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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노트 -독거/안현미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18. 7. 4. 0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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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거


     안현미(安賢美) 




  일요일은 동굴처럼 깊다 압력밥솥에서 압력이 빠지는 소리를 베토벤 5번 교향곡 운명만큼 좋아한다 그 소리는 흩어진 식구들을 부르는 음악 같다 일요일은 음악 같다 십자가는 날개 같다 천사의 날개 고난 버전 같은 십자가 아래 누군가 깨지지도 않은 거울을 내다 버렸다 교회에 가듯 그 거울 속에 가서 한참을 회개하다 돌아왔다 의문에 휩싸였다 풀려난 사람처럼 일요일은 아파도 좋았다 크게 잘살지도 못했지만 크게 잘못 살지도 않을 것이다 비록 지갑엔 천원 밖에 없고 깊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삭제 당했지만 자꾸 자꾸 회개하고 싶은 일요일 압력 빠진 압력밥솥처럼 푸근한 일요일 세상천지 어디 한 곳 압력을 행사할 데가 없는 이 삶이 고맙다고 기도하는 일요일 거꾸로 읽어도 일요일은 일요일 그래서 자꾸 거꾸로 읽고 싶은 일요일 무료도 유료도 아닌 일요일 사랑할 수는 있었지만 사랑을 초과할 수는 없었던 인생을 헌금 바구니처럼 들고 있던 우리의



계간 『시로 여는 세상 2016년 봄호




   세상 무구를 대표할 만하던 소녀가 분명 있었다. 여름성경학교라는 말을 좋아했고 예수와 부처를 사모했다. 사모하는 일로도 봄, 여름, 가을, 겨울은 음악처럼 흘러갔고 가마솥에 지은 밥은 따뜻하고 누룽지는 고소했다.



  회에 다닌 적 있다. 여름성경학교라는 말을 좋아했고 차트에 그려진 찬송가를 따라 부르는 세상 무구를 대표할 만하던 소녀가 있었다. 날개를 장착한다면 천사라고 불러도 무방했을 소녀가 분명 있었다.

  절을 찾아다닌 적 있다.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고,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여라’. 언젠가 부처를 죽이겠다고 식칼을 든 적도 있다. 크게 잘못한 일로 기억하고 있다.

 

  세상 무구를 대표할 만하던 소녀가 분명 있었다. 여름성경학교라는 말을 좋아했고 예수와 부처를 사모했다. 사모하는 일로도 봄, 여름, 가을, 겨울은 음악처럼 흘러갔고 가마솥에 지은 밥은 따뜻하고 누룽지는 고소했다. 식구들은 뿔뿔이 흩어졌지만 술 잘 빚는 할머니가 있었고 여래 같은 상을 지닌 할아버지가 있었다. 최소한 1인 가족은 아니었다.

 

  의원을 만나러 가는 길 골목에서 동네 바보 여자를 만났다. 딱히 내게 하는 소리는 아니었는데 “이렇게 날이 좋은데 비가 온다고? 허! 누굴 바보로 아는 건가?” 라고. 머리통에 침을 꽂고 그 바보 여자의 ‘허!’를 생각한다. 압력밥솥의 압력 빠지는 소리를 닮은. ‘許’ 같기도 하고 ‘虛’ 같기도 한. 머리통에 침을 꽂고 생각한다. 세상천지 어디 한 곳 압력을 행사할 데가 없는, 원수를 용서할 수는 있었지만 사랑할 수는 없었던, 예수도 부처도 아닌 이 삶이 고맙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