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은 문제작] 시는 시인의 것이 아니라는 시들 / 나민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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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미래파’ 논의에서 문단이 얻은 것 한국 시단에서 대략 지난 5년은 새로운 난해함이 문제였다. 난해하지 않은 시가 발표되지 않았다는 뜻이 아니다. 소위 ‘미래파’ 명명에 관한 논의와 젊은 신인의 활발한 활동으로 인해 ‘새로움의 형식’이 다른 어느 시기보다 두드러져 보였다는 말이다. 낯선 시, 난해시가 과거 문단에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소위 ‘다른 서정’의 문법은 족히 주목할 만한 일이었고, 충분히 그리고 어쩌면 과도하게 주목되었다. 그리고 현재 미래파 논의는 옹호나 비판을 넘어 기존 사실로 정리되는 국면에 놓여 있다1). 그렇다면 미래파 논의가 우리 문단에 남긴 것은 무엇일까. 이 질문은 소위 ‘포스트 미래파’에 국한되지 않는다. 논의에 직접 참여하지 않았다고 해서 시인들의 침묵을 무위와 동일시할 필요는 없다. 시인은 어디까지나 작품으로 말한다. 결론적으로 말해 미래파 논의는 신인들을 기성 문단에 자리 잡게 했을 뿐 아니라 다수의 전혀 다른 시적 방향의 진전에 대해 암암리의 계기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이미 비평적 용어로 굳어진 ‘미래파’에 따르는 보편적 반응을 다시 들춰보자. 한편에서는 시의 뜻이 전달되지 않아 해독불능이라고 했고 다른 한편에서는 새롭다고 했다. 그런데 이 한편과 다른 한편의 문단적 비중은 비등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많은 시인들이 독자가 되기 힘들다고 우려했고 소수의 젊은 층은 신세대의 정체성이라며 환영했다. 마치 문단이 둘로 쪼개져 많은 보수주의자와 적은 급진혁명가로 갈린 듯했다. 시인 독자들은 독서를 불편해했고, 불편하다는 비판을 받은 젊은 시인들 자신들도 불편했고, 다만 평론가만 불편하지 않았다. 그런데 과연 평론가들만 신이 났던 미래파일까. 평론에 대해서는, 기존 시인들은 왜 이해할 수도 없는 이상한 시를 자꾸 언급하는지 불만이었겠고, 당사자 젊은 시인들은 자신들의 성격을 자꾸 구속하니 불만이었을 텐데, 이 불만이 문단의 위화감을 조성하고 말았을까. 미래파는 외면 아니면 환호라는 이분법적인 가름으로 굳어진 것이 아니라 기성 시인들을 자극하고 다른 새로운 시법의 발견을 촉진하는 역할을 했다. 우리는 신진 시인군의 등장이라는 사실적 의미 말고 문단에 반성적 계기를 부여했다는 것, 그 반성이 일궈낸 미래파 그 이후의 현장을 미래파 논의의 진정한 의의라고 보아야 한다. 쉽게 말해 소장, 중견, 원로 시인들은 저들과는 다른, 더 좋은 시를 써야겠다는 책임의식 같은 것을 느꼈을 것이다. 그리고 문단의 데뷔를 꿈꾸는 문청들에게는 미래파란 매혹이기에 앞서 극복의 대상이 되었을 것이다. 미래파 ‘덕분’에 이런 일이 가능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상황은 오히려 반대다. 우리 문단에 미래파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다시 말해 다름이 오히려 다른 다름들을 더욱 두드러져 보이게 만든, 전체 문단의 움직임을 총체적으로 주목해야 할 때가 되었다. 이와 관련해서 최근 시인들의 동시 창작은 주목할 만하다. 문인수, 안도현, 장옥관, 이정록, 이안, 김륭, 강성은 등의 동시 창작은 난해시에 대한 문학적 반작용, 혹은 문학의 고립화를 고민한 자구책이라고 볼 수 있다. 이들은 새로운 시란 쉬운 시를 통해서 도달해야 하는 것이라 생각하는 듯하다. 지금 상황에서 동시로의 선회가 설득력을 얻는 이유는 동시 창작이 시의 기본 문법으로의 회귀와도 같기 때문이다. 그만큼 우리의 시인들을 사로잡고 있는 것은 흔들리는 시 근본에 대한 탐색이라고 볼 수 있다. 위기의 시, 이미 보편적이지 않은 시라고 할 때 시인들은 왜 넝마가 된 시를 아직도 써야만 하는가. 그들은 스스로에게 물을 수 있다. 그리고 이 질문은 ‘시는 근본적으로 무엇인가’ ‘시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그리고 ‘시는 무엇을 향해 있는가’라는 세 가지 갈래로 나누어진다. 나는 이 세 물음의 공통점이 ‘시는 시인의 것이 아니다’는 함의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주목해야 한다고 본다. 미래파의 시가 남들에게 읽히기 어려운 이유는 시를 장악하고 있는 개인의 영역이 넓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시는 시인 자신의 것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맞다, 시는 시인의 것이다. 그렇지만 시가 시인의 것이 아닌 경우 역시 존재한다. 현재의 문단을 다시 출발점이라 말할 수 있다면 이것은 ‘시가 시인 한 사람의 것이 아니다’ 혹은 ‘아니어야 한다’는 명제에서 시작한다. 이 명제로 인해 시를 자아의 외부로 반납한 시들을 이 계절에 벅차게 읽을 수 있었다. 과연 시가 시인의 것이 아니라면 누구의 것일까. 그 작품들은 ①시가 ‘시’의 것이라는 시 ②시가 사회의 것이라는 ‘시와 정치’의 시 ③시가 나도 너도 아닌 ‘당신’의 것이라는 시로 구분할 수 있다.
2. 시는 시인의 것이 아니라 시의 것
이 중에서 김명인, 채호기, 이은규 시인은 시의 언어성에 주목한다. 실존 앞에 선 인간이 아닌, 문장 앞에 선 시인의 초상을 고백함으로서 시쓰기의 제1과 1장에 접근하려고 한다. 그리고 정희성, 허형만, 조정권 시인의 작품은 치열한 시정신에 대한 점검을 시화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이 경우는 시의 위기란 시인이 반성하지 않을 때 찾아온다는 문제의식을 보여준다. 언급된 시들은 공통적으로 시인에 의한, 시에 대한, 시를 위한 가장 근원적인 탐색의 하나이다. 그리고 현금의 상황을 염두에 둔다면, 우리는 이것을 가장 힘들 때 초심으로 돌아가자는 시인들의 마음 준비로 보아야 할 것이다. 쓰지 않은 문장으로 충만하던 시절 내게도 있었다 (중략) 구름에 적어 하늘에 걸어 둔 그리움 다시 내린다
이 시를 읽어보면 시인이란, 세상을 문장으로 치환하는 문장 주머니라고 할 수 있겠다. “구름에 적어 하늘에 걸어둔 그리움”이라는 구절을 확장해 보면 모든 세상이 시구로 읽힌다는 말과도 같다. 세상을 시문으로 보고 그것을 시문으로 발설하는 것, 다시 말해서 감정이든 감각이든 들어가고 나오는 것이 모두 문장인 사람이 시인인 셈이다. 김명인 시인은 다소 자조적으로 문장의 발견에 직면한 시인의 미약함을 말하는 것 같지만 그의 시인론은 상당히 고전적인 발상에서 시작되었다. 이를테면 《신당서(新唐書)》의 〈이하전(李賀傳)〉에서 이하의 평생은 시문을 지어 비단주머니에 넣고 집에 돌아와 정리한 종이를 다시 비단주머니에 넣는 것으로 요약된다. 이때의 주머니는 상당히 상징적이어서 불우한 천재 시인의 이미지와 겹쳐진다. 이하라는 시인의 구체적인 삶은 무의미한 대신 한 자루와 같은 시문 덩어리, 혹은 시문 자체가 이하(시인)와 동일시되는 것이다. 김명인의 시인론(시 〈문장들〉)은 이러한 ‘시인=시’에서 출발한다. 그에 의하면 시라는 것은 낭만주의적인 시마(詩魔)에 의해 쓰이는 것도 아니고, 시인이 언어의 충실한 건축자인 것도 아니다. 그보다 시인은 ‘읽고 쓴다’의 활동으로 이루어지는 문장 자체이다. 바람의 나라에 문자를 잊은 이들이 살고 있다 전해 듣는 신의 말처럼 먼 문장이 있을까 낡은 책장에 새겨진 지문
인용시의 각주로는 문자의 발명에 관한 일화를 붙여 읽을 수 있다. 어느 날 문자를 발명한 토스가 타무스 신을 찾아가 문자야말로 인간의 기억력을 증진시킬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타무스 신은 슬프게 대답했다. 오히려 문자로 인해 인간의 기억과 지혜가 감소할 것이라고. 이 생각을 하고 인용시를 보면 “문자를 잊은 이들”의 세상이야말로 우리가 잃어버린 낙원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문학은 기본적으로 언어를 재료로 하고 있기 때문에 문자라는 외형적 틀을 벗어나서는 문학이 아니게 된다. 이 문학과 비문학의 경계에 글쓰기의 출발점과 영도(零度)가 존재한다. 문학은 의미전달의 1차적 목적에 종사하지 않으므로 문학 언어를 통해 도달하려는 존재의 기원은 글의 바깥, 언어의 바깥에 있다. 이은규 시인은 문학 언어가 지향하는 곳과, 문학 언어의 현재 사이의 거리감을 “마니차”를 통해 말하려고 한다. 이은규 시인에 의하면 시가 없는 존재의 기원, 즉 “바람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 최소한의 형식으로 최대한의 정신을 그러모으는 것이 시인의 사명이다. 이 언어로 그린 언어 없는 세상이야말로 시가 노리는 가장 시적인 것이 아닐까.
3. 시는 시인의 것이 아니라 세상의 것
전기철, 배창환, 박후기, 최금진, 진은영 등의 시인은 사회를 향한 작품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어 주목된다. 이를테면 전기철, 〈외눈박이 거인의 나라〉(《현대시학》 5월호), 〈르노아르〉(《시산맥》 2010 상반기), 배창환, 〈쪽지가 날아온다!〉(《시와시》 여름호), 박후기, 〈복서〉 2(《현대시》 5월호), 최금진, 〈소년들을 위한 충고〉(《문학사상》 6월호), 〈빗살무늬토기를 생각하다〉(《창작과비평》 여름호), 진은영, 〈망각은 없다〉(《현대시》 7월호)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세상에서 나를 제일 증오하던 이가 죽었다 세상에서 내가 가장 사랑했던 이가 죽어 (중략) 세상에서 강을 제일 증오하던 왕이 있었다 세상에서 강을 제일 증오하던 왕이 있었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사랑했던 곳을 어린 시절 천일야화 속에서 어느 도시의 사람들은 곧 태어나 내 몸이 되어 올 것이다 어떤 시절에 어느 도시의 사람들은
진은영 시인은 이미 논의의 중심에 서 있기 때문에 작품을 발표할 때마다 부담감이 상당할 것이다. 그러면서 생각과 작품이 일치할 때는 기쁨도 맛볼 것이다. 이 작품이 그런 작품 중 하나라고 생각하면서 읽었다. 4대강 개발사업을 배경으로 삼은 의도가 보이지만, 오히려 사회정치적 견해가 문학적 형상화를 돕고 있다. 여기에는 정치에서 시작해 시로 갈무리되는 한 갈래의 문학적 방향과 시에서 시작해 정치로 확장되는 다른 갈래의 사회적 방향이 존재한다. 두 방향 사이에서 균형을 지키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정치적 주제를 다룬 시가 문학적으로도 좋은 시가 되기 위해서는 필요한 일이다. 여기서 시의 균형 지키기는 중심에 ‘내 몸’을 던져 넣었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다. 인용시에서 가장 자주 등장한 단어는 ‘강’이 아니라 ‘내’, 혹은 ‘나’이다. 이것을 흔히 사용되는 의미인 개인주의적인 자아로 볼 수는 없다. 반대로 ‘나’는 몸이라는 기본적 생존권의 상징이며 나아가 모든 우리를 대변하는 말이다. 공공의 논리인 경제와 정치 논리를 확대된 사회적 자아의 실수와 실패, 그리고 사랑과 증오로 환치시키는 과정에서 이 시는 일종의 울림을 획득한다. 우리는 4대강 개발사업에 대해서 거의 모든 시인이 반대의 입장을 표명했음을 기억한다. 그리고 이에 대한 문학적 발언으로 많은 시 창작과 낭독회가 있었다. 오세영 시인의 〈댐〉이나 공광규 시인의 〈놀란 강〉과 같은 시 역시 사회적 사태에 대한 반응으로 탄생했다. 여러 활동들은 문단에 전혀 낯설지 않았는데 그것은 우리 시단이 참여시와 생태주의를 이미 경험했기 때문이다. 생태주의, 사회참여, 시와 정치, 이 세 주제는 전혀 다른 세계관인 듯하지만 공통의 배경에는 ‘같이 살자’는 공생 목표가 자리 잡고 있다. 그리고 점차 많은 시인들이 자연과 인간, 인간과 인간, 문학과 사회가 같이 잘사는 미래를 문학의 것으로 점치고 있는 듯하다.
4. 시는 시인의 것이 아니라 당신의 것
기본적으로 모든 시는 시인이 누군가에게 부친 일종의 편지다. 그렇지만 시인은 시를 쓰면서 시집을 사줄 독자를 배려하지는 않는다. 살아 있는 독자가 아니라면 누가 읽어줄 거라 생각하는 걸까. 시가 탄생할 때야 시인은 자기 자신과의 고립된 대화를 거치지만 시 창작 과정 어느 부분에서건 초월적인 ‘당신’에 대한 생각을 잊지 않는다. 그것이 외면적으로 신이건, 어머니건, 고향이건, 사람이나 사회건 간에 전체적인 흐름은 하나의 일점을 상정하고 있다. 그 일점이 하나의 세계일 수도 있고, 무의미나 해체일 수도 있으며, 사람이거나 개념일 수도 있다. 하지만 공통적으로 시인의 목소리가 그 일점에 도달하기를 원하기 때문에 비로소 시라는 형식이 선택될 수 있다. 종교에서 말하는 기도도 일종의 편지다. 사람이 신에게 주기적으로 간절하게 보내는 편지인 기도. 그렇다면 편지로서의 시 역시 기도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다. 시인이 초월적 당신에게 드리는 기도로서의 시. 초월적 당신은 귀를 갖고 있지 않지만 듣고 있으리라 의심되지 않는 대상이다. 그러니 어떤 ‘당신’은 시인의 내면에서 엄연히 존재하면서도 닿기 불가능한, 갈증의 원동력이 된다. 얼굴에 재를 칠하고 서쪽으로 다섯 걸음 가서 나뭇가지에 흰 띠를 묶었네 당신 뼈를 묻었네 내 팔은 내 몸에 있으나 유월에, 유월 까마귀 소리에 마음을 다해도 갈 수 없는 곳이 있으니, 여기
이 ‘당신’은 모호하지만 분명히 시인을 사로잡고 있다. 다시 말해 시인으로 하여금 시를 쓰게 만든다. 전동균, 〈서쪽으로 다섯 걸음〉(《유심》, 7/8월호), 장석원, 〈그러나 그 이후의 고통에 대하여〉(《서정시학》, 여름호), 박정대, 〈파미르 고원의 삶〉(《서정시학》, 여름호) 등은 이 점을 잘 포착하고 있다. 그중에서 인용한 전동균의 시는 무척이나 주술적인 세계를 통해 ‘당신’의 문제를 드러내고 있어 주목된다. 시인은 주체적이지 못하고 무엇인가에 사로잡힌 존재이다. 그래서 그의 몸이나 노래는 모두 “당신의 것”이라고 표현되고 있다. 그러나 외면과 내면을 통해 다가가려고 하는 “당신”은 불행히도 “마음을 다해도 갈 수 없는 곳”이다. 시인은 분명히 존재하는 당신의 자리와 갈 수 없는 자아의 자리 사이를 “천리”라는 말로 표현한다. 이 거리는 좁혀질 수 있을까. 불행히도 불가능하다. 하지만 “천리”라는 먼 여정이 남아 있는 한 몸은 무의미한 것이 아니고 노래는 지속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천리”를 시심으로 채우며 오체투지할 시인의 길이 비로소 열린다. 2
생활을 습득할 수 있을까 육체 속에 생활이 스며들까 말이다 육체는 생활이 되어 행복해지는 것일까 자장면이 불고 바나나가 갈변 진행 중이고 먹고 씻고 입고 나가야 한다 폭풍같이 걸어가자 거리의 음울 속에서 나는 상그러워지지 당신과 조우하는 거리 즐거운 지옥에서 ―장석원, 〈그러나 그 이후의 고통에 대하여〉 부분
시가 문화센터의 여기쯤으로 여겨지는 시대에 왜 시인은 시를 쓸까. 물으면 대부분 ‘쓰지 않을 수 없어서’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이것이 ‘안 하니만 못해서’ 차선을 최선으로 여기는 불행으로 들리지는 않는다. 보다 솔직하고 정밀한 대답은 따로 있다. 장석원 시인의 인용시에서처럼 시인은 끝내 ‘육체의 생활’을 습득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그는 마치 심장이 두 개인 사람과 같아서 먹고 씻고 입는 일만으로는 하나의 심장만을 뛰게 할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당신과 조우하는” 일을 꿈꾸는 또다른 생활을 꾸려나갈 수밖에 없다. 장석원 시인은 그것을 “즐거운 지옥”이라고 표현했다. 역시 많은 시인이 시인 됨을 같은 말로써 공감하지 않을까. ‘당신’과의 유일한 통로여서 즐겁지만 역시 ‘당신’에게서 벗어날 수 없어 괴로운 그런 모순 사이에서 시는 흘러 나온다.
5. 여언, 그래도 남은 말
어린아이가 그걸 보고서 금세 눈물이 그렁그렁해지더니만 “내려와아, 위험해애” ―정희성, 〈교감(交感)〉 전문
이 글의 목적은 이 계절의 좋은 시를 읽자는 퍽 소박한 것이다. 그런데 과연 좋은 시란 대체 무엇일까. 여기에 대한 하나의 답변이 있을 수는 없다. 시각에 따라서 문제적 작품이 좋은 시라고, 미학적으로 성공한 작품이 좋은 시라고, 그리고 감동이나 전율을 선사하는 시가 좋은 시라고 제각기 말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읽었을 때 미소를 짓게 되는 그런 시는 어떨까. 평론가란 시에 대한 최후의 전도사이기 전에 최초의 독자여야 하는데, 한 독자의 마음을 따뜻하게 만드는 시는 어떨까. 이 시인은 나이를 잊고 사는 듯하다. 사실 우리가 시인이 되려는 궁극의 목표는 잊지 말아야 할 무엇인가를 잊지 않기 위해서일 것이다. 시인이 나이를 잊고 순수의 어린아이가 되는 것도 역시 잊을 수 없는, 모두의 일부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결론을 대신해서 이 시를 선택했다. 단절의 시대에 교감을, 불행의 시대에 희망을, 외로움의 시대에 뜨거움을 더하기 위해 시작했던 마음이 바로 시심 아닌가 싶다. 아직 시는 시인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시와 세상과 당신이 공유하는 무엇이다. 나민애 | 문학평론가. 1979년 공주 출생. 2007년 7월 《문학사상》 신인문학상 평론 부문 당선으로 등단. 현재 계간 《시와시》 편집위원, 《문화저널 21》 편집위원, KAIST 강사. 주요 평론으로는 〈무성성의 사랑과 병증의 치유법―김남조론〉 〈여윈 신화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 〈여성 시학의 갈래화를 위하여〉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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