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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한 슬픔/강연호 - 카톡 좋은 시 272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16. 4. 15. 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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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톡 좋은 시 272



건강한 슬픔


강연호

 

그녀로부터 전화가 왔다

오랜만이라는 안부를 건넬 틈도 없이

그녀는 문득 울음을 터뜨렸고 나는 그저 침묵했다

한때 그녀가 꿈꾸었던 사람이 있었다 나는 아니었다

나도 그때 한 여자를 원했었다 그녀는 아니었다

그 정도 아는 사이였던 그녀와 나는

그 정도 사이였기에 오래 연락이 없었다

아무 데도 가지 않았는데도 서로 멀리 있었다

전화 저쪽에서 그녀는 오래 울었다

이쪽에서 나는 늦도록 침묵했다

창문 밖에서 귓바퀴를 쫑긋 세운 나뭇잎들이

머리통을 맞댄 채 수군거리고 있었다

그럴 때 나뭇잎은 나뭇잎끼리 참 내밀해 보였다

저렇게 귀 기울인 나뭇잎과 나뭇잎 사이로

바람과 강물과 세월이 흘러가는 것이리라

그녀의 울음과 내 침묵 사이로도

바람과 강물과 세월은 또 흘러갈 것이었다

그동안을 견딘다는 것에 대해

그녀와 나는 무척 긴 얘기를 나눈 것 같았다

아니 그녀나 나나 아무 얘기도 없이

다만 나뭇잎과 나뭇잎처럼 귀 기울였을 뿐이었다

분명한 사실은 그녀가 나보다는 건강하다는 것

누군가에게 스스럼없이 울음을 건넬 수 있다는 것

슬픔에도 건강이 있다

그녀는 이윽고 전화를 끊었다

그제서야 나는 혼자 깊숙이 울었다

  


 

시집 기억의 못갖춘마디(문예중앙, 2012)




  건강한 슬픔


  강연호

 

  그녀로부터 전화가 왔다

  오랜만이라는 안부를 건넬 틈도 없이

  그녀는 문득 울음을 터뜨렸고 나는 그저 침묵했다

  한때 그녀가 꿈꾸었던 사람이 있었다 나는 아니었다

  나도 그때 한 여자를 원했었다 그녀는 아니었다

  그 정도 아는 사이였던 그녀와 나는

  그 정도 사이였기에 오래 연락이 없었다

  아무 데도 가지 않았는데도 서로 멀리 있었다

  전화 저쪽에서 그녀는 오래 울었다

  이쪽에서 나는 늦도록 침묵했다

  창문 밖에서 귓바퀴를 쫑긋 세운 나뭇잎들이

  머리통을 맞댄 채 수군거리고 있었다

  그럴 때 나뭇잎은 나뭇잎끼리 참 내밀해 보였다

  저렇게 귀 기울인 나뭇잎과 나뭇잎 사이로

  바람과 강물과 세월이 흘러가는 것이리라

  그녀의 울음과 내 침묵 사이로도

  바람과 강물과 세월은 또 흘러갈 것이었다

  그동안을 견딘다는 것에 대해

  그녀와 나는 무척 긴 얘기를 나눈 것 같았다

  아니 그녀나 나나 아무 얘기도 없이

  다만 나뭇잎과 나뭇잎처럼 귀 기울였을 뿐이었다

  분명한 사실은 그녀가 나보다는 건강하다는 것

  누군가에게 스스럼없이 울음을 건넬 수 있다는 것

  슬픔에도 건강이 있다

  그녀는 이윽고 전화를 끊었다

  그제서야 나는 혼자 깊숙이 울었다

  


 

  ―시집 기억의 못갖춘마디(문예중앙,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