가 아니라
만져진다, 손끝에 닿는다.
6천여 년 전, 포경선을 타고
바다로 나아간 사람들,
작살을 던져 거경巨鯨을 사냥한,
방책을 만들어 가축을 기른,
종교의례를 이끈,
이 땅의 사람들이 살아 있는 숨결로
온다, 와서 손을 잡는다.
피가 도는 손으로 손을 덥석 잡는다.
우렁우렁한 목소리로 말한다
어서 오라고, 반갑다고
가슴으로 끌어안는다.
한반도 역사의 처음이
선연한 햇살 속에 열린다.
여기가 처음부터 복판이었다고,
가슴 펴고 세계로 가는 출발지였다고,
반구대 암각화가 일러 주고 있다.
신령스런 벼랑이 일러 주고 있다.
눈이 밝아진다.
귀가 맑아진다.
잘 보인다. 아주 잘 들린다.

- 이건청, 「암각화를 위하여」, 『반구대 암각화 앞에서』, 동학사, 2010.

* '반구대 암각화'란 울산시 울주군 언양읍에 있는 선사 시대의 바위 그림이다. 댐 건설로 인해 수몰된 지역에 위치하고 있고 오랜 시간 풍화되었지만, 이 암각화는 누천년 살아온 위대함을 간직하고 있다. 지금 시인은 암각화 앞에 서 있는데, 시간을 달리해 수천년 전 똑같은 자리에 고대인이 암각화를 새기며 서 있었다. 그리고 같은 자리에 있었을 고대인은 시간의 격차를 넘어 시인에게 빙의된다. 아무리 아우라가 사라진 복제품의 시대라지만, 반구대 암각화는 보기 드문 진품이고, 진품은 아우라를 발휘할 수 있다. 그 힘을 통해 무기력한 현대인은 빙의된 고대인의 야성적 능력을 전달받게 된다. 

현대인의 병든 정신은 인간 본연의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현대적 삶 어디에도 모범적 인간의 궤적을 발견하기 어렵다. 이런 현실 인식에서 시인은 현대인의 정신적 양생(養生)의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우리는 여기 시인이 말한 시력과 청력이 육신의 것이 아닌 정신의 능력에 해당함을 알고 있다. '반구대 암각화'에는 역동적인 동물, 그리고 그것을 기록하는 정신 - 생명 충동이 충만하기 원했던 고대인의 본능적 생명 의지가 드러나 있다. 그 육성이 시인에게 옮겨가 비로소 이 시를 통해 우리에게 전달되고 있다. 


□ 어린 왕자의 유일한 장미 사랑법

마드모아젤 양장점 앞을 십년 넘게 지나다녔어도
쇼 윈도우 안의 마네킹 셋이 서로 흘끗거리는 건
오늘 아침 출근길에 처음 보았다 

툴르즈 로트렉의 ‘물랭루즈’에 나오는
빨간 스타킹의 비뚤어진 무희 같은
키 큰 마네킹이 돌아 서 있고 

‘7년만의 외출’의 마릴린 먼로 같은
젖가슴 늘어지고, 음탕하고
맨 종아리 허벅지까지 드러낸, 백치 같은
거품 많은 마네킹이 마주 서 있다 

은사시나무, 여름 달빛에 흔들리는
잎맥 가늘고 여린
바비 인형 같은 마네킹은 고개를 숙이고
안 보는 척 하면서 눈길을 주고 있다 

입술 삐쭉 내밀며 아랫도리 오므리는
저것들이 구미호 다 된 줄을
오늘 처음 알았다 

퇴근길엔
학교 운동장에 세워둔 내 늙은 자동차도
너무 오래 쓸쓸한 어둠 속에 떨었노라고
암내 맡은 나귀처럼 툴툴거렸다 

- 조창환, 「마네킹」, 『마네킹과 천사』, 문학과지성사, 2010.


* 조창환 시인은 바로 얼마 전에 정년퇴직했다. 사담이지만, 정년퇴직 기념식에서의 그의 얼굴이 얼마나 싱그러웠는지 모른다. 그는 습관적 출근의 금단현상을 두려워하지 않는 듯했다. 당연하다. 시인에게는 위의 시와 같은, 다른 세계로의 매진이 남아 있었으니까.

『마네킹과 천사』는 시인이 6년만에 출간한 시집이다. '마네킹'과 '천사'의 조합이라니, 이 시집의 제목은 돌연 당황스럽기까지 했다. 마네킹은 고귀한 이데아의 발치에도 못 따라갈, copy의 copy쯤 되는 존재 아닌가. 좋게 해석한다 해도 근대 문명의 선전 도구나 감각을 자극하는 쇼윈도의 허수아비를 벗어나지 못한다. 이런 '마네킹' 옆에 신성한 '천사'를 함께 둔다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그런데 시집을 읽어나가면서 오해는 시인에의 동조로 바뀌었다. 시인은 "우주는 영적 존재로 충만해 있다. 자연에 정령이 깃들어 있다는 것은 오랜 경험으로 안다. 그러나 문명에 정령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고 말한다. 

그렇다. 우리가 흔히 만물정령사상을 이야기할 때 그 만물에는 어디까지나 신의 창조물인 자연물만이 포함되어 있다. 이것은 문명중심의 근대를 극복할 어떤 대안처럼 보이지만, 그래서 만물정령사상이란 모두가 평등하고 동등한 생명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유토피아 사상처럼 보이지만, 이는 한편으로 인공물들을 소외시키는 또다른 편애이기도 하다. 달리 생각하면 인간의 창조물인 인공물들은 만물정령사상에 의해서도 위로받지 못하고 사용가치를 다 하면 쓸쓸하게 버려져 잊혀져 가는 슬픈 존재가 되는 것이다. 

시인은 말한다. 오래 두고 보고 있었더니 세상의 모든 존재-그것이 인공이든 자연이든-는 어린 왕자의 유일한 장미가 되었다고. 그랬더니 세상의 다른 차원이 열리기 시작했다고. 신이 낳았든 인간이 낳았든 세상에 태어난 모든 만물은 모두 사랑받을 자격이 있다고 말이다. 


□ 딸은 죽어도 모르는 아버지의 일기

 
딸애는 침대에서 자고
나는 바닥에서 잔다
그 애는 몸을 바꾸자고 하지만
내가 널 어떻게 낳았는데....
그냥 고향 여름 밤나무 그늘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바닥이 편하다
그럴 때 나는 아직 대지(大地)의 소작(小作)이다
내 조상은 수백 년이나 소를 길렀는데
그 애는 재벌이 운영하는 대학에서
한국의 대 유럽 경제정책을 공부하거나
일하는 것 보다는 부리는 걸 배운다
그 애는 집으로 돌아오지 않을 것 같다

내가 우는 저를 업고
별하늘 아래 불러준 노래나
내가 심은 아름드리 은행나무를 알겠는가
그래도 어떤 날은 서울에 눈이 온다고 문자 메시지가 온다
그러면 그거 다 애비가 만들어 보낸 거니 그리 알라고 한다
모든 아버지는 촌스럽다

나는 그전에 서울 가면 인사동 여관에서 잤다
그러나 지금은 딸애의 원룸에 가 잔다
물론 거저는 아니다 자발적으로
아침에 숙박비 얼마를 낸다
그것은 나의 마지막 농사다
그리고 헤어지는 혜화역 4번 출구 앞에서
그 애는 나를 안아준다 아빠 잘 가 

- 이상국, 「혜화역 4번 출구」, 《문학사상》 2010. 5.

* 옛말이 틀린 것 하나 없다. 손발이 닳도록 애기 똥기저귀를 빨다보면 힘들고 지쳐 짜증이 난다. 그러면서 생각하는 것은 단 하나. 역시 똑같은 전철을 거쳤을 부모님이다. 회사에서 구박받고 더럽고 치사해서 이딴 돈벌이 때려치울까 할 때도 그들은 여지없이 떠오른다. 슈퍼맨 같던 내 아버지도, 목청 좋은 내 어머지도 실은 밑바닥부터 힘든 오욕을 견뎌내면서 살아왔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아버지나 어머니를 전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 단지 그들을 통해 위로를 받고 힘을 얻을 뿐이다. 오늘은 우리가 죽어도 모를, 부모의 속사정을 이상국 시인의 시를 통해 다시 한번 접할 수 있었다. 무슨 말이 필요할까. 읽어보시라. 당신이 이 시인만큼 착하고 좋은 아버지를 두었다면 더욱 애절하게 그리울 것이다. 

 
□ 샤먼에게 빙의되기
 
- 전동균, 「서쪽으로 다섯 걸음」(《유심》, 2010. 7/8.)
 
얼굴에 재를 칠하고 서쪽으로 다섯 걸음 가서 나뭇가지에 흰 띠를 묶었네 당신 뼈를 묻었네
 
내 팔은 내 몸에 있으나
당신의 것
내 노래는 내 목젖에 잠겨 있으나
또한 당신의 것
 
유월에, 유월 까마귀 소리에
열매 같은 속꽃을 피워 출렁대는
무화과 그늘
천리(千里)
 
마음을 다해도 갈 수 없는 곳이 있으니, 여기
무심한 듯 가지를 흔드는 나무에게도
꽃은 유곽이며
감옥이니
 
땅의 흙들이 고개를 쳐들어 아아- 입을 벌리고 붉은 실들이 안개처럼 풀려나오고
 
다시 서쪽으로 다섯 걸음 가서 머리털을 잘라 불태웠네 새끼 밴 암코양이와 눈을 맞추고 목을 베었네
 
춤을 추듯이, 나비춤을 추듯이
 
* 가끔은 정말 기이하다. 살다보면 전혀 경험하지 못했던 어떤 것이 구체적인 이미지와 강한 임팩트를 갖고 있을 때가 있다. 그것은 데쟈뷰일까, 학습된 어떤 생각의 재현일까. 이를테면 우리는 단 한번도 넓은 광야에서 울리는 진짜 샤먼의 아우라를 경험하지 못했다. 성황당이 위풍당당한 시절이라든가 만신 깃발, 갖가지 무구들이 신성성을 지녔던 시절은 이미 지나가고 없다. 그런데도 왜, 우리는 아직까지 샤먼의 노래에 동화될 수 있는 걸까. 
 

전동균 시인의 작품을 보면서 샤먼의 노래를 다시 들을 수 있었다. 이것은 현재의 '읽기 위한 시'의 형식을 갖추고 있지만 사실 곡조 잃은 노래에 더 가깝다. 지워진 곡조에는 아마도 영탄에서 시작해서 '-하네'라고 끝을 맺을, 춤사위를 감당할만한 리듬이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그 리듬이 궁금하다면 시를 묵독할 때 생기는 심장 고동 소리를 생각해도 좋다. 그리고 이 시에서 샤먼이 의식을 치르는 동안 잠시 그에게 빙의되어도 좋다. 그렇다면 분명 깊은 슬픔과 함께 이상하게도 아름답다는 생각을 갖게 되리라.
 

□ 노숙인의 꿈속에서
 
- 함기석, 「검은 구두」 (《현대문학》, 2010. 5.)
 
공원 벤치 밑에 구두 한 짝
새처럼 잠들어 있다
벤치 위엔 남자
신문지를 덮고 잠든 둥근 둥지
 
죽은 걸까, 꿈꾸는 걸까
검은 구두 속에서
하얀 물감 빛깔의 새벽이 흘러나와
남자의 몸을 수의처럼 감싸고
 
바람이 불 때마다
나무들 겨드랑이 사이로 샘물이 밀려와
한 방울 한 방울 신문지에 떨어지고
어린 꽃들이 단발머릴 흔들며 웃는다
 
누구의 입일까 검은 구두
구두 속에서 흰 말이 날아오르고
밤사이 대기가 흘린 꿈이
남자의 입술 끝에 투명한 핏방울로 맺혀 있다
 
* 영화 「이끼」의 원작 만화가가 은마아파트의 벤취에서 오랜 야외 취침을 했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다지 노숙자의 고생담에 초점이 맞춰져 있지 않았다. 그것보다는 자유로움의 뉘앙스가 더 강했다. 자유라, 때론 그럴 수 있겠다. 현재 1만을 넘어가는 노숙인들의 속내는 퍽 다를 수도 있겠지만. 

노숙인들은 도시에 섞여 살지만 어떤 계층의 사람보다 이질적이다. 물리적 거리감을 무시하고 혼자 어딘가 아주 멀리에 있는 것 같다. 웅크려 잠들어 있는 존재인 것 같기도 하다. 함기석 시인은 그런 이들에 대해 "죽은 걸까, 꿈꾸는 걸까" 묻는다. 우리 가까이에 살지만 결코 길들여지지 않은 한 마리 새와 같다고 생각한다. 길들여 지지 않았으므로 그들은 알 수 없는 존재다. 스스로를 규정하지 않는 존재다. 그리고 우리는 이 시를 읽으면서 자유와 꿈과 죽음과 쓸쓸함이 노숙인의 등 뒤로 흘러감을 느낄 수 있다.

이 시를 읽고 맨 처음 생각난 다른 작품을 여기 소개한다. 같이 읽어보자.
 
아이 업은 사람이
등 뒤에 두 손을 포개 잡듯이
등 뒤에 두 날개를 포개 얹고
죽은 새

 
머리와 꽁지는 벌써 돌아갔는지
검은 등만 오롯하다

 
왜 등만 가장 나중까지 남았을까.
묻지 못한다.

 
- 김선우, 「등」, 『내 몸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 문학과지성사, 2007.
 
  이 두 작품은 공통적으로 '등'에 대한 독해다. 그리고 왜 당신은 죽은 자가 되었습니까, 왜 당신은 꿈꾸는 자가 되었습니까, 왜 당신은 등만 남긴 존재가 되었습니까. 우리는 묻지 않는 것이 아니라 묻지 못한다.
 
 
□ 자본주의 식민지의 일상
 
- 박후기, 「아르바이트 소녀」 (《현대시》, 2010. 5.)
 
나는 아르바이트 소녀,
24시 편의점에서
열아홉 살 밤낮을 살지요
 
하루가 스물다섯 시간이면 좋겠지만
굳이 앞날을 계산할 필요는 없어요
이미 바코드로 찍혀 있는,
바꿀 수 없는 앞날인 걸요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다
봄이 되면 다시 나타나는
광장의 팬지처럼,
나는 아무도 없는 집에 가서
옷만 갈아입고 나오지요
화장만 고치고 나오지요
 
애인도 아르바이트를 하는데요,
우린 컵라면 같은 연애를 하지요
가슴에 뜨거운 물만 부으면 삼 분이면 끝나거든요
 
가끔은 내가
아르바이트를 하러 이 세상에 온 것 같아요
엄마 아빠도 힘들게
엄마 아빠라는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지 몰라요
 
아,
아르바이트는
죽을 때까지만 하고 싶어요
 
* 고은 시인의 『만인보』가 완간되었다. 역사 속에 이름 없는 존재인 일개 인간이 수백 수천 모였을 때 다시 역사의 흐름이 재구성되는, 그런 역설적 과정을 확인하는 작업이었다. 우리 아픈 역사는 큰 획으로 그려진 것이 아니라 점묘법처럼 여러 개의 점이 모여 형태를 이룬 것이었나 보다.
 

그렇다면 지금 현재진행형의 역사는 어떨까. 거대한 경제, 사회, 정치의 흐름이라기보다는 이것 역시 사람 더하기 사람의 일이 아닐까. 박후기 시인의 「아르바이트 소녀」는 그 작은 사람의 목소리를 담고 있다. 이 어린 노동자는 이름으로 불릴 필요가 없다. 그저 소모품일 뿐이니까 싼 노동력을 제공하는 것으로 존재의 의미를 부여받고 있다. 사랑하기 위해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라, 아르바이트 하기 위해 태어났다니. 이것이야말로 자본의 시스템에 압사당한 인간의 주권 침탈이 아닌가. 우리는 아직도 식민지 시대에 살고 있다. 잔인한 자본주의의 식민지에.

 
□ 나의 '커밍아웃'을 보여드립니다
 
- 진은영, 「나의 아름다운 세탁소」(《현대시》, 2010. 7.)
 
맑은 술 한 병 사다 넣어주고
새장 속 까마귀처럼 울어대던 욕설을 피해 달아나면
혼자 두고 나간다고 이층 난간까치 기어와 몸 기대며 악을 쓰던 할머니에게
 
동내 친구 그 애의 손을 잡고 골목을 뛰어 달아날 때
바람 부는 날의 골목 가득 온상마다 푸른 기저귀를 내어말리듯
휘날리던 욕을 퍼붓던 우리 할머니에게
 
멀리 뛰다 절대 뒤돌아보지 않아도
"이년아 그년이 네 샛서방이냐"
깨진 금빛 호른처럼 날카롭게 울리던
 
그 거리에 내가 쥔 부드러운 손
"나는 정말 이 애를 사랑하는지도 몰라"
프루스트식으로 말해서 내 안의 남자를 깨워주신 불란서 회상문학의 거장 같은 우리 할머니에게
 
돈도 없고 요령도 없는 작곡가 지망생 청년과 결혼 하겠다고
내 앞에서 울적에 엄마 아버지보다 더 악쓰며 반대했던 나에게
"너는 이 세상 최고 속물이야, 그럴 거면서 중학교 때 『 크리스마스 선물』은 왜 물려주었니?"
내가 읽다 던져둔 미국 단편소설집을
너덜거리는 낱장으로 고이 간직했던 여동생에게
 
"나는 돼도 너는 안 돼"
하지 못한 말이 주황색 야구잠바 주머니 속에서 오래전 잘못 넣어둔 큰 옷핀처럼 검지손가락을 찔렸지
 
엄밀한 空의 논리에 대해 의젓하게 박사 논문까지 써놓고
이제와 기억하는 건
용수 스님이 예로 드신 무명옷감에 묻은 얼룩
그 얼룩은 무슨… 덜룩
시인 김이듬이 말한 것처럼
그거 별모양의 얼룩일라나, 오직 그 모양과 색이 궁금하신 모든 분들께
 
나의 아름다운 세탁소를 보여 드립니다
 
십년 만에 집에 데려왔더니 넌 아직도 자취생처럼 사는구나,하며 비웃음인지 부러움인지 모를 미소를 짓던 첫사랑 남자친구에게
 
이 악의 없이도 나쁜 놈아, 넌 입매가 얌전한 여자랑 신도시 아파트 살면서
하긴, 내가 너의 그 멍청함을 사랑했었다. 네 입술로 불어넣어내 방에 흐르게 했던 바슐라르의 구름 같은 꿈들
 
여고 졸업하고 6개월간 9급 공무원 되어 다니던 행당동 달동네 동사무소
대단지 아파트로 변해버린 그 꼬불한 미로를 다시 찾아갈 수도 없지만
세상의 모든 신들을 부르며 혼자 죽어 갔을 그 야윈 골목, 거미들
"그거 안 그만 뒀으면 벌써 몇 호봉이냐" 아직도 뱃속에서 죽은 아이 나이 세듯
세어보시는 아버지, 얼마나 좋으냐, 시인 선생 그짓 그만하고 돈 벌어 우리도 분당가면, 여전히 아이처럼 조르시는 나의 아버지에게
 
아름다운 세탁소를 보여드립니다
잔뜩 걸린 옷들 사이로 얼굴 파묻고 들어가면 신비의 아무 표정도 안 보이는
내 옷도 아니고 당신 옷도 아닌
이 고백들 어디에 걸치고 나갈 수도 없어 이곳에만 드높이 걸려 있을, 보여드립니다
위생학의 대가인 당신들이 손을 뻗어 사랑하는
나의 천부적인 더러움을
 
반듯이 다려 놓을수록 자꾸만 상에 늘어붙는 뜨거운 다리미질
낡은 외상 장부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와서 미국 단편집과 중론, 오래된 참고문헌들과
물과 꿈 따위만 적혀있다
여보세요, 옷들이여
맡기신 분들 찾아 얼른 가세요. 양계장의 암탉들이 샛노랗게 알들 피워대는 내 생애의 한여름에
다들, 표백제 냄새 풍기며 말라버린 천변 근처 개나리처럼 몰래 핀 꽃만 들고
몸만 들고 이사 가셨다
 
* 진은영 시인은 직시하는 눈이다. 사실을 사실대로 말하는 정직의 입이다. 나희덕 시인이 인간적인 따뜻함과 결연한 굳셈의 어우러짐으로 우리를 감동시켰듯이 진은영 시인 역시 말할 수 있는 것을 말함으로써, 그리고 말해야 할 것을 말함으로서 우리를 감동시킨다. 그러나 그것이 다가 아니다. 그는 말하지 말도록 암묵적 약속이 되어 있는 것을 언급하고 보여준다. 그래서 점점 이 시인은 우리들에게 꼭 필요한 목소리가 되어가고 있다. 
 

여기서 시인은 자조적인 어조로 "나의 아름다운 세탁소"라고 말했다. 사실은 전혀 아름답게 생각하지 않는 자신의 내용물과 이력서의 낱낱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그것이 정말 자조적이고 비아냥거리는 '아름다운'은 아니다. 이 시는 시인 스스로를 다지는 하나의 다짐으로 보인다. 그는 스스로 오장육부를 다 꺼내어 자신의 세탁소에 공개했다. 이른바 시인의 '커밍아웃'인 셈. 커밍아웃의 목적은 무엇일까. 굳이 밝힐 이유가 없는 것을 굳이 숨기지 않겠다는 의도는 무엇일까. 그것은 자신에게 덜 부끄러워지기의 목적을 가지고 있다. 시인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얼룩이다. 나는 천부적인 더러움을 지우지 못했다. 그래, 나는 고상하지도 않고 성직자도 아니다. 성불을 꿈꾸지 못하는 그저 그런 인간이다. 그렇지만 적어도 은폐하거나 비열하지는 않겠다. 왜! 나는 진은영, 시인이다!

 


나민애 편집위원 (문화저널21)

1979년 충남 공주 출생, 2007년 7월 《문학사상》 신인문학상 평론 부문 당선으로 등단, 현재 계간 《시와시》편집위원, KAIST 강사. 주요 평론으로는 ‘무성성의 사랑과 병증의 치유법-김남조론’, ‘여윈 신화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 ‘여성 시학의 갈래화를 위하여’ 등.

- '문화저널21' 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