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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문화의 파동
제가 작년 2월 7일부터 3월 7일까지 서울역사박물관에서 학술진흥재단에서 주최한 인문학 강좌를 맡은 적이 있습니다. ‘영상시대의 문학’이라는 주제로 5주에 걸쳐 했는데, 4주는 강의를 하고 마지막 주는 토론을 했어요. 그래서 얼마 전에 《문학, 영상을 만나다》(돌베개)라는 책으로 출간되었습니다. 저는 그 강연에서 영상시대의 문학에 대해 이런 저런 얘기를 했는데, 오늘은 그것들을 참고하면서 시 분야를 말씀드릴까 합니다. 이야기가 중복되는 부분도 있을 텐데, 그때 들으신 분들께서는 양해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아시다시피 지금은 영상시대입니다. 영상시대, 영상문화시대라고들 하지요. 저같이 아날로그 시대의 사람들도 컴퓨터 등을 무시하고 살아갈 수 없는 시대의 한복판에 있지요. 제가 지금 한국문학번역원 원장이라는 직을 맡고 있는데, 한국 문학을 외국에 파는 일을 하지요. 다시 말해 저는 한국 문학 세일즈맨입니다. 지지난주에 소설가 황석영 씨, 김영하 씨와 함께 프랑스로 해서 스칸디나비아 쪽을 갔습니다.
그런데 김영하 씨를 보니까 사람들 얘기는 잘 안 듣고 뭘 해요. 그래서 뭘 그렇게 하느냐고 물으니까, 보실래요 하면서 보여주는데, 팟캐스트(podcast)라는 것이었어요. 여러분들도 들어보셨는지 모르겠는데, 아이팟(iPOD)의 pod와 방송(broadcast)의 cast가 합쳐진 용어인데, 휴대용 멀티 플레이어에 방송을 넣고 다니며 이용하는 것이지요. 황석영 씨도 몇 달 전 인사동에서 만났는데, 여성이 한 분 오는데 괜찮겠느냐고 해요. 그래서 좋다고 했지요. 그런데 그 여성이 이번에 나온 《강남몽》이라는 소설을 트위터에 띄우는 일을 하는 등 서포터즈의 한 분이래요. 그래서 그분과 여러 가지로 협조를 해야 된대요. 이러한 상황 안에 우리의 문학이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제가 외국을 다녀오면 아주 격세지감을 느끼는데, 문단의 라이프사이클이 너무 빠르다는 것이에요. 우리나라 문화계에서 경음악계, 즉 유행가하고 문단의 라이프사이클이 제일 빠르다고 봐요. 악단이나 화단을 보면 아주 젊은 여성과 허연 노인이 함께 공연을 하거나 전시를 하는데, 문단은 그렇지 않아요. 한 10년 전 일인데, 제가 무슨 글을 썼더니 젊은 평론가가 와서는 “선생님, 뭘 쓰셨대요.”라고 해요. 그래서 “왜 쓰면 안 되냐. 볼펜만 있으면 쓰는 건데. 아니 요즘은 손가락만 있으면 쓰는데.”라고 했지요. 저는 사석에서 “요즘 뭐 한국문학, 한국문학 하는데, 그러지지 말고 그냥 청소년문학이라고 하지.” 같은 말도 합니다.
정말 열심히 읽는데도 못 본 시인이 많아요. 제가 몇 년 전 어디서 강의를 하다가 우리나라의 시인이 5천 명이라고 했더니, 앞에 앉아서 듣던 어떤 분이 2만 명이라고 하더라구요. (웃음) 대단히 죄송하지만, 저는 시인이 양산되는 이유 가운데 큰 부분이 많은 시 잡지들이 일종의 마스터베이션적인 마케팅을 일삼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많은 시인들이 그저 본능적인 감정의 토로를 시로 알고 발표하고 있는데, 인터넷의 댓글 수준인 경우가 많습니다. 결국 영상문화의 파동과 긴밀한 관계가 있는 게 아닐까 저는 생각합니다. 전통적인 활자문학으로서 시가 영상의 복제로 떨어지고 있다면, 글쎄 지나친 비관론일까요?
영상시대의 시인들― 이원 : 사이보그
텔레비전의 플러그를 빼고, 오디오의 플러그를 빼고, 가습기의 플러그를 빼고, 스탠드의 플러그를 빼고, 냉장고의 플러그를 한 번 더 꽉 꽂고, 커피메이커의 플러그를 빼고, 컴퓨터 옆에 꽂혀 있던 나의 플러그도 빼고, 사방의 벽에 붙어 있는 스위치들을 확인하고, 천장의 전등들을 올려다보고, 실내 온도 조절기의 버튼을 바꾸어 누르고, 가스레인지의 중간 밸브를 확인하고, 앞쪽 베란다 창을 닫고, 베란다 창의 고리를 잠그고, 뒤쪽 베란다 창을 닫고, 베란다 창의 고리를 잠그고, 거실의 창을 닫고, 창의 양쪽 고리를 잠그고, 이중창을 닫고, 이중창의 양쪽 고리를 잠그고, 이중창 위의 블라인드를 내리고, 방들의 창을 닫고, 창들의 양쪽 고리를 잠그고, 이중창들을 닫고, 이중창들의 양쪽 고리를 잠그고, 이중창들 위로 블라인드를 내리고 **-+^%*#-$%#*&$$%*&@+#*&+@#%$%*&@+&*%$$%*^%$&-+^%**$&*+&*%&$* 가방을 들다 외출 시스템의 입력 오류를 범한 것을 인식하고, 재부팅을 시작합니다.
다시 텔레비전의 플러그를 빼고, 오디오의 플러그를 빼고, 가습기의 플러그를 빼고, 스탠드의 플러그를 빼고, 냉장고의 플러그를 한 번 더 꽉 꽂고, 커피메이커의 플러그를 빼고, 컴퓨터 옆에 꽂혀 있던 나의 플러그도 빼고, 사방의 벽에 붙어 있는 스위치들을 확인하고, 천장의 전등들을 올려다보고, 실내 온도 조절기의 버튼을 바꾸어 누르고, 전화기를 자동 응답 상태로 돌려놓고, 변함없이 째깍째깍 소리를 내는 벽시계 옆을 지나며 몸속에서 환상 하나를 슬그머니 켜고, 가스레인지의 중간 밸브를 확인하고, 앞쪽 베란다 창을 닫고, 베란다 창의 고리를 잠그고, 뒤쪽 베란다 창을 닫고, 베란다 창의 고리를 잠그고, 거실의 창을 닫고, 창의 양쪽 고리를 잠그고, 이중창을 닫고, 이중창의 양쪽 고리를 잠그고, 이중창 위로 블라인드를 내리고, 방들의 창을 닫고, 창들의 양쪽 고리를 잠그고, 이중창들을 닫고, 이중창들의 양쪽 고리를 잠그고, 이중창들 위로 블라인드를 내리고, 가방을 들고 집을 나서고, 기계들에 기숙하는 나는 집을 나서자마자 주유소로 뛰어갑니다.
―이원, 〈사이보그 1―외출프로그램〉 전문
이원이라는 시인은 나이가 40대 초가 아닐까 생각하는데, 문단에 나온 지 벌써 20년 가깝습니다. 이 시인의 《야후!의 강물에 천 개의 달이 뜬다》라는 시집이 있는데, 위의 작품은 거기에 실려 있습니다. 그 시집에는 위의 시뿐만 아니라 “몸속에 웹 브라우저를 내장하게 되었어. (중략) 방금 네가 날 검색했잖니. 서른 닢의 은전도 받지 않고. 새벽은 아직 멀었는데. 쉬지 않고 아버지를 부정해. 더 이상 신전은 몸 밖에는 없어.”(〈몸이 열리고 닫힌다〉)라거나, “목련 꽃잎들이 짓이겨진 3월 목요일/ 식칼/ 밧줄/ 헬멧/ 의료용 붕대/ 백열등/ 해부학 교본/ 타일/ 나사못/ 3㏄ 주사기/ 밀폐용기// 를 샀다. 이미지만 샀다.”(〈접속〉)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가 우리 시단에 그렇게 많지는 않습니다만, 논란의 중심에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시를 읽으면 모두 이미지뿐인 세상, 영상으로 이루어지는 가상의 세상, 가상과 사이버 사물로 이루어진 세상, 사이보그라는 인간이 등장하는 세상이 보입니다.
저는 1998년에 《가짜의 진실, 그 환상》이라는 평론집을 낸 적이 있습니다. 주로 젊은 소설가들을 중심으로 해서 1990년대 말 한국 소설의 새로운 징조와 특징으로 사이보그의 문제를 다루었습니다. 그것을 가상의 세계라고 표현할 수도 있지만 저는 일부러 가짜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가짜의 진실이 무엇이겠습니까? 거기에서 나타나는 이미지, 환상이지요. 환상은 실체인가를 다루어봤던 것입니다.
영상시대의 시인들 ― 김선우 : 혼혈시대
보라빛이 검은 염소를 쓰다듬는다 가만히 온 노을 속 검은 염소가 보랏빛을 조금 찢어 입 속에 넣고 우물거린다 염소의 몸속 기나긴 회랑과 언덕을 적시고 철조망에 매달아놓은 녹슨 방울을 울리듯 젖멍울로 조금씩 스며나오는 보랏빛, 소녀가 검은 염소의 젖망울에 입술을 갖다댄다 네 눈이 좋아 아무것도 바라보고 있지 않아서―
내 고향은 검은 염소의 자운영 꽃밭, 갈 곳 없는 노을이 나를 낳았대요 꽃과 혼혈이어서 나는 손톱이 조그맣구요 여섯 개의 꽃잎 손으로 무른 밥을 먹지요 목마르면 검은 엄마의 젖을 빨구요 뿔에 걸린 달님을 조금씩 부스러뜨렸어요 그때마다 젖니가 빠지고 쌍꺼풀이 커다래져서 친구들은 금세 나를 잊었지만, 괜찮아요 내 고향은 검은 염소와 자운영 꽃밭이니까요
검은 염소의 배 밑에 붙어 보랏빛을 마시는 보랏빛, 까르륵대며 종알종알 뛰어다닌다 그런데 언니도 혼혈이에요? 갈 곳 없는 노을이 언니를 낳아 버렸어요? 괜찮아요 울지 마요 내가 다시 낳아줄게요 쉬잇, 이번엔 버리지 않을게요
그런데, 혼혈이 아닌 목숨도 있나요?
―김선우, 〈자운영 꽃밭에서 검은 염소와 놀다〉 전문
위의 시에 대한 저의 해설을 좀 읽어보겠습니다. “염소는 이를테면 가짜 양이다. 양은 창세기 시절부터 인간의 죄를 대신해서 번제(燔祭)의 제물이 된 동물이며, 속죄양이란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를 일컫지만 염소는 비슷한 모습으로 우리의 눈을 현혹시키는 사이버 양이다. 아도르노도 양의 모습을 한 염소를 경계하지 않았던가. 그 염소에 시인 김선우는 ‘검은’ 색깔을 덧씌워 염소의 사이버성을 강화시킨다. 양이 초식성이며 온순한 데 반해 육식의 체질이 강하며 수염이 있는 데다가 활동적인 염소는, 말하자면 순한 체하는 모습으로 거친 행보를 하는 사이버 양으로 등장하기 일쑤다. 다른 한편 자운영 꽃밭은 참으로 아름다운 꽃밭이다.
시인이 시적 자아를 통해 자신이 이 둘 사이의 혼혈임을 고백하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이 고백은 시인 스스로의 기질/체질에 대한 진술이기도 하며, 활자 문학/ 아날로그에서 영상 문학/ 디지털로의 이행과 공존을 보여주는 양태에 대한 진술로도 읽힌다. 이 혼혈은 아날로그 시대의 서정시인답게 손톱도 작고, 엄마의 젖도 빨아먹지만, 그 엄마는 ‘검은’ 엄마이며 젖니는 빠져 버렸다.
디지털 쪽으로 삽시간 옮겨온 것이다. 무엇보다 ‘뿔에 걸린 달님’이 상황을 고스란히 드러내 준다. 달은 서정시의 전통적인 표상인데, 그 달이 그만 사이버 양인 거친 염소 뿔에 걸려 있는 것이다. 이 상황은 그림이다. 같은 범주에 있을 수 없는 염소 뿔과 달이 한 범주 안에서 그려지는 것은, 원근법이 허락된 그림의 평면에서 가능한 것이다. 요컨대 이 시는 활자 문학의 서정성이 사라져 감을 아쉬워하면서도 영상 문학의 현실을 승인하지 않을 수 없음을 토로한다. 그것은 어쩌면 시대의 불가피한 운명일지 모른다.”(《문학, 영상을 만나다》, 65~66쪽)
요즘 시대를 흔히 하이브리드시대, 퓨전시대라고 하지 않습니까? 말을 바꾸면 혼혈시대이겠지요. 혼혈이 아닌, 잡종이 아닌, 생명이나 존재는 없을 것입니다. 순수의 순수한 증식이란 아마도 이론으로나 가능하겠지요. 저는 이러한 시의 등장이 소위 1980년대 후반부터 들어온 프랑스 구조주의에서 대두된 포스트모더니즘과 관계가 있다고 봅니다. 포스트모더니즘, 해체론, 데리다 등과 긴밀한 관계가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영상시대의 시인들 ― 성기완 : 텍스트의 초과
당신의 텍스트는 나의 텍스트
나의 텍스트는 당신의 텍스트
당신의 텍스트는 텍스트의 나
나의 당신의 텍스트는 텍스트
나의 텍스트는 텍스트의 당신
텍스트의 당신은 텍스트의 나
당신의 나는 텍스트의 텍스트
텍스트의 나는 텍스트의 당신
당신의 나의 텍스트는 텍스트
나의 당신은 텍스트의 텍스트
― 성기완, 〈당신의 텍스트―사랑하는 당신께〉 전문
황당하다고 할까요, 이해하기 힘든 시입니다. 아마도 이러한 시는 정신적인, 또는 문화적인 텍스트의 이해가 선행되지 않는다면 말장난의 수준에도 이르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문화적인 분위기, 문화적인 텍스트를 어느 정도 들여다본다면 그렇게 볼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위의 시는 무엇을 말하고 있을까요? 나와 당신, 나와 텍스트, 당신과 텍스트, 텍스트와 텍스트 사이의 모든 관계가 해체되어 버림으로써 그 관계를 도무지 설명하거나 규정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해체가 무엇입니까? 남자는 여자가 아니다와 같은 등호, 등식이 없어진 것이지요. 모든 개념화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포스트모더니즘이고 소위 데리다 이론입니다. 다소 자의적으로, 아주 쉽게 말씀드리면, 데리다에 대한 책들도 많고 얘기도 많습니다만, 독서의 텍스트를 어떻게 수용하는가, 다시 말해 시집 한 권 또는 소설집 한 권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에 대한 이론인 것입니다. 그 전에는 시인이 창작하고 소설가가 창작한 것이었지만, 데리다에 와서는 달라지게 되었지요. 물론 데리다보다 훨씬 이전에 이미 독일의 후설이나 인가르덴, 하이데거 같은 현상학자들이나 프랑스의 사르트르에 의해 이론화된 바 있지만, 데리다에 와서 더 극단화된 것입니다. 김상환 교수가 〈데리다 문학론〉을 정리했듯이 “독서는 언제나 작가에 의해 의식되지 않은 어떤 특정한 관계를 겨냥해야 한다. 작가가 스스로 사용하는 언어의 도식틀 안에서 그가 통제하는 것과 통제하지 못하는 것 사이의 관계가 문제이다. (중략) 독서는 텍스트를 넘어 그것과 다른 어떤 것으로, 어떤 지시 대상(형이상학적, 역사적, 심리학적 및 자전적 실재 등등)으로, 혹은 그 내용이 언어 밖에서 성립했거나 성립했을 수도 있을 텍스트 밖의 기의(초월적 기의)로, 다시 말해서 기록 일반의 바깥으로 정당하게 초과해 갈 수 없다.”(《문학, 영상을 만나다》, 70쪽)고 볼 수 있지요.
요즘 평론가들이 초과라는 말을 많이 씁니다만, 초과해 갈 수 없다는 것은, 텍스트의 바깥이 없다는 말이지요. 텍스트는 텍스트의 안에 있는 것이고, 거기에 의미가 주어지는 것은 그 다음 얘기라는 것입니다. 데리다의 표현에 따르면, ‘미결정의 반점’이지요. 흔히 언어가 생성된다고 말할 때, 가령 사람의 정자와 난자가 만나 생명이 생기기 직전의 상황, 그러한 상황과 연상을 하면 어떨까 생각합니다. 미결정의 반점이 어떤 의미를 띠기 시작하려고 할 때, 이때 그 형성에 독자들도 함께 들어간다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성기완 시인이 “당신의 텍스트는 나의 텍스트/ 나의 텍스트는 당신의 텍스트”라고 한 것들은, 시간과 공간에 따라서 얼마든지 달라진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텍스트와 바깥 사이에 성립할 수 있는 모든 관계를 의심하는 것이지요. 이것이 텍스트의 바깥은 없다는 의미입니다.
오늘날 시인들이 해체를 소리 높여 부르고 막 부수고 있어요. 무엇을 부수는 것일까요? 개념을 부수는 것이지요. 이런 것은 데리다 이전에 사르트르가, 더 올라가 보면 니체에서 찾을 수 있지요. 자꾸만 부수니까 소위 형이상학이라고 부르는 것을 부인하게 되지요. 넓은 의미에서 보자면 문학을 포함한 인문학이 다 형이상학인데, 그것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박성창 교수가 편역한 《입장들》(솔, 1992)에 앙리 롱스(Henni Ronse)와 데리다와의 대담이 실려 있습니다. 롱스가 “형이상학에 대한 초월이 있을 수 있습니까? 로고스 중심주의에 문자 중심주의를 대립시킬 수 있습니까? 경계의 실제적 위반이 있을 수 있습니까?”라고 물어보았습니다. 그러자 데리다는 “만약 위반이 형이상학을 초월한 어떤 지점에 순수, 단순하게 자리 잡는 것을 뜻한다면, 이러한 지점은 그 또한 언어와 글쓰기라는 지점일 것이므로 위반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중략) 그렇기 때문에 로고스 중심주의에 문자 중심주의를 대립시키거나 일반적으로 어떤 중심에 다른 중심을 대립시키는 것은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문학, 영상을 만나다》, 73~74쪽)라고 대답했습니다. 데리다는 결과적으로 모든 개념은 불완전한 것으로, 고정된 것이 아니라 유동적인 것으로 본 것이지요.
영상시대의 시인들 ― 심보선 : 범주의 혼동
말들은 떠다닌다, 거리 사이로, 건물 사이로, 다리 사이로, 떠다니는 말 속에는 전처의 소식도 있고, 모르는 꽃의 꽃말도 있다, 창밖에는 흰개미들이 풍경에서 풍경으로 옮겨 다니며, 원근법을 갉아먹고 있다, 언제부턴가 내가 그림 속으로 걸어 들어가면, 그림은 찢어진다, 나를 구원해주던 그 풍경들은 다 어디로 갔나, 60년대 이후, 신은 죽은 척하고 있다, 60년대 이후, 스트레스는 디오니소스나 제우스 같은 스, 자 돌림 신의 반열에 올랐다, 이제 그 어떤 예언도 심장을 설레게 하지 않는다, 이혼을 했으나 아직 더 할 이혼이 많다, 하루하루가 격세지감이다, 천변만화 피크닉이다, 김밥을 말았는데, 불끈, 분노 때문에 주먹밥이 된다, 무섭다, 객관적이라는 말은 모든 말의 적이다, 떠다니는 말 몇 개를 잘 이어 붙이면 딴 세상 여는 열쇠가 된다, 그래도 구원은 없다, 들리는 바에 의하면, 어떤 신은 최근 요리사 자격증을 땄다, 온종일 동파육을 만들고, 다 이루었도다, 거 참 보기 좋다, 그러고 지낸다, 말들은 떠다닌다, 모든 틈새로, 간극으로, 미끄러지듯, 유영하며, 떠다니는 말꼬리나 붙잡고, 나는 사람들 앞에서 자주 운다, 처음에는 한두 명이더니, 이제는 열 명, 스무 명 앞에서도 잘 운다, 최고 기록 백 명이 목표다, 그중에 한 여자가 나를 꼭 안아주리라, 나는 그녀와 사랑하고, 섹스하고, 결혼하고, 이혼하리라, 오랜 세월 간직한 일기장을 털면, 책장 사이에서 빠져 나온, 무수하고 미세하고 사소한 말들이, 허공에 두둥실, 두리둥실, 구원 없는 아름다움 앞에서 나는 오늘도, 속절없이, 아프다
― 심보선, 〈떠다니는 말〉 전문
글에는 소위 범주와 차원이 있습니다. 논리학에서 얘기하는 것이지만, 가령 “선생님은 왜 만날 남자 얘기만 합니까, 여자 얘기도 하시지요.”라고 누가 묻는다면 그 질문은 같은 범주 안의 얘기인데, “선생님 왜 남자 얘기만 합니까, 개 얘기도 하시지요.” 하면 다른 범주의 얘기이지요. 그런데 위의 시에서는 범주와 차원의 혼동이 일어나고 있어요. 가령 “전처의 소식도 있고”라는 말이 나오면 ‘후처의 소식’이 나와야 하는데 “모르는 꽃말도 있다”가 나오고 있지요. 이와 같은 것이 해체이지요.
그런데 문자로 볼 때와 인터넷 화면에서 볼 때는 다르지요. 요새 성추행범 등 성범죄가 난리잖아요. 그런데 대책이 없어요. 만약 애들이 다움이나 네이버에 들어가서 세종대왕을 친다고 생각해봐요. 그러면 세종대왕에 대한 설명이 나오는데 화면의 양쪽 배너에는 벌거벗은 여자들이 나오잖아요. 이러한 상황인데 어떻게 성범죄에 대한 대책이 나오겠습니까?
이처럼 문자시대에는 차원과 범주라는 논리가 가능했는데, 영상시대에는 그렇지 않아요. 그래서 성 구분의 철폐와 성 표현의 구체성이 눈에 띄어요. 페미니즘이 해체론과 더불어 나타나는 현상이지요. 젊은 평론가들이나 시인들은 이와 같은 작품들을 칭찬해요. 이런 작품에 부정적이면 그 자체가 시대감각에 무지한 것이지요.
가령 남녀 성기에 대해 씩씩하게 그려야만 시대를 앞서 가는 것 같은 상황입니다. 매클루언이 미디어 자체가 메시지라고 한 명제가 위력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영상문학은 포스트모더니즘, 해체, 페미니즘, 에로티시즘 같은 이론을 배경으로 거의 대부분 하위문화와 연계되어 있습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활자문학과 영상문학을 대비해 볼 수 있지요. 활자문학이 형이상학적이고 개념을 인정한다면 영상문학은 개념의 견고성을 부정합니다. 활자문학이 안정적 문체와 문법을 중시한다면 영상문학은 문법을 해체시키고, 활자문학이 장르를 존중한다면 영상문학은 장르를 해체시킵니다. 활자문학에서는 경계와 질서의 구분이 있다면, 영상문학에서는 그러한 구분이 해체되고, 남녀의 구분도 해체되고, 성이 사물화되지요. 활자문학이 중심 문화와 숭고미를 인정한다면 영상문학은 하위나 소수 문화를 찬양하고 엽기적이지요. 그리고 활자문학에서는 인내가 특성이라면 영상문학에서는 폭발성과 즉각성이 나타납니다. 이와 같은 면이 장르의 특성상 시문학에서 더 많이 나타나지요.
영상시대의 시 위엄?
저는 좋은 시인과 그렇지 않은 시인을 구별하는 방법으로 그 사람에게 산문을 좀 써보라고 합니다. 산문을 제대로 쓰는 사람이 진짜 시인이지요. 시를 이상하게 쓰는 시인들 중에는 산문을 제대로 쓰지 못하는 경우가 매우 많아요. 누구라고 발설은 안 하겠습니다만, 지금 상당한 평가를 받고 있는 시인이 있는데, 어느 잡지에 실린 글을 보니 문장이 안 되어 있어요. 어디 문예창작학과 교수이지요. 이상한 세상이에요. 저는 이러한 현상에 대해 개탄만 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대신 이미지도 물질인가를, 모니터 속의 이미지도 물질인가를, 우리 시대의 새로운 과제로 생각합니다. 물질의 개념을 정말 어디까지 보아야 하는지, 시적 사물이나 대상도 마찬가지입니다. 뭐든지 받아들이면서 극복하는 수가 있고, 배척하면서 극복하는 수가 있는데, 저는 아날로그적 감수성이 있어서인지 이런 말씀을 드려보았습니다.
전통적인 서정시는 가슴에 각인을 해주는데 영상문화 시대의 시는 네온사인이 그러하듯이 명멸하고 있어요. 시를 외운다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시인 본인도 그러합니다. 그리고 시의 내용도 없어요. 저는 이를 비판한다거나 지지한다기보다 이런 영상시대 속에서 과연 전통적인 시의 위엄을 지킨다는 것이 가능한가, 질문을 제기해 보는 것입니다.
청중과의 대화
―소위 시를 못 쓰니까 평론가가 되었다는 말이 있는데, 선생님께서는 왜 시를 쓰지 않고 평론가가 되었는지요? (웃음)
▶ 저도 왜 평론가가 되었는지 기억이 없습니다. 저는 고등학교 때 이과였습니다. 그래서 문과로 갈 생각도 없었고, 평론가가 될 생각은 꿈에도 없었습니다. 이어령 선생님의 《지성에서 영성으로》라는 책을 읽어보니까 “아침에 생각했던 것이 오후에 달라진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한 치 앞도 못 보는 존재이지요. 가끔 왜 평론가가 되었느냐는 질문을 받는데, 그때마다 모범 답안을 하나 만들어 놓아야겠다고 생각은 하지만, 그만 잊어버리고 마네요.
―선생님께서는 평론가라서 매우 날카롭게 지적해주시는데, 앞으로 우리 시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 좀 제시해 주실까요?
▶ 방향 제시 같은 것은 저 한테 너무 과분한 문제입니다. 다만 이러한 생각은 가지고 있어요. 우리 시인들이 너무 감정적이지 않은가, 시를 읽고 감동을 느낀 적보다 답답할 때가 많아요. 예를 들어 아침에도 허무하고 낮에도 허무하고 산에 올라가도 허무하고 강가에 가도 허무하다고 쓴 시를 읽으면 하나도 허무하지 않아요. 오히려 허무 되게 좋아하네, 그런 생각이 들어요. 인생이 허무하다고 하면 그 생각을 발전시킬 매개가 되는 구체적 사물이 있어야 하겠지요. 자기 감정을 그대로 토로하기보다는 어떤 소재를 통해서 주제를 나타낼 수 있을까를 고민해야겠지요.
―선생님께서는 좋은 시인과 그렇지 않은 시인을 구분하는 방법으로 산문을 써보면 알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 방법은 문장의 문법이나 구성 등 글쓰기의 기준이겠지요. 그런데 시라는 것은, 물론 시라는 것도 내적 플롯이 있고 문법이 있지만, 글쓰기 차원을 넘어서는 감정이나 분위기나 상상력이 있다고 생각되거든요. 그러므로 산문 쓰기로는 좋은 시인과 그렇지 않은 시인을 구분하기가 어렵지 않을까요?
▶ 지금 말씀하신 대로 그것을 넘어서야 하지요. 그런데 넘어설 게 있어야지요. 가령 포도주를 만든다면 일단 물이 있어야지요. 그런데 물 그 자체가 없으면 어떻게 해볼 수 없잖아요. 탤런트 최불암 씨의 어머님이 하시던 ‘은성’이라는 술집이 명동에 있었어요. 제가 20대 때 거기에 가면 김수영 선생님이 이봉구 소설가하고 술을 들고 계셨어요. “아, 이리 와, 이리 와.” 했어요. 저는 그분을 잘 모를 때였는데, 김수영 선생님이 그렇게 분노를 잘하셨어요. 그래서 제가 “선생님 너무 감정적이지 않으십니까?”라고 했더니 대뜸 “문학이 원래 감정이지.”라고 하셨어요. 저는 그때 한국문학의 문제는 바로 이거구나라고 생각했어요. 타계한 김현 씨하고 《문학이란 문엇인가》라는 책을 편집하면서 머리말을 썼는데, 지금 말씀드린 대로 감정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넘어서야 한다고 썼어요. 감정을 들고 요리를 해야 하는데, 장봐 온 원자재를 그냥 먹으라고 하면 요리사가 요리의 중요성을 스스로 없애버리는 것이지요. 요리가 뭐 중요해, 그대로 먹는 게 건강에 좋지, 하면 당황하는 일밖에 없지요. 시인이 아니라도 그런 일은 누구든지 할 수 있지 않습니까 ?
―요즘 어린 세대들은 글쓰기에 집중하기보다는 게임이나 만화나 컴퓨터나 휴대전화 등 영상적인 것으로 자신을 표현하는 데 익숙하잖아요. 글쓰기의 논리력보다 이미지나 감정이나 환상 등에 익숙한데, 장래에 이러한 세대들이 시인으로 등장했을 때, 지금의 시인들은 당황할 것 같은데요.
▶ 제가 드리고자 하는 말씀입니다. (이모티콘을 보이며) 빛나는 봄, 이렇게 누가 문자를 보냈어요. 실화입니다. 그 다음에 하트, 별도 보냈어요. 하트와 별까지는 알겠는데, 그 다음에 있는 삼각형 등등은 뭐가 뭔지 알 수 없었어요. 무슨 얘기인지, 어쩌자는 것인지, 그래서 무슨 뜻이냐고 물어보니 그 메시지를 보낸 젊은이가 “선생님, 시적이잖아요.” 해요. (웃음) 앞으로 정말 이런 것도 시가 될지 모르겠어요. 어려서부터 이모티콘의 이미지들을 시라고 생각하다가 고등학교나 대학에서 시를 배운다고 얼마나 다른 시가 될까요? 그렇지만 젊은 세대들은 말합니다. “선생님, 걱정하지 마세요.” (웃음)
정리 / 맹문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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