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시에서 드러난 형이상시의 사례 / 최규철
『형이상시학』 창간호에서
최 규 철(시인, 문학평론가)
형이상시는 17세기 영국의 존 던을 위시로 한 일군의 시인들이 지적 복합성을 응축된 이미지로 승화시키고, 사상도 감각적인 체험으로 수용함으로써 시적 변용을 꾀한, 즉 이성과 감성, 지성과 감각을 융화시킨 시인의 통합된 감수성으로 쓴 시를 말한다. T.S.엘리엇은 그의 엣세이 〈형이상파 시인들 The Metaphysical Poets〉(1921)에서 형이상시인들은 사상과 감정의 융화를 이루었지만 반면 그 후대의 시인들은 감수성의 분열 때문에 그러한 융화를 이루지 못하고 지적이거나 정서적인 측면을 강조하는 반쪽 작품밖에 만들어내지 못했다고 했다. 이런 엘리엇의 비평을 계기로 20세기에 들어와서 즉물시와 관념시를 포괄한 형이상시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졌고 나가서는 현대시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17세기 영국의 대표적인 형이상시인으로는 존 던 외에 조지 허버트, 앤드루 마블, 헨리 본, 존 클리블랜드, 리처드 크래쇼, 에이브러햄 카울리 등이 있다.
형이상시의 특징 중에서 가장 중요한 특징은 위트(wit)가 담긴 기상(conceit)인데 이것은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런 유사성이 없는 두 개의 개념이나 이미지를 서로 연계시킴으로써 정교한 조화를 이루는, 논리적이고도 분석적인 기발한 wit를 가진 비유이다. 18세기의 비평가이자 시인이었던 사무엘 존슨(Samuel Johnsom)은 〈카울리의 생애〉에서 형이상시인들의 위트(wit)를 일종의 ‘부조화의 조화(discordia concors)’로 보았다, 이것은 상이한 개념과 이미지들을 폭력적으로 결합으로써 총체적인 조화를 이루는 시수사법상의 은유란 뜻이다. 또한 이런 기상천외한 비유는 구체적인 이미지와 추상적인 관념, 사상과 감정, 이성과 감성, 영혼과 육체, 광명과 흑암, 천국과 지옥 등의 양극화를 나란히 병치시킴으로써 더욱 형이상시의 기상(conceit)에 의한 서로 잡아당기는 긴장을 고조시키는 효과를 가져왔다.
그리고 형이상시인들의 시어는 정서의 지적 등가물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정서 유발적인 표현이 아닌, 생경한 언어였고 서로 연상 작용이 쉽지 않은 상업, 과학, 신학, 지리, 연금술 등의 용어들을 더 즐겨 썼다, 다시 말하자면 감정을 표현하기보다는 분석하고 어떤 목적에 대한 화자의 의도를 논리적으로 전개하는 경향과 정교한 심리분석의 특색을 지녔다. 압축된 생략구문을 사용함으로써 의미의 탄력과 밀도가 생기고 집약적인 표현과 스트릭션이 있는 긴장으로 차있다. 그 외에도 패러독스, 아이러니, 그리고 대화체와 극적인 모놀로구, 산문체의 리듬 등이 있다.
위에서 말한 형이상시의 특징을 살펴볼 때 형이상시는 17세기 서유럽의 문학 운동의 하나이었던 격정적이고 역동적이며 반고전적인 경향을 띈 바로크 문학의 알환으로 보는 관점이 옳다. 바로크 문학도 현실과 이상, 삶과 죽음의 문제, 절대자 앞에서의 성별된 삶과 세속적인 삶 등의 상반된 상황을 조화하러는 시도가 두드러지고 패러독스, 극적 효과, 긴장, 감정표출의 감각화 등에 이르기까지 형이상시의 기법과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다.
『우리 한국현대시에서 형이상시가 있느냐』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한 마디로 말해서 『형이상시 운동의 사레는 없었지만 형이상시는 존재했다.』라고는 말 할 수 있다. 이 말은 시인 자신이 알게 모르게 형시상시를 더러 쓰는 일은 있었지만 누군가가 형이상시 운동을 전개했던 적은 전무했다는 말이다. 이것은 우리나라 시문학에서 형이상시에 대한 이론의 보편화가 이루어지지 못해 왔다고 하는 결론이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많은 시인들의 시 가운데 탁월한 형이상시가 엄연히 존재하고 있기는 했지만 지금까지 아무도 그 시를 형이상시로 인정하고 평가하고 조명해준 평자는 전혀 없었다는 것이다.
한국시단에 형이상시가 존재할 수 있게 된 것은 1930년대 이후 한국현대시가 모더니즘 운동을 전개하면서 부지 중게 영미 신비평이론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일반적으로 언급되고 있는 영비 신비평의 아홉 가지 특징으로는 ① 통합적 감수성(T.S.엘리엇), ② 객관적 상관물(T.S.엘리엇), ③ 몰개성이론(T.S.엘리엇), ④ 포괄의 시론(I.A.리처즈), ⑤ 형이상시 ⑥ 긴장(A. 테잍트), ⑦ 의도의 오류(W.K.윔샛과 M.C.비어즐리), ⑧ 감동의 오류 (W.K.윔샛과 M.C.비어즐리), ⑨ 시의 이해(클리언스 부룩스와 R.P.워런) 등이 있는데 그 중에서 많은 부분이 형이상시와 직.간접으로 그 맥을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연유로 신비평주의의 영향을 받은 시인들의 시가 형이상시의 기법에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더욱이 유의해야 할 것은 T.S.엘리엇을 비롯한 신비평의 이론가들이 감성적 인식과 이성적 인식을 포괄한 형이상시를 최고의 시로 인정했다는 점이다. 동시에 우리나라 시인들의 시 중에서도 그 시인이 쓴 최고의 시가 바로 형이상시의 기법으로 된 시가 많다는 것이다.
실제로 오늘날 우리나라 시에서도 현대시가 요구하는 가장 큰 함축성과 압축된 생략 구문, 거기다가 팽팽한 텐션이 있고 그 시인의 지성과 감성이 통합적 감수성에 의해서 융화된 형이상시가 그 시인의 시 중에서 최고의 시임을 알 수 있다. 윤동주 『또 다른 고향』, 한용운의 『찬송』, 김현승의『절대신앙』. 『눈물』, 『가을』, 서정주의 『국화 옆에서』, 『내가 돌이 되면』, 김윤성「불.빛.말」, 김춘수의 『나의 하나님』, 『꽃』, 문덕수의 『언어와 꽃』, 이형기의 『폭포』, 『첨예한 달』, 허영자의 「얼음과 불꽃」, 박진환의 『가을 이미지』, 오세영의 『모순의 그릇』 등이 바로 그것이다.
그 중에서 몇 편의 예시를 들어 소개하겠다.
고향(故鄕)에 돌아온 날 밤에
내 백골(白骨)이 따라와 한 방에 누웠다.
어둔 방은 우주(宇宙)로 통하고
하늘에선가 소리처럼 바람이 불어온다.
어둠 속에서 곱게 풍화작용(風化作用)하는
백골(白骨)을 들여다 보며
눈물 짓는 것이 내가 우는 것이냐
백골(白骨)이 우는 것이냐
아름다운 혼이 우는 것이냐
지조(志操) 높은 개는
밤을 새워 어둠을 짖는다.
어둠을 짖는 개는
나를 쫓는 것일 게다.
가자 가자
쫓기우는 사람처럼 가자.
백골(白骨) 몰래
아름다운 또 다른 고향(故鄕)에 가자.
- 윤동주의 『또 다른 고향 전문』-
이 시는 일제의 탄압에 항거하여 독립운동의 꿈이 실현되지 못하자 스스로의 자책감에서 오는 내면세계의 갈등과 분열을 노래한 작품이다. 일제 강점기의 칠흑 같은 밤, 잠시 고향집에 돌아와 어둔 방에 누어있으면서 현실의 나와 또 다른 나(백골). 현실의 고향과 또 다른 고향(이상향, 천국) 사이에서 고민하는 분열된 자아의 갈등구조를 보여준다. 4-5연 『지조(志操) 높은 개는 / 밤을 새워 어둠을 짖는다.// 어둠을 짖는 개는 / 나를 쫓는 것일 게다』에서는 지조 높은 개를 통해서 스스로 유토피아의 실현을 위한 결단의 의지를 나타낸다. 그래서 6연애서는 『가자 가자 . 쫓기우는 사람처럼 가자. / 백골(白骨) 몰래 / 아름다운 또 다른 고향(故鄕)에 가자.』라 했다.
일제하의 캄캄한 암흑기의 한계상황 속에서 민족적 지조를 살리지 못하고 죽어있는 자아의 모습을 고향집에 돌아온 날 밤 어둔 방에 누워있는 자신의 모습으로 비유하면서, 마치 칠흑 같은 무덤에 누워서 풍화작용으로 뼈가 산화되아 가고 있는 이미지로 잇대어 생각함으로써 일종의 기발한 wit가 있는 컨시트로 발전시켰다. 이것은 일제의 탄압 아래서 자신의 절개를 지키지 못하고 고향에 돌아와 누어있는 어둔 방을 그와는 아주 동떨어지고 외견상 무관한 무덤으로 비유한 일종의『부조와의 조화』이다.
이 시는 특히 나라고 하는 시적 자아 속에 민족적 양심이 죽어있는 자아(백골)와 살아있는 자아(아릅다운 혼). 지조가 없는 나와 지조가 있는 개, 닫친 현실세계(어둔 방)와 열린 이상세계(우주, 하늘), 지상에 있는 죽은 자의 고향과 하늘에 있는 산자의 또 다른 고향, 광명한 하늘에서 들리는 바람소리와 캄캄한 밤에 어둠속에서 들리는 개 짖는 소리 등, 시인의 현실세계와 이상세계와의 양극화로 상호 대응체계를 이루게 함으로써 여기에서 발생하는 강한 시적 긴장이 있다. 이런 긴장은 시인의 내면세계에서 일어나는 자아분열을 다시 통합적 자아로 결합하려고 하는 데서 오는 힘이다. 특히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두 자아로 대치된 인격적인 분열의 심리학적 현상과 뼈의 풍화작용으로 표현된 인간 소멸의 형이상학적인 경험을 이런 지적 등가물로 소화시킴으로써 내면세계의 갈등을 구상화시키는 데 성공을 거둔 형이상시이다.
6연의 마지박 부분에서 『백골(白骨) 몰래 / 아름다운 또 다른 고향(故鄕)에 가자.』는 죽음이란 영혼과 육체가 분리되는 것이라고 하는 플라톤의 이분설(二分說)을 상기시키게 하는 대목이다. 즉 육체는 흙이니 땅으로 돌아가 묻히고 영혼은 천국의 본향으로 돌아간다는 진리를 내포하고 있다. 다시 말하자면 이 시는 이원론적인 인생의 구조체계가 또 다른 고향이라고 하는 이상향을 추구함으로써 보다 새로운 세계로 비상하려고 하는 강한 소망이 있다. 김현승의 시중에서도 여러 편의 형이상시가 눈에 띈다.
봄은
가까운 땅에서
숨결과 같이 일더니,
가을은
머나먼 하늘에서
차가운 물결과 같이 밀려온다.
꽃잎을 이겨
살을 빚던 봄과는 달리,
별을 생각으로 깎고 다듬어
가을은
내 마음의 보석(寶石)을 만든다.
눈동자 먼 봄이라면,
입술을 다문 가을.
봄은 언어 가운데서
네 노래를 고르더니,
가을은 네 노래를 헤치고
내 언어의 뼈마디를
이 고요한 밤에 고른다.
-김현승의 『가 을』전문-
이 시는 결실의 가을에 대한 깊고 싸늘한 상념을 봄의 가볍고 따스함으로 대비시킴으로써 가을을 사색하는 시인의 내면세계에 투영된 그 인격의 고매한 성숙도를 보여주고 있다. 봄은 화려하고 온유하며 생동감이 있는 이미지로 표현되어 있고 가을은 차갑고 견고한 결실의 이미지로 함축시키고 있다.
이것은 인간적으로는 영혼과 육체(3연), 이성과 감성(1-2), 시간적으로는 영원과 찰나(3연). 공간적으로는 하늘과 땅, 가까운 것과 먼 것(1-2연). 감각적으로는 차가운 것과 따스한 것(1-2), 부드러운 것과 단단한 것(3연). 의미상으로는 언어의 살과 언어의 뼈대(5연) 등, 봄과 가을로 대비된 시인 자신의 실존 의미를 여러 가지 이미지의 합성작업을 통해서 그의 심오한 형이상학적인 철학과 신앙을 감각적으로 구체화시켰다. 뿐 아니라 또한 시인의 탁월한 통합적 감수성으로 소화시킨 작품이라 하겠다.
특히 3연에서 봄에 대해서는 살과 같은 육체의 연약함을 나타냈는가 하면 가을에 대해서는 견고한 영혼의 보석으로 비유함으로써 육체의 유한성과 영혼의 무한성을 지닌 인간의 양면성을 보여주고 있다. 더욱이 3연 하반의 『별을 생각으로 깎고 다듬어 / 가을은 / 내 마음의 보석(寶石)을 만든다.』에서는 가을이 시인의 사색을 통해서 하늘의 별을 깎고 다듬어 마음의 보석(寶石)으로 만들어지는, 그런 영원한 가치추구 속에 고고한 시인의 에스프리가 살아있고 또한 봄과 가을의 여러 가지 이미지의 합성화 경험으로 터득한 지시적인 외연과 암시적인 내포 사이에서 야기되는 이 시의 긴장이 촘촘히 엉켜있음을 알 수 있다
더욱이 가을 이미지를 별을 깎고 다듬은 단단하고 영원한 가치의 보석으로 표출해낸 것은 하나의 폭력적인 결합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은 결실을 의미하는 가을이미지를 보석이라고 하는 그와 아주 동떨어진 객관적 상관물을 통해서 즉물적인 가을의 결실을 정신적인 가치인 마음의 보석으로 결합시킨 것은 기발한 wit가 담긴 컨시트의 전범이라 본다. 여기에는 육체의 노동으로 밭을 갈고 씨를 뿌리고 가꾸고 걷어드리는 물질적인 가을의 수확을, 그와는 사뭇 다르게 마음으로 깎고 다듬고 빛을 거두는 일종의 정신적인 보석을 상호 대조시킴으로써 이질성 속에서 유사성을 찾는 컨시트의 부조화의 조화를 이루고 있다. 여기에서 영원한 인생의 가치창출에 대한 개념을 농사기술과 보석연마기술 등의 지적 등가물로 시적 병용을 성립시킨 점도 이 시가 형이상시의 모양새를 갖춘 시란 점을 보여준다.
4연의 『눈동자 먼 봄이라면, / 입술을 다문 가을.』은 엄청난 압축된 생략구문의 대표적인 케이스이다. 여기에 따르는 놀라운 함축성도 내포하고 있다. 근시안적이고 시야가 좁은 눈먼 봄처럼 성숙하지 못한 인생과는 상반되게 모든 것을 다 터득하고 머리 숙여 가을 결실을 묵묵히 묵상하는 인간 내면의 넉넉함이 시 전체의 흐름을 커버하고 있다. 이런 형이상시가 갖는 경제적 언어구사의 효과는 시의 무한한 함축성과 응집력을 더하게 하고 시를 단단한 보석으로 만든다. 김현승 시의 전면에 담아있는 시의 결구력과 완성도가 바로 이런 압축된 생략시학의 기법에서 추출된 것임을 알게 된다.
이형기의 시 중에서 형이상시의 특징을 담은 시 두어 편을 살펴보겠다.
너는 언제나 한 순간에 전부를 산다.
그리고 또
일시에 전부가 부서져 버린다.
부서짐이 곧 삶의 전부인
너는 모순의 눈보라
그 속엔 하늘을 건너는 다리
무지개가 서 있다.
그러나 너는 꿈에 취하지 않는다.
열띠지도 않는다.
서늘하게 깨어 있는
천 개 만 개의 눈빛을 반짝이면서
다만 허무를 꽃피운다.
오, 분수, 냉담한 정열!
―이형기의「분수」전문-
이 시는 순간에 치솟다가 일시에 떨어져 부서지는 분수의 찰나적인 이미지 속에서 천국의 무지개다리를 냉철한 이성의 눈빛으로 관조하는 시인의 예지의 빛이 번득인다.
1-5행에서 시인은 이 분수에서 순간에 살다가 순간에 사라지는 허무한 인생, 곧 이런 양극성을 모순의 눈보라로 인식하면서 두 개의 상반된 개념과 사물을 결합시킨 컨시트의 기법을 활용했다.
또 6-12행의 『열띠지도 않는다. / 서늘하게 깨어 있는 / 천 개 만 개의 눈빛을 반짝이면서』에서는 냉담과 정열의 상반된 모순 속에서 또 다른 하나의 진리로 통합시키는 시인의 기지가 돋보인다. 서늘하게 깨어 있는 천개 만개의 반짝이는 눈빛이 환상적인 하늘의 무지개다리를 건너면서도 그 꿈에 취하지도 않고 열띠지도 않는다, 이것은 차가운 이성의 눈빛과 뜨거운 감성의 꿈이 하나가 되는 형이상시의 통합적 감수성에서 오는 결실이다.
이런 경지에서 시인은『오, 분수, 냉담한 정열!』이라 탄식한다. 여기서‘냉담한 정열’이란 완벽한 형이상시의 패러독스를 창출해 낸 부분이다. 이 시에는 또 다른 하나의 패러독스가 들어있다. 시적 화자가 순간적으로 솟아오르는 분수의 상승 이미지와 순간적으로 떨어져 부서지는 하강 이미지를 모두 삶의 전부라고 본 점이다. 즉 순간적으로 솟아오르는 것이 곧 순간적으로 떨어져 부서지는 것이라고 하는, 그런 서로 다른 모순된 개념 속에서 하나의 진리로 귀착하게 하는 존재론적인 의미의 패러독스를 발견하게 된다. 거기에서 양극간의 역학적인 관계로부터 촉발되는 긴장이 발생되는 것이다. 이런 역설의 기능에서 유발되는 시어의 가능성은 대단하다. 그래서 『시어(詩語)를 역설의 연어』로 규정한 크리언스 브룩스(Cleanth Brooks)는 역설을 『시작 과정에서 오는 상반된 이미지나 개념이 하나로 수용되는 일종의 시수사법상의 기법으로』 간주하고 『시인이 언급하고 있는 진리는 분명히 역설을 통해서만 가능하다』했다.
이형기 시의 이성과 감성을 통합하는 감수성과 논리적이며 분석적인 사물에 대한 이런 지적 인식이 그가 즐겨 구사하는 패러독스와 아이러니에서 더욱 형이상시의 냉담한 정열을 불태우고 있다.
하느님은 오늘밤 톱질을 한다
사르륵 사르륵
실톱으로 켜는 나의 갈비뼈
피 한 방울 흐르지 않고
하얀 톱밥
그 미세한 뼛가루가 떨어진다
하느님은 이따금 일손을 멈추고
안경을 고쳐 쓴다
훅 하고 톱밥을 블어낸다
갑자기 날개를 푸드덕거리는
甫美産 吸血박쥐의 목마름
하느님은 손으로 입을 가리고
밭은기침을 한다
이제는 늙어 피가 마른 하느님
잠도 없는 하느님
그래서 오늘밤은
나의 갈비뼈나 썰고 있는 하느님
아 알겠다
들판이 들판 위에 넘어져 죽어 있는
새벽마다의 서리
그 허연 白痴風景을 이제는 알겠다
-이형기의 『白痴風景』전문-
이 시는 이형기 시 중에서도 난해한 시 중의 하나이다. 혈관에 피 한 방울 돌지 않은 고갈된 시적 화자의 생체를 하느님이 실톱으로 갈비뼈를 톱질하면서 서서히 그 목숨을 잠식해 간다. 톱밥처럼 쌓인 미세한 뼛가루를 훅하고 불어 삶의 잔재조차도 흔적 없이 날려버림으로써 소모해가는 인간생명의 허무함을 실감하게 한다. 더욱이 인간이 의지해오던 절대적 존재인 신까지도 유한된 인간의 모습으로 전락되여 밭은기침을 하고 피가 말라가는 절망적인 상황에 이른다. 거기다가 신과 인간이 함께 피가 마름으로써 남미산 흡혈박쥐마저도 흡혈이 불가능하여 살인적인 목마름으로 죽어가는 처절헌 현실세계를 리얼리티하게 묘사하기도 했다. 신과 악마와 인간이 함께 파멸해 가는 한계상황 속에서 또한 모든 삶의 터전인 들판마저 생태계의 파괴로 죽어가면서 새벽마다 뼛가루 같은 흰 서리로 쌓여가고 있다, 화자는 이런 극단적인 상황을 죽음, 파멸, 허무, 좌절, 전율 등의 세기말적인 언어표현으로써 총체적인 종말론적 증후현상을 나타내 보이고 있다.
1-6행에서『하느님은 오늘밤 톱질을 한다 / 사르륵 사르륵 / 실톱으로 켜는 나의 갈비뼈 / 피 한 방울 흐르지 않고 / 하얀 톱밥 / 그 미세한 뼛가루가 떨어진다』
이 시의 가장 중요 포인트는 갈비뼈를 톱질하여 쌓인 뼛가루를 하얀 톱밥으로 비유한 부분이다. 뼛가루라고 하는 점차로 죽어가는 소모적인 이미지와 하얀 톱밥이라고 하는 생산작인(나무를 썰어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이미지와의 양극화 현상을 상호 대조함으로써, 이런 인간 생명의 허무함이 그와 상반된 이미지와 폭력적으로 결합한 일종의 절묘한 콘시트라 할 수 있다. 그 외에도 이 시의 여러 군데서 컨시트의 기법을 보여 주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점점 죽어가는 삶의 모습을 『실톱으로 켜는 나의 갈비뼈』로, 흔적 없이 사라지는 삶의 발자취에 대한 허무함을 『훅 하고 톱밥을 블어낸다.』로, 또한 단말마적인 악마의 생태를 『甫美産 吸血박쥐의 목마름』등으로, 형이상학적 개념을 그와 동떨어진 이미지로 연계시킨 기발한 wit가 있다. 또 『그 허연 白痴風景을 이제는 알겠다』라고 한 마지막 행은 바로 바보스런 상황 판단의 결여를 표현한 말인데『이제는 알겠다』라고 하는 백치의 독백이 아이러니컬한 형이상시의 기법을 보여주기도 한다.
다음에는 깨어져서 완성되는 그릇을 다룬 오세영의 시 중에서 형이상시를 예로 들어보겠다.
흙이 되기 위하여
흙으로 빚어진 그릇
언제인가 접시는
깨진다.
생애의 영광을 잔치하는
순간에
바싹
깨지는 그릇,
인간은 한 번
죽는다.
물로 반죽되고 불에 그슬려서
비로소 살아 있는 흙,
누구나 인간은
한 번쯤 물에 젖고
불에 탄다.
하나의 접시가 되리라.
깨어져서 완성되는
저 절대의 파멸이 있다면
흙이 되기 위하여
흙으로 빚어진
모순의 그릇.
-오세영의 『모순의 흙』전문-
전자에서 보인 이형기의『분수』에서는 부서짐이 곧 삶의 전부라고 하는 『모순의 눈보라』를 볼 수 있었는데 여기서는『흙이 되기 위하여 / 흙으로 빚어진 / 모순의 그릇』이라고 한 『모순의 그릇』의 어떠함을 살펴보기로 한다.
이 시는 물로 반죽하고 불에 구워서 만들어진 그릇처럼 인간도 한 번쯤 물로 반죽하듯 짓이겨지는 고난도 겪으며 불로 달궈지는 연단도 감수해야만 비로소 살아있는 생명의 영광스런 존재의미를 터득하게 된다는 데 주안점을 두고 있다. 3연에서 『물로 반죽되고 불에 그슬려서 / 비로소 살아 있는 흙, / 누구나 인간은 / 한 번쯤 물에 젖고 / 불에 탄다.』가 바로 그런 뜻이다.
그렇지만 이 시의 화자는 인간이 모순의 그릇과 같이 어느 순간에 바싹 깨어지는 절대파멸의 경지에까지 도달해야만 완성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3연에 『하나의 접시가 되리라. / 깨어져서 완성되는 / 저 절대의 파멸이 있다면』이라 했다. 이것은 인간이 완성되어 가는 과정을 그릇이 완성되어가는 과정에 빗대어 물로 반죽하고 불로 구어 만들어진 후에 바싹 깨어지는 절대 파멸의 경지를 거쳐야만 된다고 하는 일종의 메타포이다. 실로 여기에서 인간의 영원하고 고귀한 실존적 가치를 툭하면 바싹 깨어지는 보잘 것 없는 그릇에 비유함으로써 이 두 상반된 양극성을 폭력적으로 융합하여 총체적인 조화를 이룬 컨시트를 만나 보게 된다,
성경에서도 조물주가 흙으로 사람의 형상을 만들어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어 생령이 되게 했다고 하는, 영혼과 육체의 2원론적인 인간형성의 창조원리를 말한다. 그렇다면 인간이 절대자 앞에서 그의 실존적 의미는 무엇인가, 흙으로 만들어 툭하면 바싹 깨지는 그릇과 같은 존재인과 동시에 신의 생기를 받은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는 상반된 모순의 흙이 바로 인간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이 하늘에 속한 자임과 동시에 땅에 속한 자요, 고귀한 존재임과 동시에 보잘 것 없는 존재요, 무한성을 가진 존재임과 동시에 유한성을 가진 존재라는 뜻이다. 이러한 인간 존재의 양면성이 절대의 파멸 앞에서 팽팽한 긴장을 촉발한다. 이런 긴장은 바로‘깨어져서 완성되는 절대의 파멸’, 즉 파멸이 곧 완성이라고 하는 의미의 형이상시의 패러독스에서 발생한다.
또한 접시가 되어 깨지는 ‘절대파멸’의 경험은 흙으로 돌아가기 위한 것임을 마지막 연에서 명시해 주고 있다. 『흙이 되기 위하여 / 흙으로 빚어진 / 모순의 그릇』은 인간의 죽음 앞에서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라고 한 성경에서 그 유사한 보기를 찾아 볼 수 있다. 이것은 흙으로 빚어진 인간의 육신이 돌아갈 결말이 무엇인가를 말해준 사례이다.
특히 이 시에서는 인간 생명의 형성과정과 완성과정을 도자기 제조 기술로 비유하는 지적 인식을 통해서 시로 변용시킨 좋은 형이싱시의 표본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전반적으로 감정을 표현하는 것보다는 분석하는 데 더 중점을 두고 있는 지성작이 형이상시의 기법이 진하게 느껴진다.
이상과 같이 우리나라 시인들의 시 중에서도 형이상시의 특징과 그 기법을 구사하고 있는 시가 더러 많이 눈에 띄고 있다. 그러나 그런 시가 형이상시의 관점에서 평가를 받거나 조명을 받은 시가 별로 많지 않았다. 형이상시가 즉물시와 사물시를 포괄한 제3유형의 완벽한 시요 최고의 시임에도 불구하고 외면 당해온 현실에서 그 많은 현역시인들의 시 중에서 형이상시를 찾아내고 재평가하는 작업이 매우 긴요한 일이라 생각한다. 앞으로 이런 작업을 통해서 우리 시단이 더욱 풍요로워지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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