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시를 읽어야 할 시간

청빙가(聽氷歌) / 조정권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13. 1. 14. 1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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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빙가(聽氷歌) 


  조정권

 


  1
  마당을 쓸고 있는 빗자루에게도 잠시 혼자 있을 시간을 준다 어
진 시간이여


  2
  놀랐다 대웅전 마룻바닥 천정까지 꽉 들어찬 만산홍엽 단풍빛


  3
  초겨울 햇빛 요즘 톡톡히 옷 노릇 하네


  4
  밤새도록 지붕위로 걸어 다니는 눈송이
  소리 내지 않는 눈부처


  5
  간밤 내린 눈이
  장작마다 흰 꽃을 수없이 피워놓았다
  도끼날에도 흰 꽃을 달아놓았구나


   6
  겨울 산 한 채 먹으로 개고 또 개어 우둔한 마음으로 마주한다 맑
은 암향(暗香) 힘 뻣세고 뻣세다 붓에 힘 빼고 깊은 먹 속으로 한가
로운 늙은 붕어를 찾아본다 어리석다 내 얕은 붓질


  7
  먹으로 흰 꽃을 그리다


  8
  세이각(洗耳閣) 문고리
  소리 하나 없이 공하다


   9
  연못바닥 환하고 공하게 드러나니 두 번 겨울눈이 온다


  10
  내 화두는 추위 한 점 안 먹은 달
  설월(雪月)의 처마 끝


  11
  절 아주머니들 물걸레질 마치고 돌아간
  대청마루에 살얼음 낀 하늘 다시 살아온다


  12
  부엌에 하얗게 씻어다놓은 파뿌리
  스님네들 겨울살이 창호지 구멍만큼 내 비친다


  13
  사는 거 문제없다는 게 문제
  사는 거 큰일났다는 게 큰일


  14
  형광등 빛 같이 흐린 마음에 장닭처럼 홰치는 눈보라

 
  15
  큰 칼 든 사천왕 옆을 통과할 때마다 마음의 소지품 검사


  16
  꽃길을 지나온 바짓가랑이로 따라오는 흰 나비


   17
  풀밭에 누워 들었다 얼음장 안고 뒤로 흘러가는 봄강물 소리


  18
  배추벌레 애벌레 푸른 배때기 대고 기어가는 잔가지 하나같은
세상
  세 번째 봄이로구나

 
  19
  버스길로 떨어진 까치알 느티나무 아래서 손 흔들며 버스 세운다


  20
  봄비야 네 집이 예서 가까우냐 오늘밤 곁에서 하루 묵으면 안 되
겠니


  21
  석천암 늦가뭄 산더덕 향 대청마루처럼 뻗어나가는 매미울음소

 

 

 

-계간『문학과 사회』(2010년 가을호) 
-웹진 시인광장 선정『2011 올해의 좋은 시 100選』(아인북스,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