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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있는 아침] 저녁 한때
[출처: 중앙일보] [시가 있는 아침] 저녁 한때
저녁 한때
-임길택(1952~97)
-임길택(1952~97)
뒤뜰 어둠 속에
나뭇짐을 부려 놓고
아버지가 돌아오셨을 때
어머니는 무 한 쪽을 예쁘게 깎아 내셨다.
말할 힘조차 없는지
무 쪽을 받아 든 채
아궁이 앞에 털썩 주저앉으시는데
환히 드러난 아버지 이마에
흘러 난 진땀 마르지 않고 있었다.
어두워진 산길에서
후들거리는 발끝걸음으로
어둠길 가늠하셨겠지.
불 타는 소리
물 끓는 소리
다시 이어지는 어머니의 도마질 소리
그 모든 소리들 한데 어울려
아버지를 감싸고 있었다.
묵묵히 견디는 아버지의 진땀에, 무 한 쪽을 예쁘게 깎아 내는 어머니의 슬기로움에, 아궁이의 불소리, 물 끓는 소리, 도마질 소리가 이루는 저 애달픈 ‘저녁 한때’에 하늘과 땅의 돌봄이 있기를! 나라의 존망이 바깥사람들 손에서 오고 가는 이상한 판국이지만, 그럴수록 우리 그리움의 본바탕 쪽이 간절해진다. 이 속수무책의 무능을 언제까지 대물림해야 하나. 시 속 어린 목소리의 어른스러운 눈과 마음이 새삼 아프다. 시인은 탄광과 농촌 지역에서 오래 어린이를 가르쳤던 사람. 그의 시들은 슬픔과 선량함의 갈피에 따뜻한 낙관을 불씨처럼 묻어 두고 있다.
<김사인·시인·동덕여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출처: 중앙일보] [시가 있는 아침] 저녁 한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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