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읽기·우리말·문학자료>/우리 말♠문학 자료♠작가 대담

우리말, 그리고사람 -우리말 땅이름도 지켜야 할 역사입니다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19. 11. 15. 09:02
728x90
우리말, 그리고 사람
우리말, 그리고 사람

 이기봉 학예연구사가 땅이름을 검토하며 슬쩍이라도 본 땅이름은 30만 개가 넘는다. 그 많은 땅이름을 들여다보고 정리하는 동안 그를 가장 괴롭혔던 것은 우리가 궁금해하지 않고 부르지 않아 사라진 우리말 땅이름을 향한 미안함. 그 마음은 우리말 땅이름을 되살리고 싶다는 바람이 됐다.

사라진 땅이름에 한없이 미안해

 이기봉 학예연구사는 옛 땅이름에 관심이 크다. 관심은 그가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에서 고지도를 누리집에 올리는 일을 담당하며 시작됐다. 그는 국립중앙도서관 고서전문원으로 자리를 옮기고 나서 서울, 경기도,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강원도의 옛 땅이름을 정리한 《고지도를 통해 본 지명 연구》 총 9권을 편찬했다. 한글학회가 1960년대부터 펴낸 《한국지명총람》(총 20권)과 일제가 만든 《조선지지자료》에서 옛 땅이름을 찾아 현재 땅이름과 비교해 정리했다.

 “한글학회에서 만든 《한국지명총람》이 없었다면 결코 이 책들을 완성하지 못했을 거예요. 비교적 자세하게 우리나라의 옛 땅이름이 정리되어 있어 지명 연구서를 편찬하는 데 큰 도움이 됐어요.”

▲ 올해 완간한 《고지도를 통해 본 지명 연구》

 1998년부터 올해까지 20년이 넘도록 줄곧 땅이름을 정리해 왔으니 이 정도면 숙명이라 불러도 이상하지 않다. 혹시 특별히 기억에 남거나 애착이 가는 땅이름이 있을까?

 “그렇지는 않아요. 100여 년 사이 전국에서 사라져 버린 땅이름 이 다 애틋합니다. 그 많은 이름들을 정리하는 동안 미안한 마음이 점점 커졌어요. 도저히 손 놓고 있을 수가 없어서 또 책을 썼습니다. 우리의 문화가 담긴 땅이름을 방치해 둔 것 같아 미안했습니다. 그 마음을 조금이라도 털어 내고 싶었거든요.”

 그는 지난 2016년 개인 저서인 《슬픈 우리 땅이름》을 펴냈다.

 옛 땅이름 중 우리말 땅이름들을 살핀 이 책의 이름으로 출판사에서는 ‘그리운’을 밀었지만, 그는 사라진 우리말 땅이름 앞에서는 ‘슬픈’ 감정이 절절하여 이 제목을 고집했다. 책에는 땅이름 속에 파묻혀 지낸 오랜 시간 동안 느낀 점과 땅이름에 대한 기대를 촘촘히 새겼다.

100년 전에는 어떻게 불렀을까?

 이기봉 연구사는 사라진 우리말 땅이름에 왜 그 자신이 그토록 슬픔을 느끼는지 들려주었다.

 “서울 송파구에 백제 때의 거대한 유적인 풍납토성이 있죠. 과거에는 ‘바람드리’라고 불렸던 곳인데요, ‘바람이 잘 부는 들’이란 뜻이지요. 이름만 들어도 동네의 특징이 가늠되죠? 이를 한자 바람 風(풍) 자와 들일 納(납) 자를 써서 風納(풍납)이라 표기했는데, 언젠가부터 행정리1)의 이름을 표기한 한자를 그대로 읽어 ‘풍납’이라 부르기 시작했어요. 그리 부르니 이곳이 바람이 잘 부는 들이란 것을 더 이상 알아차릴 수가 없게 됐죠. 본래 땅이름이란 그곳에 살던 사람들의 입말로 전해 오는 것인데, 이를 무시하고 표기된 한자의 소리로만 읽다 보니 원래 땅이름에 깃들어 있던 뜻을 알 수 없게 되어 너무 안타깝습니다.” 1) 행정리: 행정 단위의 하나

 전라도에는 1900년대까지 ‘숲실’, ‘소구섬’, ‘푸르리’ 등 우리말로 불리던 마을이 있었다. 100여 년이 훌쩍 지난 지금은 이곳을 어떻게 부를까? 안타깝게도 어여쁜 우리말 땅이름은 모두 사라졌다. 숲실은 임곡동(林谷洞), 소구섬은 우이도(牛耳島), 푸르리는 초촌리(草村里)로 표기하고 한자어로 부르고 있다.
 그는 국립중앙도서관의 주소지인 서울시 서초구의 옛 이름도 소개했다.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사람들은 서초라고 하지 않고 ‘서리풀이’라는 우리말 이름으로 불렀어요. ‘서리풀이’에서 ‘서’는 瑞(상서 서) 자에서 소리를 빌리고, 풀은 草(풀 초) 자에서 뜻을 빌려, 서리풀이를 瑞草(서초)라고 표기했습니다. 현재 서초구에 서리풀공원이 있는데요, 옛날에 쓰던 우리말 땅이름이 되살아난 좋은 사례예요.”

일본인들이 마음대로 바꿨다는 오해

 그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그 많던 우리말 땅이름이 사라져 버린 이유가 궁금해졌다. 이기봉 연구사에 따르면 현재는 봉화 ‘닭실마을’, 안동 ‘내앞마을’ 등을 제외하면 우리말 땅이름은 거의 사라져 버렸다. 그 지역의 특성을 짐작하기에 쉽고 부르기도 편한 우리말을 두고 왜 어려운 한자 이름이 그 자리를 차지했을까?

 “흔히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일부러 우리말 땅이름을 없애고 한자식으로 바꿨다고 생각하는데요, 이미 조선 시대부터 그랬어요. 일본인들이 살던 소수 지역에만 일본식 땅이름을 붙였습니다. 물론 해방 후에는 일본식 땅이름을 모두 바꿔 버렸어요. 그런 이유보다는 일제 강점기 이후 학교에 가는 아이들이 많아지고 한자를 읽을 수 있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우리말 이름이, 한자의 소리 이름에 밀려났습니다. 한자의 뜻을 빌려 표기했어도 소리로 읽는 한자 읽기 습관 때문이지요.”

 그는 태어난 땅에서 평생 사는 것이 일반적이던 과거와 달리, 산업화를 거치며 고향을 떠나 도시로 이주하는 사람들이 늘어난 것을 또 다른 이유로 꼽았다. 고향의 우리말 땅이름은 알고 있어도, 타지에서는 그곳 토박이들이 쓰는 땅이름이 아니라 한자의 소리에 따라 만들어진 행정 지명에 금방 익숙해지기 때문이다.

 이기봉 연구사는 모든 행정 지명을 우리말로 바꿀 수 없겠지만, 2014년부터 시행한 도로명 주소 제도를 보면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도로명 주소 제도를 시행할 때는 ‘오랫동안 입에 익은 말을 왜 바꾸느냐’라고 하며 반대가 심했지요. 그런데 몇 년이 지난 지금은 제법 익숙해졌지요. 도로명 주소 덕분에 부활한 우리말 땅이름도 있어요. 앞에서 말한 송파구 풍납동 곳곳에 ‘바람드리길’이란 이름이 붙었어요. 이런 좋은 사례를 본받아서 특히 새로 생기는 지명에는 우리말 이름을 붙였으면 좋겠어요.”

독도? 원래 이름은 독섬!

 고지도 지명 연구를 해 온 학자로서 이기봉 연구사가 가장 바라는 것은 무엇일까? 바로 울릉도에 있는 마을이나 섬 이름을 우리말로 쓰는 것이다. 예를 들면 울릉읍 죽도길을 댓섬길로, 서면 구암길을 굴바우길로, 북면 현포길을 가문짝지길로 바꾸자는 것이다. 독도와 관련해 영토 문제가 있는 만큼 옛 우리말 이름을 최대한 되살리자는 이야기다.

 “과거에는 독도를 ‘독섬’이라고 부르고, 한자의 뜻과 소리를 빌려 獨島(독도)나 石島(석도)라고 표기했습니다. 그런데 일본의 일부 학자들은 옛날 우리 조상들이 부르던 독섬의 한자 표기가 獨島(독도)라는 것을 사실이 아닌 주장으로 여깁니다.

▲ 독섬의 모습

 울릉도 옆에 한자 표기로 竹島(죽도)라는 섬이 있는데, 이곳 토박이들은 ‘댓섬’(대섬)이라고 부릅니다. 댓섬(대섬)과 竹島(죽도)가 동일한 대상을 가리키는 것처럼 독섬과 獨島(독도)도 같은 섬입니다.”

 그는 학자들만이라도 옛 울릉도 관련 자료에 나오는 獨島(독도)와 石島(석도)를 인용할 때 조상들이 부르던 우리말 이름대로 ‘獨島[독섬] 혹은 石島[독섬]’으로 표기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한자는 그대로 표기하되 옛 이름이 독섬이었다는 사실은 함께 밝혀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다음 세대를 위한 준비이기도 하다. 앞으로도 계속될 가능성이 높은 독도 영토 분쟁에서 독도가 우리 땅이라는 근거를 알리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언젠가는 ‘독도’라는 이름도 옛날 사람들이 부르던 우리말 이름인 ‘독섬’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말이다.

 “제 자녀 세대들은 우리말 땅이름을 거의 모릅니다. 지금 쓰고 있는, 표기된 한자 소리에 따라 만들어진 행정 지명만 알죠. 우리말 땅이름도 우리 역사입니다. 이해하기 쉽고 부르기도 편한 우리말 땅이름을 후대에게 물려줘야 할 의무가 있지 않을까요? 이름에는 생명이 있어요. 처음에는 어색할지 몰라도 자꾸 부르다 보면 우리말 땅이름이 익숙해질 것입니다.”

글: 정성민
사진: 김장현, 국립중앙도서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