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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시 한 편 읽기 36 -내가 아버지의 첫사랑이었을 때/천수호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17. 5. 18. 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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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시 한 편 읽기 36 -내가 아버지의 첫사랑이었을 때/천수호>



  인지장애란 기억력, 주의력, 언어능력, 시공간능력과 판단력 등이 저하된 상태를 말한다고 한다. 정도가 아주 경미한 경우에서 심한 경우까지 다양하다고 하며 인지기능장애가 심해 일상생활이나 사회생활에 지장을 주는 경우를 치매라고 한다고 한다. 반면에 동일 연령대에 비해 인지기능, 특히 기억력이 떨어져 있으나 일상생활을 수행하는 능력은 보존되어 있어 아직은 치매라고 할 정도로 심하지 않은 상태의 경우를 경도인지장애라고 한다. 경도인지장애를 정상노화와 치매의 중간단계라고 하는데 언제든지 치매로 진행이 될 수 있다고 한다.

 

  경찰청 통계에 따르면 2014년 치매환자의 실종신고 건수가 8,27건으로 매년 증가 추세에 있다고 한다. 또 보험공단에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2020 년에는 치매환자 수가 79 4000명에 달할 거라고 한다. 십년 후인 2030년에는 100만 명을 넘을 거라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통계에 의한 추정치일 뿐 통계에 잡히지 않는 드러나지 않는 환자들이 더 있을 것이다. 인생의 황혼기, 아니 황금기에 자식들 다 바람에 날려 보내고 가신의 인생이 돌아왔지만 사랑하는 아내는 물론 자식까지 알아보지 못하는 이 슬픈 현실을 딸자식인 화자는 받아들이기 어렵다.

 

  게다가 다섯 딸 중 자신의 이름조차 기억 못하고 제일 먼저 지워진 연유에 대해 유심히 볼수록 붉은 피가 난다고 한다. 어찌 붉은 피만 났을까. 먼저 아버지의 기억에서 사라진 화자는 그래서 불보다 더 서러웠을 것이다. 딸이었을 때의 미소를 거두고 아버지 연인이 되어 바라보는 눈길에는 연민이 그득하다. 아들에게 있어 엄마가 최초의 연인이라면 아버지의 마지막 연인은 딸이 아니었을까.


내가 아버지의 첫사랑이었을 때/천수호

  

아버지는 다섯 딸 중

나를 먼저 지우셨다

 

아버지께 나는 이름도 못 익힌 산열매

 

대충 보고 지나칠 때도 있었고

아주 유심히 들여다 볼 때도 있었다

 

지나칠 때보다

유심히 눌러볼 때 더 붉은 피가 났다

 

씨가 굵은 열매처럼 허연 고름을 불룩 터뜨리며

아버지보다 내가 곱절 아팠다

 

아버지의 실실한 미소는 행복해 보였지만

아버지의 파란 동공 속에서 나는 파르르 떠는 첫 연인

 

내게 전에 없이 따뜻한 손 내밀며

당신, 이제 당신 집으로 돌아가요, 라고 짧게 결별을 알릴 때

 

나는 가장 쓸쓸한 애인이 되어

 

내가 딸이었을 때의 미소를 버리고

아버지 연인이었던 눈길로

 

아버지 마지막 손을 놓는다  

 

시집우울은 허밍(문학동네,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