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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한모 - 바람 속에서 / 나비의 여행 / 어머니 6 / 아버지는 횡단(橫斷)하고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13. 7. 8.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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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시 100주년 문학과지성사에서 출판한 한국문학선집에 수록된 시 4편)

 

 

바람 속에서

 

정한모

 

 

1. 내 가슴 위에

 

바람은
발기발기 찢어진
기폭


어두운 산정에서
하늘 높은 곳에서


비정하게 휘날리다가
절규하다가


지금은
그 남루의 자락으로
땅을 쓸며
경사진 나의 밤을
거슬러 오른다


소리는
창밖을
지나는데

그 허허한 자락은 때묻은
이불이 되어
내 가슴
위에
싸늘히
앉힌다

 

2. 남루한 기폭


  바람은 산모퉁이 우물 속 잔잔한 수면에 서린 아침 안개를 걷어 올리면서 일어났을 것이다
  대숲에 깃드는 마지막 한 마리 참새의 깃을 따라 잠들고 새벽이슬 잠 포근한 아가의 가는 숨결 위에 첫마디 입을 여는 참새소리 같은 청청한 것으로 하여 깨어났을 것이다


  처마 밑에서 제비의 비상처럼 날아온 날신한 놈과 숲 속에서 빠져나온 다람쥐 같은 재빠른 놈과 깊은 산골짝 동굴에서 부스스 몸을 털고 일어나온 짐승 같은 놈들이 웅성웅성 모여서 그러나 언제든 하나의 체온과 하나의 방향과 하나의 의지만을 생명하면서 나뭇가지에 더운 입김으로 꽃을 피우고 머루 넝쿨에 머루를 익게 하고 은행잎 물들이는 가을을 실어온다 솔잎에선 솔잎소리 갈대숲에선 갈대잎소리로 울며 나무에선 나무소리 쇠에선 쇠소리로 음향하면서 무너진 벽을 지나 무너진 포대 어두운 묘지를 지나서 골목을 돌고 도시의 지붕들을 넘어서 들에 나가 들의 마음으로 펄럭이고 산에 올라 산처럼 오연히 포효하면 고함소리는 하늘에 솟고 노호는 탄도(彈道)를 따라 날은다
  그 우람한 자락으로 하늘을 덮고 들판에서 또한 산정에서 몰아치고 부딪쳐 부서지던 그 분노와 격정의 포효가 지나간 뒤 무엇이 남아 있는가
  다시 푸른 하늘뿐 외연한 산악일 뿐 바다일 뿐 지평일 뿐 그리하여 어두운 처마 밑 기어드는 남루한 기폭일 뿐


  바람이여
  새벽 이슬잠 포근한 아가의 고운 숨결 위에 첫마디 입을 여는 참새소리 같은 청정한 것으로 하여 깨어나고 대숲에 깃드는 마지막 한 마리 참새의 깃을 따라 잠드는 그런 있음으로만 너를 있게 하라
  산모퉁이 우물 속 잔잔한 수면에 서린 아침 안개를 걷으며 일어나는 그런 바람 속에서만 너는 있어라

 

 

 

(『카오스의 사족』. 범조사. 1958 : 『정한모 시전집』. 포엠토피아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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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의 여행


정한모

 

 

아가는 밤마다 길을 떠난다
하늘하늘 밤의 어둠을 흔들면서
수면의 강을 건너
빛 뿌리는 기억의 들판을
출렁이는 내일의 바다를 나르다가
깜깜한 절벽
헤어날 수 없는 미로에 부딪치곤
까무라쳐 돌아온다.


한 장 검은 표지(表紙)를 열고 들어서면
아비규환하는 화약 냄새 소용돌이
전쟁은 언제나 거기서 그냥 타고
연자색 안개의 베일 속
파란 공포의 강물은 발길을 끊어 버리고
사랑은 날아가는 파랑새
해후는 언제나 엇갈리는 초조
그리움은 꿈에서도 잡히지 않는다.


꿈길에서 지금 막 돌아와
꿈의 이슬에 촉촉이 젖은 나래를
내 팔 안에서 기진맥진 접는
아가야
오늘은 어느 사나운 골짜기에서
공포의 독수리를 만나
소스라쳐 돌아왔느냐.

 

 

 

(『아가의 방』. 문원사. 1970 : 『정한모 시전집』. 포엠토피아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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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6


정한모

 

 

어머니는
눈물로
진주를 만드신다


그 동그란 광택(光澤)의 씨를
아들들의 가슴에
심어 주신다.


씨앗은
아들들의 가슴 속에서
벅찬 자랑
젖어드는 그리움
때로는 저린 아픔으로 자라나
드디어 눈이 부신
진주가 된다
태양이 된다


검은 손이여
암흑이 광명을 몰아내듯이
눈부신 태양을
빛을 잃은 진주로
진주를 다시 쓰린 눈물로
눈물을 아예 맹물로 만들려는
검은 손이여 사라져라


어머니는
오늘도
어둠 속에서
조용히
눈물로
진주를 만드신다.

 

 

 

(『새벽』. 일지사. 1975 :『정한모 시전집』. 포엠토피아.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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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횡단(橫斷)하고


정한모

 

 

문은
온 종일 기다림에서 산다


참새 소리와 더불어 나간 영이며 숙이의 란드셀이며
아버지의 코오트 자락이 아물거리는
햇빛같은 환한 기다림 속에
노래 부르는 영어의 입이 있고
흐르는 거리, 아버지가 횡단하고


오늘도
두려움과 미소 사이에 서서
기다리는 문


문이 닫힌다는 것은
기다림이 끝난다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하루의 결론이냐


닫힌 문이 어둠 속에 가라앉고
하루의 이야기며
숙이의 책이며
잠드는 숨결들이
따뜻이 피어오르는 잠


닫힌 창들만이 숨 쉬는
바람이 몰려가는 낯설은 골목을 나는 가고
어둠 속 지금도 열려 있을 나의 문
내가 버려둔 먼 나의 문엔
바람이 몰아치는 것일까

 

 


(『카오스의 사족』. 범조사. 1958 : 『정한모 시전집』. 포엠토피아 2001)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문학과지성사,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