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톡 좋은 시 263
봄/이성부
기다리지 않아도 오고 기다림마저 잃었을 때에도 너는 온다. 어디 뻘밭 구석이거나 썩은 물웅덩이 같은 데를 기웃거리다가 한눈 좀 팔고, 싸움도 한 판 하고, 지쳐 나자빠져 있다가 다급한 사연 듣고 달려간 바람이 흔들어 깨우면 눈 부비며 너는 더디게 온다. 더디게 더디게 마침내 올 것이 온다. 너를 보면 눈부셔 일어나 맞이할 수가 없다. 입을 열어 외치지만 소리는 굳어 나는 아무것도 미리 알릴 수가 없다. 가까스로 두 팔을 벌려 껴안아 보는 너, 먼 데서 이기고 돌아온 사람아.
―김희보 엮음『한국의 명시』(가람기획 증보판, 2003) |
산수유, 새앙나무, 벚나무, 살구나무, 진달래, 매화는 이미 꽃을 피웠고 모과나무, 조팝나무, 수수꽃다리는 잎을 뾰죽이 내밀고 있습니다. 하지만 나라꽃인 무궁화, 궁중의 꽃이라는 능소화, 참나무, 감나무, 단풍나무는 다급한 바람이 사연을 전해주어도 여전히 혼곤한 잠에서 깨어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아엠엠프 때부터 벌어진 현상이기는 하나 주민등록만 남겨놓은 비거주자가 많습니다. 실제 그곳에 살지도 않으면서 주민등록만 남겨놓은 사람들입니다. 살던 곳에서 이사를 가고 전입신고를 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이사하면서 전출을 하지 못하는 것은 부도를 맞았거나 대출과 사채를 쓰고 도저히 갚을 길이 없어 금융사나 사채업자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할 수 없이 전입신고를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뿌리를 내리고 못하고 공중에 붕 떠 있습니다. 나라는 나라대로, 교회는 교회대로, 사찰은 사찰대로, 봉사단체는 봉사단체대로 한다고 하지만 생색만 내고 공치사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경제적 불황과 고유가 속에서 소외계층을 돕기 위한 기부금 액수는 오히려 늘어났다고 합니다. 십시일반으로 소액기부자가 많아졌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모두다 애써 힘들게 벌었는데 강제로 내어놓으라고 하면은 심기가 불편합니다. 고욤나무가 겨우내내 작은 열매를 잔뜩 매달고 있습니다. 봄이 오자 새들에게 육보시를 하고 있습니다.
얼음이 두껍게 얼어도 오는 봄을 늦출 수만 있을 뿐 막을 수는 없습니다. 파산자가 되어 노숙자가 되어 동가숙서가식하면서 떠도는 이도 있지만 대부분은 어디에선가 열심을 일을 하고 있는 그들은 돌아올 것입니다. 산수유, 생강나무, 진달래가 이기고 돌아왔듯이, 모과나무, 라일락, 조팝나무가 이기고 돌아오고 있듯이, 무궁화, 능소화, 단풍나무, 감나무 그들도 이기고 돌아올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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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성부
기다리지 않아도 오고
기다림마저 잃었을 때에도 너는 온다.
어디 뻘밭 구석이거나
썩은 물웅덩이 같은 데를 기웃거리다가
한눈 좀 팔고, 싸움도 한 판 하고,
지쳐 나자빠져 있다가
다급한 사연 듣고 달려간 바람이
흔들어 깨우면
눈 부비며 너는 더디게 온다.
더디게 더디게 마침내 올 것이 온다.
너를 보면 눈부셔
일어나 맞이할 수가 없다.
입을 열어 외치지만 소리는 굳어
나는 아무것도 미리 알릴 수가 없다.
가까스로 두 팔을 벌려 껴안아 보는
너, 먼 데서 이기고 돌아온 사람아.
―시집 『우리들의 양식』 (민음사, 1974)
―김희보 엮음『한국의 명시』(가람기획 증보판, 2003)
―일간『현대시 100년 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詩 100/50』(조선일보 연재, 2008)
―시선집『자연 속에서 읽는 한 편의 시 05』(국립공원,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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