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읽기·우리말·문학자료>/우리 말♠문학 자료♠작가 대담

문명의 구원을 향한 생태적 사유 / 이성혁|문학평론가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11. 11. 23. 12:09
728x90

문명의 구원을 향한 생태적 사유


      이성혁|문학평론가




박선우 시인의 새 시집 『홍도는 리얼리스트인가, 로맨티스트인가』는 자연 현상과 사람살이의 경계선을 허무는 독특한 시각을 보여주고 있다. 다시 말하면, 그는 자연 현상을 문명사회에서 벌어지는 여러 양상으로 번역한다. 가령 벌들이 꽃 주위를 날아다니는 현상에 대해 시인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몇 페이지의 텍스트를 저장하고 있는가에

벌은 온몸으로 후각을 동원하고

패스워드를 찾느라 온종일 붕붕거린다

아무래도 대갓집 규수 같은 목단이라면

천개의 비밀을 보유하고 있지 않을까

몇 마일을 날아왔을 벌이 꽃과 접속을 끝내고

꽃의 텍스트를 읽느라 정신이 없다

꽃에게도 이렇게 많은 공개할 수 없는

파일이 있다는 것, 그 파일 속에는

천기를 누설할 수 없는 꽃의 비밀들이

문서화된 텍스트를 읽어내느라

텍스트에 빠져 시간 가는 줄 모르는데

안이 궁금해 기다리는 바람

세상이 시끄러울 것 같은 예감으로

제각기 촉각을 세우고 있는 새와 바람

밖이 시끄럽든 말든 벌은

무차별 꽃을 해킹하고 있다

―「꽃의 파일을 해킹하다」 전문


시인은 꽃 주위를 날아다니는 벌은 “꽃과 접속을 끝내고/꽃의 텍스트를 읽느라 정신이 없다”고 번역하여 의미화 한다. 이러한 의미화는 이 구절을 에로틱하게 읽을 수도 있게 하는데, 벌들과 꽃-목단-과의 접속을 어떤 “대갓집 규수”와 “몇 마일을 날아왔을” 떠돌이와의 섹스로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시에서 벌은 목단과의 육체적 접속에 만족하지 않는다. 비밀을 감춘 것 같은 꽃의 내면 역시 알고 싶어 하는 것이다. 무릇 사람 사이의 연애 역시 마찬가지다. 섹스 이후에도 상대방에게 매력을 느낀다면, 사람들은 상대방이 살아온 삶의 내력을 알고 싶어 한다. 그래서 연애 과정은 육체관계 뿐 아니라 상대방의 삶을 읽어내는 데 “시간 가는 줄 모르”게 된다. 사랑의 대상을 읽어내고자 욕망하게 되는 것은, 상대방의 “누설할 수 없는” 비밀을 하나씩 알게 될 때마다 상대방과 자신은 사랑으로 더욱 연결되게 되었다고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위의 시에서 흥미로운 사실은, 벌뿐만 아니라 목단 주위의 바람이나 새들 역시 “무차별 꽃을 해킹하고 있다”는 것이다. 저 목단은 어떠한 존재이기에 새들이나 바람까지도 사랑하고자 달려드는 것일까? 이렇게 시인이 목단을 매력적인 존재로 표현하는 것은 자연에 대한 그의 태도가 어떠한 것인지 암시해준다. 자연은 저렇게 대갓집 규수 마냥 고고한 모습을 하고 있다. 그 모습은 야릇한 매력을 발산하기 때문에, “세상이 시끄러울 것 같은 예감”을 하고 있는 시인-시인은 벌이나 바람, 새와 같이 방랑하며 사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에게 “밖이 시끄럽든 말든” “무차별 해킹하고” 싶은 욕망을 불러일으킨다. 자연에 내장된 파일에 접속하고 패스워드를 찾아 그 텍스트의 비밀을 읽어내는 일, 이것이 이 시집에서 박선우 시인이 추구하는 시 세계 중 하나이다.

 

자연이란 텍스트를 읽어내는 일은 자연 현상에 내장되어 있는 이미지를 포착하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시인은 그 이미지를, 앞에서 언급했듯이 인간 세상의 일로 번역한다. 위의 시에서도 벌이 꽃 주위를 날아다니는 자연 현상을 컴퓨터 파일의 텍스트를 읽어내는 일로 번역하여 이미지화 했다. 이러한 이미지화는 “바다의 비늘이 밀려오면/뭍의 사람들은 바다를 주워/햇볕에 말리고/말린 바다는/자기의 지문을 지우며/또 다른 생을 꿈꾼다”(「홍도는 리얼리스트인가, 로맨티스트인가·2」)와 같은 구절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 이미지는 아마도 염전에서 포착한 것 같은데, 시인은 햇빛에 증발되는 바다를, 다른 삶을 꿈꾸면서 지문을 지우는 행위로 번역하여 이미지화 한다. 그리고 이렇게 염전에서 채굴되는 소금은 “정제된 바다의 눈물들이/짜디 짠 생으로 거듭나기 위해/육신을 태우”는 “법정스님의 의식”(「소금은 바다의 사리다」)으로 비유되기도 한다. 자연은 수동적이지 않다. 저 바다처럼 다른 생을 꿈꾸고 자신을 태우기도 하고, 벌들의 사랑을 받은 꽃들 역시 “주변을 인식하느라/세상과 접속”하면서 “봄날을 향해 총구를 겨누”(「4월」)기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시인의 이 시집에는 의인법이 많이 사용된다. 자연물은 모두 사람처럼 어떤 의식이나 의지를 갖고 행동한다. 이렇게 자연을 의인화하는 것은, 자연에서 사람살이와 친숙한 어떤 속성을 발견하고자 하는 시인의 의도와 무관하지 않다. 즉 시인에게 자연은 완상의 대상이 아니라 인간과 같이 생활해 나가는 이웃과도 같은 주체다. 이는 자연을 인간의 시각에 포섭하는 인간중심주의적인 작업이라고도 볼 수 있지만, 다르게 생각해보면 도리어 인간의 삶과 자연을 분리시키지 않으려는, 자연에 대한 겸손함을 보여주는 태도라고도 할 수 있다. 자연 역시 인간처럼 생활하고 있는 주체라는 인식은, 자연의 생태에 대한 존중을 가져올 수 있는 것이다. 자연 자체가 떠들썩한 인간 사회와 같이 자신의 생활을 가지고 있는 존재라고 할 때, 그 자연은 쉽게 파괴하면 안 되는 무엇이 된다. 시인은 어떤 여름날 아침의 세계를 다음과 같이 다채롭고 생기 있는 모습으로 보여주면서, 자연의 생활상을 이미지화 한다.


삐거덕삐거덕 

팔월의 아침은 들판을 질러오고

아침보다 먼저 일어나

수다를 떠는 제비들 소리에

풀잎의 푸른 정맥들 또르르

노숙한 지렁이 육두문자로 일어나고

저수지에 붕어들도 비늘을 말리느라

온통 저수지는 쏭 쏭 쏭

깨어난 마을도 입맛을 잃은 듯

숭숭 찬물에 밥을 말며

아침을 싣고 온 마차는 짐 부리듯 아침을 내려놓고

눈인사도 없이 삐거덕삐거덕 가고  

염려가 되는 제비들 마차를 따라가며

괜찮아요? 괜찮아요?

― 「신장리에서·2」 전문


여름엔 아침이 빨리 온다. 시인은 빨리 오는 아침의 속도를 “들판을 질러”온다고 표현한다. 그 속도는 문명의 소산인 기차나 자동차와 같이 차가운 느낌을 주지 않는다. 그것은 “삐거덕삐거덕” 거리면서 오는 속도로, 마치 아침 배달을 하기 위해 우유를 실은 짐수레가 서둘러 들판을 질러올 때의 빠름이다. 시인은 이를 “아침을 싣고 온 마차”라고 표현한다. 그 마차는 우유 대신 아침을 싣고 와 “짐 부리듯 아침을 내려놓”는다. 어느새 도달한 팔월의 아침에서는 정겨운 느낌과 더불어 생활의 활기를 느낄 수 있다. 생활의 활기는 저 마을에 존재하는 뭇 생명체들의 깨어남으로 인해 더욱 고조된다. “아침보다 먼저 일어나/수다를 떠는 제비들”과, 풀잎, 지렁이 그리고 붕어들도 나름대로의 생활을 시작하면서 마을을 이루고 있는 자연은 부산스럽게 하루를 시작한다.

 

이렇게 시인은 아침을 맞은 자연 세계를 인간의 생활과 동일시하여 묘사한다. 허나 동일시된 자연 세계는 인간의 생활보다 더욱 순수하고 아름다운 모습이다. 이 시를 읽으면서 독자가 짓게 되는 미소는, 인간의 생활이 잃어버린 순수성을 이 자연 세계가 다시 회복하여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인이 자연을 순진하게 유토피아적으로만 바라보고 있지는 않다. 자연에는 고통스러운 겨울 역시 닥친다. 「신장리에서」 연작은 신장리의 사계가 형상화 되고 있는데, 시인은 「신장리에서·4」에서 겨울 풍경을 그리고 있다. 이 시에서 시인은 “팽개친 삽자루처럼/버려진 겨울 들판”을 “배고픈 짐승 같다”고 이미지화 한다. 하지만 겨울이 와야 봄이 오는 법, 자연의 순환 과정 중 한 단계인 겨울을 부정적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시인이 겨울 풍경을 저렇게 부정적으로 그린 것은, 들판이 “구멍이 숭숭 뚫린 폐비닐”로 인해 “기관지 천식으로 그르렁그르렁”거리는 고통을 앓고 있는 것을 포착했기 때문이다. 즉 들판의 고통은 겨울이 왔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인간으로부터 버려진 비닐을 함부로 들판의 가슴 속에 묻었기 때문인 것이다. 「신장리·4」에서는 시인의 문명비판적인 인식이 노출되고 있다. 비닐로 상징되는 문명이 자연의 평화롭고 활달한 세계를 병들게 만드는 무엇으로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허나 이러한 문명비판에 대비되면서, ‘신장리’ 연작시에서 보여준 시인의 자연에 대한 신뢰는 더욱 도드라지는 면이 있다. 가을의 풍경을 음악에 빗대어 표현하고 있는 「신장리·9-가을서곡」에서, 가을은 “지휘자도 관객도 없는 뜰 한 편에/하나님이 계”시는 계절이다. 가을의 자연은 스스로 천상의 음악을 연주하고 있으며, 이 “악보도 음계도 없”는 음악을 통해 하나님이 현현한다. 그 음악의 특징은 “2중주 3중주의 구성된 화음들이/천지에 가득하다”는 데 있다. 가을의 갖가지 자연들은 서로 조화를 이루면서 “구슬이 구르는 것 같기도 한” 음악을 연주한다. 이러한 자연 찬양은 봄을 노래하고 있는 「신장리에서·11」도 보여준다. 이 시에 따르면 봄의 자연은 광맥이다. 봄에는 “냉이며 쑥이며 달래 등이/농축된 비타민으로 거듭나”서 “온 천지가 광산이며 광맥이” 된다. 이러한 “농축된 비타민”들은 우리를 건강하게 해주는 풀들이므로 “금값보다/더 귀한 노다지”다. 그런데 이러한 자연 찬양 역시 인간 생활과의 유비 속에서 진행된다는 점에 박선우 시인의 시작에 일관성이 있다. 가을의 자연 풍경은 우리를 감동시키는 음악을 들려주고 봄의 자연은 우리를 건강하게 해주는 풀들을 제공한다.

 

그런데 이 시집의 3부에서는 자연물들의 생리를 사회적 갈등이나 전쟁으로 유비하여 표현하는 시들이 많아서 주목된다. 가령, 「모기와 전쟁」은 피를 탐내는 모기들과 시적 화자의 ‘신경전’을 ‘전쟁’에서의 탐색전으로 표현하고 있다. 새벽 2시, 시적 화자의 신경을 건드리는 모기에 대해 시인은 “눈꺼풀은 무겁게 내려앉는대 웽/곡예를 하듯 앉았다 떴다 교란작전을 펼치고 있다”는 식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시적 화자는 “에프킬라 대량 살포”를 통해 모기들을 죽인다. 이때, 이에 “죽어가는 모기를 보며” 시인이 “나치는 유태인을 이렇게 학살했겠지”라고 진술하고 있는 점에 주목된다. 모기가 시적 화자에 어떤 악감정을 갖고 있어서 피를 빨고자 하는 것은 아닐 테다. 모기의 행동은 자연적인 생리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에프킬라’라는 약품을 사용하여 모기를 ‘대량 살상’ 한다. 모기의 입장에서 보면, 인간의 에프킬라 살포는 독가스라는 문명의 산물을 통해 유태인을 죽인 행위와 다르지 않다. 이를 보면, 이 시에서 인간 문명과 자연이 대립되고 있다는 것을 짐작하게 된다. 이때의 자연은 유태인과 같이 무방비 상태의 약자를 의미하기도 한다. 인간과 자연의 대립은 아래의 시에서도 나타난다.


수차례 경고를 무시한 채 현관에다 집을 짓는 제비들

주인을 무시하는 처사가 괘씸하여 남편에게 철거를 요청했다


우리말을 엿들은 제비들 지상권을 주장하며

우리를 빙 둘러싸고 철거만 해보라고

깨알 같은 눈을 치켜뜨고 공중 시위를 한다


우리의 터전을 보장하라

우리의 터전을 보장하라


무단침입죄 고성방가 죄로 집어넣어 버려

남편의 목울대가 꿈틀하는 데도

천막 농성도 불사하겠다는 충혈된 저 눈


달동네 사람들 같다 달동네 사람들 

결국 포기각서 대신 빗자루를 버렸다

농성은 해제되고 평화로운 봄날이다

―「제비」 전문


모기처럼 제비 역시 ‘집주인’을 괴롭히기 위해서가 아니라 생명을 지탱하기 위해서 “현관에다 집을 짓”고 살려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집주인’인 시적 화자와 남편은 철거를 결정하고 빗자루를 들어 제비집을 없애고자 한다. 이에 제비들은 “제비들 지상권을 주장하며” “공중 시위를” 하고, 결국 ‘집주인’들은 “빗자루를 버”리고는 철거를 포기한다. 그러자 “농성은 해제되고 평화로운 봄날”을 맞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즉,

 

저 제비와의 공존을 인정하면 갈등은 없을 터인데, 제비들이 감히 동물 주제에 인간의 영역에 들어왔다고 하면서 제비집을 파괴하려고 할 때 갈등이 생기고 전쟁 상황이 도래한다. 인간의 오만과 탐욕이 자연적인 평화를 해친다. 그런데 시인은 저 공중 시위를 하고 있는 제비들에서 ‘달동네 사람들’을 보는 것이다. 오만한 ‘주인’은, 저 제비집을 파괴하려고 하듯이 달동네 사람들의 주거를 함부로 철거해버리려고 하곤 한다.

 

독자들은 제비집을 없애려고 하는 시적화자의 모습과 이에 항의하는 제비의 모습에서 어떤 유머를 느끼게 되겠지만, “달동네 사람들 같다 달동네 사람들”이라는 구절에 이르면 이 시가 전달하고자 하는 주제는 바로 사회적 권력에 대한 비판임을 알게 된다. 동물의 주거지를 별 감정 없이 함부로 파괴하듯이, 권력은 사회적 약자들의 삶을 거리낌 없이 파괴해버리는 것이 현 상황이다. 시인은 여기에서 사회적 갈등과 폭력은 바로 제비들-약자들-의 삶을 인정하지 않는 권력자들의 오만에 책임이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한다. 그래서 시인은 제비들의 공중 시위를 긍정하듯이 삶의 터전을 지키고자 하는 약자들의 항의 시위를 긍정할 것이다. 달동네 사람들이나 동물들과 같은 약자들은, 자연과 대립하며 구축되는 인간의 문명에 저항하면서 살아나갈 수 있다. 그래서 「봄」에서는 생명이 피어나는 ‘봄’의 상황을 ‘혁명’이라고 지칭한다. 봄이 오자 자연은, “피우고 말겠다는 신념들이/저지선을 뚫고//선혈을 게워내며/아파트 담장을 차지”하는 ‘혁명’을 일으킨다. 아파트 담장은 자연의 생명을 가로막는 인간 문명의 권력을 상징한다. 자연은 그 권력을 차지하고 전복시킴으로써 혁명에 성공한다.

 

그런데 시인은 혁명의 성공은 그냥 주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봄」에서도 “은밀한 모의가 이루어”진 이후에 “혁명은 일어났다”고 시인은 쓴다. 「감자에 대해서」에서도 시인은, 감자가 튼실한 우량감자로 자라기 위해 “날마다 전략이 필요했다”고 쓰고 있다. “머리를 싸매고 썼다 지웠다” “수백 번 감자는 제 몸을 키”운 이후에야 “천하의 식탁을 평정”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자연의 승리란 자연적으로 따라오는 것은 아니다. 「신장리에서·4」에서 묘사된 겨울 풍경의 상징적인 의미에서도 볼 수 있듯이, 문명의 침투에 의해 자연의 생명력이 고갈되어 버리는 경우도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겨울의 피폐한 이미지는 폐가의 묘사에서도 볼 수 있다. 「빈집」에서는 “마구 버려진 질그릇과 짐승의 배설물이 썩어가는 집”이 묘사된다. 그 집은 “슬픔마저 유배된 집”이며, 그 주위엔 “혼자 남은 복숭아꽃만 제 몸을 키우며/우물보다 더 깊은 슬픔을 삽질하고 있”을 뿐이다. 이곳은 인간 문명의 상징인 집이 세워졌던 곳이지만 이제 폐허가 되어 생성이 아니라 부패만 이루어지는 곳이다. 폐허가 되면서 자연도 파괴되고, 결국 복숭아꽃만 외롭게 “슬픔을 삽질”한다. 폐허가 되어버린 문명에서는 다음과 같이 자연 역시 기아에 허덕이게 된다.


바람과 햇볕이 안부만 묻고 간

폐가 앞마당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것이

단죄를 받고 있는 헤스터 같다


해인지 홍시인지 잠시 착시를 느낀

새 떼들이 붉은 살점을 먹기 위해


육박전 공중전 지상전

흙바닥에 잔여물까지


흔적도 없는 허기란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단죄를 받는 것보다 

허기란 전쟁과 살인의 주범이라는 것

―「홍시」 전문

 

이 시에 등장하는 ‘폐가’는 인간 문명이 무너진 장소를 의미한다고 확장해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그래야 이 시의 전언을 온전하게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문명이 무너진 장소는 쓰레기장이 된다. 문명은 자신을 파기하면서 쓰레기를 양산한다. 쓰레기에서는 더 이상 생성은 없다. 그러므로 먹을 것도 없다. 이 시의 폐가에는 오직 홍시 하나가 “단죄를 받고 있는 헤스터”처럼 감나무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 여기서 ‘헤스터’는 아마도 주홍글자의 주인공인 ‘간통녀’ 헤스터 프린을 지칭하는 것 같다. 그렇다면 여기서 홍시는 쓰레기장에 겨우 하나 남은 먹을거리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도덕적 단죄의 대상이라는 의미도 갖게 된다. 그래서 새 떼들이 홍시를 흔적도 없이 먹은 행위는, 그들이 먹을거리를 찾을 수 없어 기아에 허덕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겠지만, 영혼의 허기를 비난행위로 채우는 군중의 공격성을 의미하기도 할 것이다.

 

이렇게 보면, 문명이 폐허가 되고 그와 더불어서 자연 역시 생명력을 잃어버리는 현상은, 인간의 내면적 삶의 붕괴와 유비될 수 있다. 문명이 이루어놓은 인간의 내면 역시 붕괴되어버린다면, 자연적 심성 역시 손상되어 영혼은 허기에 시달리게 될 것이다. 허기에 시달리는 영혼은 전쟁과 살인의 심성을 낳는다. 그래서 시인이 “허기란 전쟁과 살인의 주범”이라고 말할 때의 그 ‘허기’는, 육체적인 허기뿐만 아니라 영혼의 허기를 의미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 허기에 공격을 받는 홍시는 헤스터처럼 극심한 고통에 시달려야 한다. 이러한 독해에 따른다면, “허기진 가을볕도 주변을 맴돌며/뱀처럼 한입에 삼”키려고 “연신 혓바닥을 날름거리는” 가운데 홀로 매달려 있는 홍시는 역시, 그러한 고통 속에서 “탯줄을 끊고/스스로 자폭하”(「아직도 탯줄을 끊지 못하고」)게 된 것일 테다. 이렇게 폐허를 만드는 문명은 자연의 생태뿐만 아니라 인간 내면의 자연까지도 파괴하여 폭력과 전쟁을 낳는다.

 

자연을 파괴하는 문명은 정확히 말하면 자본주의 문명이다. 자본은 이윤을 위해 무분별하게 달동네 사람들의 거주지를 철거하여 인류 내부의 자연성을 말살하는 데에로 나아간다. 시인은 이러한 속성을 가지고 있는 자본이 사업을 위해 자연 속으로 침투해 들어가는 현상에 대해 비판적인 인식을 갖고 있다. 자본이 들어갔다가 빠져나오게 되면, 그곳은 폐가처럼 쓰레기장이 될 것이고 생태는 파괴되어 허기가 지배하는 상태에 빠질 것이다. 그래서 시인은 “자본의 꽃이 양귀비꽃보다 붉은 저녁이면/북항은 온통 비린내의 서식지가 되어/비린 자본들이 파도처럼 몰려온다”(「북항」)라고 쓴다. 양귀비꽃이 가지는 환각적인 성질을 생각해보라. 환상을 유포하는 자본은 양귀비꽃처럼 비린내를 풍기면서 ‘북항’을 점령한다. 그 자본에 지배당한 ‘북항’은 「비치스파랜드」에서의 “자본과 유착된 낙원”과 같이 “생각은 없고 몸만 있는/구원 받지 못한 낙원의 이브들/죽은 낙원에 앉아 시간만 축내고 있”는 장소가 될 것이다. 그곳은 “하나님의 말씀은 없고 세상만 있”어서 영혼의 허기가 지배하는 곳이 될 것이요, 그곳의 사람들은 ‘불나비’처럼 이 “세상 속으로 뛰어” 들어가 파멸하게 될 것이다.

 

자본이 지배하는 세상은 인간의 영혼뿐만 아니라 자연 역시 파괴할 것이다. 자연의 파괴는 문명의 파괴로 이어진다. 자연을 파괴하는 문명은 자기 파괴의 길로 나아가고 있으며, 이는 인류의 재앙-전쟁과 살인-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시인은 「싹쓸이」에서 폭풍과 같은 자연 재해에서 인류의 재앙에 대한 신의 경고를 본다. 아마도 폭풍 때문에 “몇 십 년 나무들은 뼈만 남”게 되었는데, 사람들은 이에 대해 “신이 준 경고”라고 해석한다. 이 말을 좀 더 풀어서 시인은, “새만금의 지도를 다시 써야 하고/절개된 산의 지형도 다시 써야 하는/자연을 파괴하는 인류의 재앙은/예고편이 아닌 우리의 현실이란 것”이라고 말한다. 달동네를 멋대로 철거하듯이, 자본과 권력은 이익을 창출하기 위해 산을 절개하고 새만금을 함부로 파헤친다. 자연을 멋대로 개조하고 있는 이러한 무분별한 행동이 인류의 재앙으로 앙갚음 당하리라는 것을, 시인뿐만 아니라 마을 주민들도 예감하고 있는 것이다.

 

시인은 자본주의 문명이 가져올 재앙을 막는 방법은, 자연의 생태가 가진 생명력을 존중하고 그 생태를 인간의 삶과 접목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접목은 자연의 생물과 인간이 같은 생명체라는 것을 교감할 수 있을 때 가능하다. 


올챙이 같은 햇볕들이 한꺼번에

문턱을 넘어 거실 바닥으로 유영을 하고 있다

오랜 침묵에 말을 잃은 붙박이장도 우지직 말을 트고

장식장 위에 놓아둔 베고니아 꽃도 요실금 환자처럼 찔끔찔끔

분비물을 지리더니 뭉클뭉클 생리 혈을 쏟고 있다

꽃들도 생리를 하는 거라고  경이로운 통증이 여자와 교감하는 순간

여자도 베고니아처럼 꽃을 피우고 있다

―「베고니아 꽃을 피우는 여자」 후반부


이 시에서 시인이 “장식장 위에 놓아둔 베고니아 꽃도 요실금 환자처럼 찔끔찔끔/분비물을 지리더니 뭉클뭉클 생리 혈을 쏟고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은, “꽃들도 생리를 하는” 모습을 통해 인간과 마찬가지로 식물 역시 생명을 낳는 존재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일 것이다. 저렇게 조용히 놓여 있는 베고니아 꽃 역시, 비록 침묵하고는 있지만 새로운 생명을 낳기 위한 몸의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이 시에 등장하는 ‘여자’가 이를 투시할 수 있었던 것은 “경이로운 통증”으로 인해 그 꽃이 “여자와 교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저 꽃을 보면서 시인은 생리할 때의 통증을 느낀다. 그것은 저 꽃 역시 생리를 하고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생리통을 통해 교감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은 경이로운 동일화다. 이러한 동일화는 여자가 “베고니아처럼 꽃을 피우”는 존재로도 변화됨을 의미한다. 이제 여자와 꽃 사이의 경계는 없어지고, 여자 역시 자연 속의 일원이자 자연의 산물들과 교감할 수 있는 존재가 된 것이다. 

 

식물이 꽃을 피우는 생명력은 인간이 아이를 낳는 생명력과 동일하다. 생명의 입장에서 볼 때 인간과 꽃은 같은 존재다. 그래서 시인은, 저기 피어 있는 호박꽃에서 “지 새끼 주렁주렁 품에 안으면/세상에 없는 새끼들 마냥/어르고 달래고/까르르 까르르 웃는”(「호박꽃·2」) 모습을 포착하기도 한다. 아이를 낳고 사랑하는 호박꽃은, 당연히 꿀벌이나 햇빛과 사랑도 하는 여인이다. 그래서 이 여인은 햇빛과의 정사에서 다음과 같이 엑스터시에 빠져들기도 하고 오르가즘에 오르기도 한다.  


꽃이 햇볕을 충전하고 있다

4월의 아침이 녹색으로 자동변환

버튼을 누르자 꽃이 일제히

내밀한 나신을 전부 까발리고

한 장의 춘화처럼 낮 뜨거운 

정사를 하고 있다

꽃의 더운 숨결은 천지를 달구고

새도 바람도 비몽사몽

엑스터시에 빠져드는 순간

꽃이 파르르 몸을 떨며

오르가즘에 빠지고 있다

― 「꽃도 오르가즘을 느낀다」 전문

 

꽃 역시도 인간처럼 정사를 통해 육체적 환희를 느끼는 존재다. 이렇게 환희를 가져오는 정사는 자연스러운 것이어서, 꽃은 “내밀한 나신을 전부 까발리고” 대낮에 공개적으로 “낯 뜨거운/정사”를 스스럼없이 벌인다. 햇빛과의 정사 속에서 오르가즘에 오르며 내뱉는 “꽃의 더운 숨결”은 생명력의 발산이다. 그래서 이 뜨거운 숨결은 천지를 발갛게 달굴 것이요, 꽃 주변을 배회하는 새와 바람 역시 그 숨결에 감염되어 엑스터시에 빠지게 할 것이다. 꽃이 광합성을 하는 이 생명 과정은 온 세계를 생명의 힘으로 들뜨게 만들고, 오르가즘으로 인해 “파르르 몸을 떨”도록 만든다. 시인은 이 낯 뜨거우나 경이로운 정사를 부러운 눈으로 읽어내면서 꽃이 느끼고 있는 오르가즘에 교감하고 생명력이 가져오는 기쁨을 함께 누린다. 시인은 육체적 교감을 통하여 저 꽃의 내밀한 비밀에 접근할 수 있는 패스워드를 드디어 알게 된 것일 터, 이러한 교감 능력이 자연과의 공생을 가능하게 하고 자본주의 문명을 치유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시집에서 시인의 시세계는 문명의 소통과 자연의 구원과  복원으로 접근하려는 시인의 내면이 아름다운 시인이라 말하고 싶다.

 

 

-신안1004문인협회 (cafe.daum.net/siinhouse) 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