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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예 평론가 나민애가 뽑은 이달의 좋은 시 ④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11. 1. 18. 0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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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예 평론가 나민애가 뽑은 이달의 좋은 시 ④
 
나민애
□ 사랑을 사랑한 어리석음
 
- 이제니, 「후두둑 나뭇잎 떨어지는 소리일 뿐」(『아마도 아프리카』, 창비, 2010.)
 
  그래봤자 결국 후두둑 나뭇잎 떨어지는 소리일 뿐. 오늘부터 나는 반성하지 않을 테다. 오늘부터 나는 반성을 반성하지 않을 테다. 그러나 너의 수첩은 얇아질 대로 얇아진 채로 스프링만 튀어오를 태세. 나는 그래요. 쓰지 않고는 반성할 수 없어요. 반성은 우물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너의 습관. 너는 입을 다문다. 너는 지친다. 지칠 만도 하다.
 
  우리의 잘못은 서로의 이름을 대문자로 착각한 것일 뿐. 네가 울 것 같은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면 나는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겠다고 결심한다. 네가 없어지거나 내가 없어지거나 둘 중의 하나라고. 그러나 너는 등을 보인 채 창문 위에 뜻 모를 글자만 쓴다. 당연히 글자는 보이지 않는다. 가느다란 입김이라도 새어나오는 겨울이라면 의도한 대로 너는 네 존재의 고독을 타인에게 들킬 수도 있었을 텐데.
 
대체 언제부터 겨울이란 말이냐. 겨울이 오긴 오는 것이냐. 분통을 터뜨리는 척 나는 나지막이 중얼거리고 중얼거린다. 너는 등을 보인 채 여전히 어깨를 들썩인다. 창문 위의 글자는 씌어지는 동시에 지워진다. 안녕 잘 가요. 안녕 잘 가요. 나도 그래요. 우리의 안녕은 이토록 다르거든요. 너는 들썩인다 들썩인다. 어깨를 들썩인다.
 
  헤어질 때 더 다정한 쪽이 덜 사랑한 사람이다. 그 사실을 잘 알기에 나는 더 다정한 척을, 척을 척을 했다. 더 다정한 척을 세 번도 넘게 했다. 안녕 잘 가요. 안녕 잘 가요. 그 이상은 말할 수 없는 말들일 뿐. 그래봤자 결국 후두둑 나뭇잎 떨어지는 소리일 뿐.
 
 
* 어디서 누구를 만나도 통용될 수 있는 만국 공통의 화제는 딱 두개가 있다. 하나는 아픔. 그리고 또 하나는 사랑(이것의 실체를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연애’라는 행적). 그런데 당신이 그랬던 것처럼, 누군가에게도 이 두 단어는 하나인 것처럼 생각될 수도 있다. 이 작품에서처럼 말이다.

  만약 지금 사랑에 빠져 있다면 이 시를 읽지 말라고 이야기하고 싶다. 이 시를 읽으면, 지금 사랑에 빠진 당신이 절대로 연인에게 선물하지 말아야 할 선물이 꽃과 인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꽃은 사랑의 상징이 아니라, 곧 시들어버릴 감정의 유효기간이다. 인형은 낡아빠져 버릴까 말까 망설이게 되는 감정의 먼지덩어리이다. 그 중에서도 배를 누르면 ‘알랴뷰’를 반복해서 말하는 그 바보같은 인형은 사랑의 종말이 도달할 일방통행의 미래를 보여준다. 이 시에서 “안녕 잘 가요”라든가 “들썩인다”, “척을”과 같은 단어의 반복은 바로 그 바보인형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사랑의 아름답지 않은 끝장을 보여준다.

  이제니의 새 시집이자 첫 시집에는 여러 편의 마음가는 작품이 있었지만 그 중에서 인용시를 고를 이유는 정작 “헤어질 때 더 다정한 쪽이 덜 사랑한 사람이다”는 구절을 읽고 나서이다. 그 구절을 통해 이 시인에게 사랑은 아픔과 동의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비슷한 이야기를 다른 곳에서 읽은 적이 있다. “서로에게 홀딱 반한 두 연인이 욕정으로 가득 차 있을 때라도 언제나 그들 중 한 사람은 더 침착하고 덜 몰두해 있는 법이다. 그게 남자든 여자든 한 사람은 수술집도의 또는 사형집행인의 역할 나머지 한 사람은 환자이거나 희생제물이다”라고 보들레르는 그의 산문집에 적은 바 있다. 이렇게 잔인한 것이 사랑의 실체이다. 그런데 어리석게도, 우리가 사랑을 할 때는 이 점을 알지 못했고 그래서 더 어리석어졌다.
 
 

□ 거의 불가능한 일에 대해
 
- 김행숙, 「가까운 곳」 (『타인의 의미』, 민음사, 2010.)
 
새들이 구두를 벗었다
잠옷과 맨발보다 헐벗은 곳
환한 곳에서
이제 맨발을 벗으면 발이 사라지는 중인가
 
발이 잘리는 곳에서
발목부터 쓰러지는
그림자처럼
너는 세계의 일부를 덮치는가
너는 마침내 이 세계의 붉은 내장에 검은머리카락에 노란흙덩이에 혀를 넣어 키스하는가
쓰라린 피부처럼
 
거칠어 …진다
가장 얇아 ……진다
너는 거의 ………거의 불가능해진다
 
너는 떠나는 중이다
가까운 곳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서
너는 기어서 기어서 돌아오는 중이다
 
* 따끈따끈한 김행숙의 신작 시집에서 한 편을 뽑았다. 김행숙은 1999년에 등단해 이윽고 나타날 2000년대의 뉴웨이브를 선도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런데 이런 설명을 앞세우고 작품을 읽으면 작품 밖의 다른 사회적 의미들이 1차적 감상을 방해하게 마련이다. 그래서 여기서는 거창한 사전 조사는 저만치 따돌리고 작품하고만 대면하는 기회를 갖기로 하자. 

  자, 여기에는 점점 모호해지는 자아의 의미가 있고, 헤아려지지 않는 타인의 비중이 있고, ‘라디오헤드’의 <creep>같은 절박함도 있어 ‘무엇이다’ 단언할 수 없는 애매한 슬픔과 절망과 감각들이 소용돌이 치고 있다. 그렇게 정말 순수하게 읽어보면 한 작품에 응당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명확한 주제의식같은 것은 없다. 주제의식이 있는 시라면 하나의 대상(또는 의미)을 보다 분명하게 ‘가능’하도록 시의 모든 요소를 동원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시는 명확한 의미와 형태를 지닌 대상을 와해시키는 정반대의 방향으로 가고 있다.
 
시의 구절이 밝히고 있듯이, ‘너’의 가능함을 위한 시가 아니라 ‘너’(가 가진 의미나 비중까지 포함해서)의 불가능함에 바쳐져 있다. 최초의 시인들이 이 시를 보았다면, 그들은 이 작품이 시가 아니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이것은 ‘경(憬)’을 통해 ‘정(情)’을 드러내는, 조화와 완성에 관한 전통적인 시법에는 전혀 생소한 것이다. 예전에 사람들은, 시에는 지고한 완성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경건한 수순이 포함된다고 생각했고, 또한 시는 당연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작품은 자신의 지척을 지운다. 불가능함을 가능하게 하는 플러스의 시가 아니라, 가능함이 불가능해지는 마이너스의 시인 셈이다.
 
이런 작품은 현재 한국 현대시에서 가능하며, 또한 통용되고 있다. 우리의 상황이 이만큼 멀리 온 것이며 시는 진화를 거듭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면서 우리는 이런 시를, 그리고 이런 시를 쓰는 마음을 애석하게 또는 애잔하게, 잔인하게 혹은 냉정하게 바라본다. 시는 ‘반시(反詩)’를 통해 불가능한 가능함을 지속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시인은 직립보행의 가능함을 버리고 뱀처럼 ‘기어서 기어서’라는 불가능함을 통해서만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 인연론 없이 시작된 인연
 
- 하재연, 「엄마 기계」, 《문학동네》, 2010. 겨울.
 
무엇이 되기를 꿈꾸는
가령 사서라든가, 나무라든가, 엄마라든가
모든 사물들에게는 어떤 것이 필요한가?
혹은 무엇이 되기를 꿈꾸지 않는다면
 
스커트 밑에 숨은 자장가들이 울려나올 때
반짝이는 머신들로서
내용 없는 습자지로서
텅 빈 육체로서
 
내가 사랑한 만화 속에서
자라지 않는 아기의 이름은 기억나지 않고
기억나지 않는 이름을 기억하지 않는
우리의 입술이 만들어내는 합창 속에서
 
컨베이어 벨트를 타고 배달되는
유리로 만든 아기들
그것들이 반짝거리며 빛날 때
 
나의 피와 살은 어디서
비롯되었을까 그것은
왜 비롯되었을까
 
천사들은
아기들을
내려다보며
가끔 비웃고
가끔 사랑한다
 
나는
이 세계에서
부드럽게 찢어져 먹기 좋은 형체
기입된 글자들 속에
조용히 포장되면서
 
오늘
아기 하나가 만들어지고
 
우리들은
아기들을
내려다보며
가끔 사랑을 하고
가끔 슬퍼한다
 
* 사람이 태어나는 이유는 인연 때문이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만나서 인연을 맺었고, 그 전에는 친할아버지와 친할머니가 그리고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가 만나서 인연을 맺었다. 그 전전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수많은 인연 때문에 한 사람이 태어난다. 

  사람이 죽지 못하는, 혹은 살아가야 하는 이유 역시 인연 때문이다. 죽기 앞서 유서를 작성하는 가장 큰 목적은 이 인연을 어떤 방식으로든 정리해야 하기 때문이다. 누구는 무엇을 가져라, 누구에게는 무엇을 남긴다, 누구야 미안하다는 식으로 사람은 자신의 인연을 하나씩 매듭짓는다. 마찬가지로 어떤 자살자가 있다고 할 때도, 그가 죽음의 찰나 떠올릴 것은 자신의 과오나 원망이 아니라 미련, 다시 말해 남겨 놓은 인연들에 대한 생각과 남겨 놓지 못할 인연들에 대한 마음일 것이다. 인연은 마치 실과 같아서 사람을 동여매서 지상에 붙들어 놓는다. 그러니 인연이란 지배적이고 절대적이라 생각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인용된 하재연의 작품에는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있고 삶이 있지만 그 관계와 삶을 규정하고 지속하게 하는 인연이 삭제되어 있다. 인연이 삭제된 상태의 관계는 복종해야 할 절대성을 상실하고 “나의 피와 살은 어디서 비롯되었을까 그것은 왜 비롯되었을까”라고 하는 의문을 갖게 한다. 이것은 존재의 뿌리를 찾자고 하는 생산적인 질문이라기보다 존재의 의미를 상실했다는 혼란에 해당한다. 하지만, 때로 이 혼란 상황이 달가울 수 있다.
 
이 혼란은 주어진 계보적 의미가 아닌, 혼자 태어나는 자발적 의미의 토양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치 태몽 없이 태어난 아이가 상징적 의미가 결여된 아이가 아니라 태몽에 의지하지 않은 아이로 해석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 당신과의 좁힐 수 없는 ‘저만치’
 
- 박형준, 「타인들의 광선 속에서」, 《문학과 사회》, 2010. 겨울.
 
타인들 속에서 항상 당신을 느낍니다
당신은 타인들 속에 석탄처럼 묻혀 있습니다
천년 뒤에나 윤기 날 듯 오늘도
타인들의 광선 속에서 먼지 띠로 반짝입니다
저녁이 온통 푸를 때마다
얼음장 밑 식물처럼,
사방에서 반짝이는 먼지 띠들은 나를 미치게 합니다
 
* 가장 유명한 소월론은 1950년대 초반에 작성된 김동리의 <청산과의 거리>일 것이다. 김동리는 시 산유화에서 ‘저만치’라는 시어에 착안해 이 시어가 나타내는 바, 자연과 자아와의 좁힐 수 없는 거리감이 소월을 절망케 만들었다고 분석한 바 있다. 우리에게 이 글이 아직 유의미한 것은 소월의 절망이 상징적이라는 데에 있다. 다시 말해 그의 절망은 이제 소월 한 명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에게 ‘저만치’ 떨어져 있는 것들을 생각해보자. 연인이나 자식, 생명이나 믿음까지, 나아가서는 나 자신까지 모두 먼 곳에 있다. 잡히지 않으나 매혹시키는 밤하늘의 달처럼, 또는 빛의 속도보다 빨리 달아나고 있다는 별들처럼 유의미는 무의미의 영역 안으로 빨려들어가고 있고 우리는 바랄 수 없는 것을 바란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저만치’를 좁히고 내가 끌어안을 수 있는 것은 물신의 껍데기같은 허망밖에 없다.

  박형준의 인용된 작품 역시 이 ‘저만치’의 거리감에서 탄생했다. 그는 ‘저만치’가 얼마나 강력하게 좁혀지기를 거부하는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얼마나 아름답게 사로잡고 있는지를 말하고 있다. 반대로 생각하면 이 거리감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타인이나 의미같이 얻을 수 없는 것을 아름답게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가까이에서 보면 좀먹고 추한 형상이 드러날 것을, 거리감은 우리의 정신 건강을 위해 일부러 좁혀지지 않고 대상의 속성을 곱게 꾸며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것을 라캉이 어떤 말로 분석해 놓았든, 지젝이 어떤 방식으로 풍자했든 중요한 점은 우리가 아직 이 ‘거리감’에 황홀하도록 사로잡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로잡힌 끝에 비로소 아직 인간이구나 실감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나민애  편집위원
 
1979년 충남 공주 출생, 2007년 7월 《문학사상》 신인문학상 평론 부문 당선으로 등단, 현재 계간 《시와시》편집위원, KAIST 강사. 주요 평론으로는 ‘무성성의 사랑과 병증의 치유법-김남조론’, ‘여윈 신화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 ‘여성 시학의 갈래화를 위하여’ 등.

-'문화저널21'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