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말, ≪언어의 줄다리기≫라는 책을 낸 덕분에 다양한 매체에서 인터뷰를 하게 되었다. 한 잡지와 인터뷰를 했을 때의 일이다. 평소에 잘 알고 지내던 분이 객원 기자의 자격으로 사진 기자와 함께 인터뷰를 하고 싶다며 필자의 연구실을 찾았다. 책의 서평을 다른 매체에 기고도 했고 친분도 있는 사이여서 인터뷰는 내내 즐겁고 유쾌했다.
시간이 지나 잡지가 나올 즈음, 사진 기자가 문자를 보내 주었다. “인터뷰 기사가 곧 이렇게 실리게 됩니다.”라는 문자와 함께 기사를 보내 준 것이다. 그런데 보내 준 기사를 읽고는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글을 읽기가 무섭게 기자에게 전화를 했다. 혹시 기사의 내용을 수정할 수 있는지 묻기 위해서였다.
기자는 난감해 하며 이미 윤전기가 돌고 있다고, 무슨 문제가 있냐고 되물었다. 필자가 한 말로 되어 있는 부분에 ‘한국어’라고 표현되어야 할 것이 ‘한글’로 표현되어 있어서 꼭 고쳤으면 한다고 답했다. 물론, ‘이미 늦은 것 같으니 어쩔 수는 없겠지만….’이라는 체념 섞인 말과 함께.
기자는 처음에 무엇이 문제인지 이해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잠깐의 설명을 들은 후 화들짝 놀라며 자신이 ‘한글’과 ‘한국어’를 혼동하고 있는 줄도 몰랐다고 부끄럽다고 했다. 지면으로 나간 것은 인쇄 중이라 고칠 수가 없지만, 온라인판에는 내용을 수정하겠다며 미안하다는 말을 수차례 반복했다. 그리고는 어떻게 자신이 그 오랜 시간 동안 ‘한글’과 ‘한국어’를 혼동하고 있었는지 이해할 수 없다며 자책 아닌 자책을 했다.
기자의 혼동 덕분에 필자는 ‘한글’과 ‘한국어’를 구분하지 못하는 국어학자가 되었다. 강의 시간 중에 종종 학생들에게 둘을 혼동하면 안 된다고 자주 강조하던 사람이 말이다.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필자의 인터뷰 기사가 실린 호의 표지 모델이 방탄소년단 멤버 중 한 명이었던 탓에 잡지는 이례적인 부수의 추가 인쇄에 들어갔고 전 세계로 팔려 나갔다고 한다.
한글날, 세종대왕은 지하에서 통곡하실까?
‘한글’과 ‘한국어’를 혼동하는 일은 비단 그 기자만의 문제는 아니다. 한글날 관련 보도를 보면 한글과 한국어를 혼동하는 기자들을 어렵지 않게 만나게 된다. 전문가가 기고한 칼럼에서조차도 한글은 문자가 아니라 언어로 둔갑한다. 심지어 이 둘을 혼동한 채로 학생들을 가르치는 국어 교사 역시 심심치 않게 만나기도 한다.
또, 한글날 즈음이면 자주 이런 말을 듣게 된다. “세종대왕이 우리에게 만들어 준 우리말을 잘 가꾸고 다듬어야 한다.”, “외래어, 신조어, 유행어, 외계어 등이 범람하는 세태를 보고 한글날 세종대왕이 지하에서 통곡을 할 것이다.” 아주 오래 전부터 익숙하게 들어 왔던 탓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내용을 의심하지 않는다. 이런 말을 한 사람들은 대체로 권위가 있는 사람들이었고, 그 사람들의 권위를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조금만 생각하면 이런 혼동이 얼마나 어이없는 일인가 헛웃음이 날 것이다. 세종대왕이 우리에게 만들어 준 것은 ‘한국어’가 아니라 ‘한글’이다. 세종대왕 이전부터 한국어가 존재했다는 것을 모르지 않건만, 한글을 한국어와 혼동한 결과 이런 말을 하게 되는 것이다.
또, 한글날 세종대왕은 지하에서 절대 통곡할 리가 없다. 통곡하기는커녕, 오히려 자신이 만든 문자가 이렇게 대대적으로 사용되고 있고, 그것을 기리며 다양한 행사가 이루어지고 있으니 얼마나 즐거워하실까? 세종대왕은 한글날 지하에서 웃고 계실 것이다. 또, 외래어, 신조어, 유행어, 외계어 등은 한글 파괴범이 아니다. 한국어 사용자들 사이의 소통을 가로막는 언어적 현상이라고 할 수는 있을지언정, 한글을 파괴하는 일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올해 한글날에도 ‘한글’과 ‘한국어’를 구분하지 못하는 기사와 보도를 여럿 보고 들었다. 심지어 한글날을 기념해 열린 한 행사의 인사말에서도 그런 표현을 들을 수 있었다. 한글날마다 듣게 되는 상투적이고 표피적인 ‘한글’ 찬양, 그리고 이날 전파를 타고 퍼지는 ‘한글’과 ‘한국어’의 혼동은 한국어를 연구하는 필자의 마음을 쓸쓸하게 한다.
어디 한글날뿐인가? 우리는 ‘영문 홈페이지’에 대응하는 명칭이 ‘한글 홈페이지’인 경우를 일상적으로 목격한다.
거리마다 있는 현금자동입출금기(소위 ATM기)의 화면에서도 우리는 ‘한국어’ 안내 대신 ‘한글’ 안내를 만난다. 또한, 외국어 문서를 한국어로 번역하는 일을 ‘한글화’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영어권 사용자들에게 ‘영어’ 안내가 필요하다면 한국어 사용 자들에게는 ‘한국어’ 안내가 필요하다. 영어가 로마자를 문자로 사용한다고 영어 사용자들에게 제공하는 안내를 ‘로마자’ 안내라고 하지 않는 것처럼 한국어가 한글을 문자로 사용한다고 한국어 사용자들에게 제공하는 안내를 ‘한글’ 안내라고 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한국어를 영어로 번역하는 일이 ‘로마자화’가 아닌 것처럼 영어를 한국어로 번역하는 일은 ‘한글화’가 아니다. 이렇게 조금만 생각하면 문자와 언어의 혼동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일인지 금방 깨닫게 된다.
또한, 우리는 자주 ‘한글 이름’, ‘한글 단어’와 같은 표현을 만나기도 한다. 사실, 우리가 ‘한글 이름’ 혹은 ‘한글 단어’를 통해 표현하고자 하는 것은 한글로 쓸 수 있는 단어인가 아닌가가 아니다. 한국 사람의 이름은 모두 한글로 쓸 수 있고, 한국어의 단어들은 당연히 한글로 쓸 수 있으니 말이다. 한글 이름이 표현하고자 하는 것은 대응되는 한자가 없는 고유어 이름이고, 한글 단어가 표현하고자 하는 바는 단어의 기원이 한자어나 외래어처럼 외래의 것이 아니라 한국어 본래의 것인 고유어이다. 그러니 한글 이름과 한글 단어는 각각 고유어 이름과 고유어라고 부르는 것이 맞다.
한글과 한국어를 혼동하게 된 배경
그런데 어쩌다 우리는 ‘한글’과 ‘한국어’를 혼동하게 되었을까?
일제 강점기 동안 ‘한글’은 우리 고유의 글자 그 이상의 상징성을 갖게 되었다. ‘한글’은 ‘우리의 글자’라는 의미를 넘어, 우리의 언어, 우리의 정신, 그리고 우리가 지켜야 할 우리의 모든 것을 상징하게 된 것이다. 지금 많은 사람들이 ‘한글’과 ‘한국어’를 혼동하게 된 것은 바로 이러한 배경의 영향이라고 할 수 있다.
한글의 이러한 상징성은 한국어를 연구하는 사람을 ‘한글 학자’가 되게 하였다. 그래서 이 한글 학자들의 모임은 ‘한글 학회’가 되었고, 그 학회가 펴내는 학술 잡지는 ≪한글≫이 되었다. 이 시기 ‘한글’은 단순히 한국어를 적는 고유한 문자에 대한 이름이 아니었다. 문자의 이름 그 이상의 엄청난 상징성을 지닌 명칭이 된 것이다. 해외에 있는 한국어 학교가 ‘한글 학교’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된다.
일제 강점기 ‘한글’을 지키고자 노력한 이들의 노력 덕분에 일제의 탄압 속에서도,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우리의 말글살이는 잘 이어질 수 있었다. 하지만 일반적인 한국어 사용자들로 하여금 문자인 ‘한글’과 언어인 ‘한국어’를 혼동하게 만들었고 ‘한글’에 대한 정확한 지식에 기반한 이해보다는 독단적인 신념을 갖게 만드는 부작용을 낳았다.
이제 더 이상 우리는 한글과 한국어를 혼동해서는 안 된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한글 지킴이’라는 틀에서 벗어나야 한다. 한글은 이미 우리 선조들에 의해 지켜졌으니 지킴이는 이제 필요하지 않다. 대한민국에서 한국어를 한글로 적는 일에 문제를 제기하거나 한글의 사용을 탄압하는 일은 결코 벌어지지 않을 것이니 말이다. 우리가 앞으로 더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은 ‘한글’이 아니라 ‘한국어’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한국어는 지키는 대상이 아니라 가꾸는 대상이라는 점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글: 신지영(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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