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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상병 - 약속 / 새 / 귀천 -주일(主日) / 나의 가난은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13. 7. 6. 1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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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시 100주년 문학과지성사에서 출판한 한국문학선집에 수록된 시 4편)

 


약속


천상병

 

 

한 그루의 나무도 없이
서러운 길 위에서
무엇으로 내가 서 있는가


새로운 길도 아닌
먼 길
이 길은 가도가도 황토길인데


노을과 같이
내일과 같이
필연코 내가 무엇을 기다리고 있다.

 

 

 

(『새』. 조광출판사. 1968 : 『천상병 전집』. 평민사.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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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상병

 


외롭게 살다 외롭게 죽을
내 영혼의 빈 터에
새날이 와, 새가 울고 꽃잎 필 때는,
내가 죽는 날
그 다음 날.


산다는 것과
아름다운 것과
사랑한다는 것과의 노래가
한창인 때에
나는 도랑과 나뭇가지에 앉은
한 마리 새.


정감에 그득찬 계절,
슬픔과 기쁨의 주일,
알고 모르고 잊고 하는 사이에
새여 너는
낡은 목청을 뽑아라.


살아서
좋은 일도 있었다고
나쁜 일도 있었다고
그렇게 우는 한 마리 새.

 

 

 

(『새』. 조광출판사. 1968 : 『천상병 전집』. 평민사.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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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천
-주일(主日)


천상병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며는,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귀천』.살림 .1989 :『천상병 전집』. 평민사.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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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가난은


천상병

 

 

오늘 아침은 다소 행복하다고 생각는 것은

한 잔 커피와 갑 속의 두둑한 담배,

해장을 하고도 버스 값이 남았다는 것.

 

오늘 아침을 다소 서럽다고 생각는 것은

잔돈 몇 푼에 조금도 부족이 없어도

내일 아침 일도 걱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가난은 내 직업이지만

비쳐오는 이 햇빛에 떳떳할 수가 있는 것은

이 햇빛에도 예금통장은 없을 테니까……

 

나의 과거와 미래

사랑하는 내 아들딸들아,

내 무덤가 무성한 풀섶으로 때론 와서

괴로왔음 그런대로 산 인생, 여기 잠들다, 라고,

씽씽 바람 불어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미래사. 1991 : 『천상병 전집』. 평민사. 1996)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문학과지성사,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