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만’과 ‘광기’라는 말을 기억하는가. 초고속 인터넷과 실시간 영상이 돌아다니는 이 개명천지에 대체 저런 말들을 기억하는 사람, 몇이나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저 낱말들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를 수도 없이 보유하고 있다.
▲박정만 시전집 |
무엇이 문제였을까. 대체 무엇이 문제였길래 우리의 영혼과 육신은 불안과 두려움에 푹 젖어 있었을까.
여기 한 명의 시인이 있다. 그는 말 그대로 ‘닭 한 마리 잡을 힘도 없는’ 백면서생(白面書生)이었다. 그의 삶은 술과 詩와 몇 명의 벗들 이외에는 우리들과 별반 다를 바 없는 ‘평범’ 그 자체였다.
어느 낭만주의자의 꿈
‘낭만’하면 우리는 흔히 ‘눈물’을 떠올린다. 해서 ‘낭만주의자’하면 ‘뻑하면 눈물이나 질질 짜는’ 사람으로 오해하기 십상이다. 그러나 그것은 지극히 잘못된 우리들의 선입견이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낭만주의’는 ‘퇴폐적 낭만주의’이다.
그 ‘퇴폐적 낭만주의’의 대치선상에 ‘건강한 낭만주의’가 있다. 그 ‘건강한 낭만주의’는 밀실 속의 속삭임, 허무, 패배주의 따위의 ‘일생에 도움이 안되는 것들’과의 단호한 결별이라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 우리 시문학사에서 ‘낭만주의자’를 세 명 꼽으라면, 나는 박인환과 김종삼과 바로 이 사람, 박정만을 꼽겠다.
눈치 빠른 분들은 이미 알고 있겠지만, 이 글은 ‘박정만’이라는 한 시인의 이야기이자, 우리 문학사에 남은 ‘필화(筆禍)’사건에 대한 ‘뒤돌아보기’이다.
사랑이여, 보아라
꽃초롱 하나가 불을 밝힌다
꽃초롱 하나로 천리 밖까지
너와 나의 사랑을 모두 밝히고
해질녘엔 저무는 강가에 와 닿는다
저녁 어스름 내리는 서쪽으로
流水와 같이 흘러가는 별이 보인다
우리도 별을 하나 얻어서
꽃초롱 불 밝히듯 눈을 밝힐까
눈 밝히고 가다가다 밤이 와
우리가 마지막 어둠이 되면
바람도 풀도 땅에 눕고
사랑아, 그러면 저 초롱을 누가 끄리
저녁 어스름 내리는 서쪽으로
우리가 하나의 어둠이 되어
또는 물 위에 뜬 별이 되어
꽃초롱 앞세우고 가야 한다면
꽃초롱 하나로 천리 밖까지
눈 밝히고 눈 밝히고 가야 한다면.
- ‘작은 연가’ 전문
살아생전 박정만 시인은 노래를 즐겨 불렀다고 한다. 그가 좋아하던 노래는 패티김의 ‘사랑의 계절’이었다. 자신이 살던 시대의 속성과는 전혀 다른 내용과 선율을 지닌 이 노래를 부르면서 그는 아마 잠시 동안이나마 숨을 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때 무슨 일이 있었을까
“나는 공항에서 눈이 가려졌고, 신원을 알 수 없는 세 명의 건장한 사내들에게 양팔과 허리가 ‘달랑 들려져’ 차에 태워졌고, 우박처럼 쏟아지는 폭행 속에서 승용차 재떨이에 이마를 처박힌 채 어디론가 끌려갔다. 거기서의 며칠 몇 밤을 이제 와서 떠올릴 분노조차 나는 가지고 있지 않다. 도구만은 기억한다. 찢기고 부서져가는 내 알몸 위로 쏟아지던 몽둥이, 물, 전기, 주먹과 발길, 매어달림….”(신동아 1987년 12월호)
1981년 소설가 한수산은 보안사로 끌려갔다. 나중에 알고 보니, 신문에 연재하던 소설 <욕망의 거리>가 문제였다. 고의로 대통령을 모독했다는 것이었다. 야만적인 고문이 이어졌다.
얼마 후 신문사의 정규웅과 한수산의 친구 시인 박정만이 똑같은 방식으로 끌려갔다. 보안사는 당연히 그들을 ‘간첩’으로 다루었다. 일주일여 만에 그들은 모두 풀려났다. 그때부터 새로운 비극이 시작되었다.
며칠간의 모진 고문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온 그에게 아내는 말했다. “도대체 어디 가서 술 마시고 자다가 이제야 집에 들어왔냐”고. 박정만은 자신이 겪었던 그 악몽을 아내에게 말해줄 수 없었다. 그 시절은 그런 시대였다.
나는 사망의 검불이요
그 무덤을 덮은 한 촉의 풀잎이니
이제 뿌리째 들어내어
저 오뉴월 땡� 아래 가차없이 던지시라.
- ‘내 무덤에 앉아 쉬리니’ 부분
아마 많이도 외로웠을 것이다. 그의 삶은 서서히 찢겨지고 해체되어 갔다. 정신을 잃
▲故 박정만 시인 ©박정만 홈페이지 |
그러는 동안, 청와대에 들어앉은 권력자는 더욱 흉포해지고 ‘잔인한 자신감’에 넘쳐 있었다. 어느 민중가요의 가사처럼 ‘세상은 삐까번쩍 거꾸로 돈’ 그런 상태에 놓여져 있었다.
“나를 죽인 것은 5월의 그날이다”
이 말은 그의 시집, <저 쓰라린 세월>의 후기에 담겨 있는 말이다. 박정만의 육체는 살아 견디고 있었지만, 그
의 영혼은 그해 오월 서빙고의 보안사 분실로 끌려갔던 그 시간대에서 단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한 채 서성이고 있었다.
박정만의 벗, 한수산은 1988년 9월 일본으로 떠났다. 자신을 고문한 보안사의 우두머리가 대통령이 되는 나라에서는 일 분 일 초도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다일까. 천만에 말씀이다. 수구독재천민자본주의 세력의 전가의 보도인 ‘국가보안법’이 누런 이빨을 드러내놓고 있던 그 시절에는 말 한 마디, 문구(文句) 하나조차도 모조리 검열의 대상이었다.
시인 고형렬은 어느 날 새벽 중앙청 옆 옥인동의 한 ‘주식회사’ 건물로 끌려갔다. 수사관들은 그의 첫 시집 <대청봉 수박밭>을 코앞에 들이밀었다. 그 중 밑줄이 많이 그어진 것은 ‘토산에 사는 형님에게’, ‘원산에’, ‘백두산, 안간다’ 등과 같은, 한결같이 북쪽의 지명이 들어간 시들이었다. 시인은 눈앞이 캄캄해졌다.
“원산도 가 봤어? 거기 좋지?”
시인은 아니라고 거세게 부정했지만, 그건 그들이 요구하는 대답이 아니었다. 고형렬은 난생 처음으로 시인이 된 것을 후회했다.
‘오적(五賊)’의 김지하, ‘분지’의 남정현, ‘순이삼촌’의 현기영 역시 고형렬 시인과 박정만 시인과 동급의 대우를 받았다. 그 뿐인가. 시인 김준태를 비롯하여 많은 문인들이 필화를 겪었다.
이산하는 장시 <한라산>으로, 원로 시인 이기형은 시집 <지리산>으로, 시인 오봉옥은 장시 <붉은 산 검은 피>로 각기 옥고를 치렀다.
그게 전부가 아니다. 문병란은 시집 <벼들의 속삭임>으로, 주인석은 희곡 <통일밥>으로 구속되었다. 황석영은 광주항쟁 증언록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를 집필했다는 이유로 끌려갔다.
지난 시절의 우울을 이야기하는 것은 그리 유쾌한 일이 못된다. 그러나 과거를 애써 부인하는 사람에게 미래의 꿈을 가르쳐줄 수 없듯이, 우리는 이 사회와 거리를 뒤덮고 있는 지난날의 광기를 끊임없이 기억해야만 한다.
단, 그 기억은 한시적인 것이다. 바로 우리의 영혼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야만과 광기의 추억’이 정말로 한낱 ‘추억’으로 퇴화하는 날까지만 말이다.
나는 사라진다
저 광활한 우주 속으로.
- ‘終詩’, 전문
박정만은 죽기 직전 두세 달 동안 수 백편의 시를 썼다. 후일 그의 표현대로 ‘평생을 쓸 시를 한꺼번에 썼던’ 것이다. 그의 몸은 이미 죽어가고 있었고, 그의 영혼은 피폐해졌고, 두 번째 찾아온 ‘시린 사랑’은 허망하게 끝났다. 그리고 박정만 역시 홀로 죽었다.
사랑이 진하여 꽃이 되거든
그 꽃자리에 누운 한 작은 종자가 되라
그리하여 다시 오는 세상에서는
새나 나무나 풀이나
그런 우리들의 영원한 그리움이 되라.
- ‘작은 사랑의 송가’, 전문
지금 그가 누운 그 자리에는 어떤 꽃들이 피고 지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다만, 그의 시와 삶이 남기고 간 ‘미치도록 아름다운 낭만’을 주절거릴 뿐이다. 박정만이 떠난 빈자리, 그곳은 지난 2004년 연말 1,400여 명이 목숨을 걸고 ‘국가보안법 폐지’를 외치던 바로 그 자리였다.
이제 와서 故 시인 박정만의 평안을 기원하는 일은 부질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의 명복(冥福)을 비는 대신 한 가지만 기억해 두자. 전두환을 “단군 이래 5000년 만에 만나는 미소”로 칭송한 미당은 생전에 감옥 대신 세계일주를 다녀왔다.
미당의 추악한 행적은 사후에야 본격적으로 알려졌다. 그의 호(號)를 딴 상은 거부되고, 기념관 행사는 취소되고, ‘다쓰시로 시즈오(達城精雄)’ 시절의 친일반미 詩들은 새삼스레 조명을 받았다. 어쩌면 그야말로 가장 잔인한 필화(筆禍)의 주인공인지 모른다.
시처럼 좋은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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