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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양희 - 직소포에 들다 / 내 마음의 수수밭 / 몽산포 / 추월산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13. 7. 10. 0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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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시 100주년 문학과지성사에서 출판한 한국문학선집에 수록된 시 4편)

 

 


직소포에 들다


천양희

 


폭포소리가 산을 깨운다 산꿩이 놀라 뛰어오르고
물방울이 툭, 떨어진다
오솔길이 몰래 환해진다.


와! 귀에 익은 명창의 판소리 완창이로구나.


관음산 정상이 바로 눈앞인데
이곳이 정상이라는 생각이 든다
피안이 이렇게 가깝다
백색 정토(淨土)! 나는 늘 꿈꾸어왔다


무소유로 날아간 무소새들
직소포의 하얀 물방울들, 하얀 수궁(水宮)을.


폭포소리가 계곡을 일으킨다. 천둥소리 같은
우레 같은 기립박수소리 같은 ― 바위들이 흔들한다


하늘이 바로 눈앞인데
이곳이 무한천공이란 생각이 든다
여기 와서 보니
피안이 이렇게 좋다


나는 다시 배운다
절창(絶唱)의 한 대목, 그의 완창을.
 

 

 

(『마음의 수수밭』창비.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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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수수밭

 

천양희

 


마음이 또 수수밭을 지난다.머위잎 몇장 더 얹어
뒤란으로 간다. 저녁만큼 저문 것이 여기 또 있다
개밥바라기별이
내 눈보다 먼저 땅을 들여다본다
세상을 내려놓고는 길 한쪽도 볼 수 없다
논둑길 너머 길 끝에는 보리밭이 있고
보릿고개를 넘은 세월이 있다
바람은 자꾸 등짝을 때리고, 절골의
그림자는 암처럼 깊다. 나는
몇 번 머리를 흔들고 산 속의 산, 산 위의
산을 본다. 산을 올려다보아야
한다는 걸 이제야 알았다. 저기 저
하늘의 자리는 싱싱하게 푸르다.
푸른 것들이 어깨를 툭 친다. 올라가라고
그래야 한다고. 나를 부추기는 솔바람 속에서
내 막막함도 올라간다. 번쩍 제정신이 든다.
정신이 들 때마다 우짖는 내 속의 목탁새들
나를 깨운다. 이 세상에 없는 길을
만들 수가 없다. 산 옆구리를 끼고
절벽을 오르니, 천불산(千佛山)이
몸속에 들어와 앉는다.
내 맘속 수수밭이 환해진다.

 


 

(『마음의 수수밭』.창작과비평사.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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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산포

 

천양희

 

 

마음이 늦게 포구에 가 닿는다
언제 내 몸 속에 들어와 흔들리는 해송들
바다에 웬 몽산(夢山)이 있냐고 중얼거린다
내가 그 근처에 머물 때는
세상을 가르켜 푸르다 하였으나
기억은 왜 기억만큼 믿을 것이 없게 하고
꿈은 또 왜 꿈으로만 끝나는가
여기까지 와서 나는 다시 몽롱해진다
생각은 때로 해변의 구석까지 붙잡기도 하고
하류로 가는 길을 지우기도 하지만
살아 있어, 깊은 물소리 듣지 못한다면
어떤 생(生)이 저 파도를 밀어가겠는가
헐렁해진 해안선이 나를 당긴다
두근거리며 나는 수평선 쪽으로 발길을 돌린다
부풀었던 돛들, 붉은 게들 밀물처럼 빠져나가고
이제 몽산은 없다. 없으므로
갯벌조차 천천히 발자국을 거둔다.

 

 

 

(『오래된 골목』.창비.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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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월산


  천양희

 


   바람이 먼저 능선을 넘었습니다 능선 아래 계곡 깊고 바위들은 오래 묵묵합니다 속 깊은 저것이 모성일까요 온갖 잡새들, 잡풀들, 피라미떼들 몰려 있습니다 어린 꽃들 함께 깔깔거리고 버들치들 여울 타고 찰랑댑니다 회화나무 그늘에 잠시 머뭅니다 누구나 머물다 떠나갑니다. 사람들은 자꾸 올라가고 물소리는 자꾸 내려갑니다 내려가는 것이 저렇게 태연합니다 무등(無等)한 것이 저 것밖에 더 있겠습니까 누가 세울 수 있을까요 저 무량수궁 오늘은 물소리가 더 절창입니다 응달 쪽에서 자란 나무들이 큰 제목 된다고. 우선 한소절 불러젓힙니다 자연처럼 자연스런 세상에서 살고 싶습니다 나는 저물기 전에 해탈교를 건너야 합니다 그걸 건넌다고 해탈할까요 바람새 날아가다 길을 바꿉니다 도리천 가는 길 너무 멀고 하늘은 넓으나 공터가 아닙니다 무심코 하늘 한번 오려다봅니다 마음이 또 구름을 잡았다 놓습니다 산이 험한 듯 내가 가파릅니다 이속(離俗)고개 다 넘고서야 겨울 추월산에 듭니다

 

 


(『오래된 골목』.창비. 1998)
―최동호 신범순 정과리 이광호 엮음『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선집 1900∼2000』 (문학과지성사,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