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시를 읽어야 할 시간

매우 드라이한 출산기 / 성미정 (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33)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13. 1. 9. 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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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우 드라이한 출산기


  ―성미정(1967∼ )

 


  닥터 박 왜 자꾸 항문 끝에 힘을 주라는 거요 내 지금 비록 네 발 달
린 짐승이 되어 침대 위를 기고 있지만 이곳은 분명 산부인과의 분만실
이오 그런데 자꾸 항문 끝에 힘을 주라니 날보고 지금 똥을 낳으라는 말
이오 똥 아닌 것을 낳으라는 말이오 닥터 박 어쨌든 난 지금 당신 명령
에 따를 수밖에 없는 입장이니 어디 한번 죽을 힘을 다해 항문 끝에 힘
을 주겠소


  닥터 박 이곳은 화장실이 아닌 건 분명한데 난 지금 도저한 핏기가 묻
은 희고 말랑한 똥을 낳은 것 같소 이 똥을 품에 안으며 난 이 희한한 똥
과 사랑에 빠질 것을 예감하고 있소 이것이 자라서 진짜 똥이 되어도 내
사랑은 처음 그것을 보았을 때처럼 희고 말랑할 것 같음도…닥터 박 항문
끝에 힘을 주라는 당신의 조치는 매우 적절하였던 것 같소

 

 


-일간『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 33』(동아일보. 2012년 11월 28일)
기사입력 2012-11-28 03:00:00 기사수정 2012-11-28 10:25: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