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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이상시의 특징과 현대적인 이해(2) 최규철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20. 3. 3. 1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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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이상시의 특징과 현대적인 이해(2) 최규철


패러독스를 이용하여 자기의 주장을 더욱 강렬히 분명히 표현했다. 역설은 그 진술 자체가 분명히 모순을 범

하고 있지만 그 자체에 어떤 진리를 내포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수법이다.


시에서 역설의 기능은 단순한 재치나 흥미 유발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시어의 일부를 이루는 기교로써 오류와 진실 간의 긴장을 동시에 담고 있는 것이다.


패러독스의 예를 들면 "소란한 침묵", "고독한 군중", "살아 있는 송장"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요, 죽고자 하면 살 것이라’ 높아지고자 하면 낮아지고 낮아지고자 하면 높아지리라’ ‘눈을 감아라, 그러면 보일 것이다.’ ‘침묵의 소리’


‘달콤한 슬픔’ ‘달콤한 이별’ 등은 모두 모순어법(oxymoron)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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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blog.naver.com/mohock80/140017240852


「물어보고 싶다」에서 ‘형이상시의 특색’ 일부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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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형이상시의 또 하나의 대표적 특정이 순수한 통징(痛懲)이다. 통징은 엄벌을 가하고 징벌한다는 사전적


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순수한 통징은 이런 형벌의 의미보다는 악한 길에서의 회심을 유도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주로 풍자(anegory) 등이 따르기 마련이다.


그러나 통징이 풍자와 다른 점은 풍자의 기능이 헐뜯고 지적하고 폭로하는 데 있다면 순수한 통징은 사회의 부조리에 대하여 암시적으로 개선과 변혁을 유도하게 하려는 기능이다.


조규화는 그의 논문 「김현승 시연구」에서 통징에 관하여 언급하기를「통징(蒲懲)은 풍자적 요소와 인접성 내지 상관성을 지닌다. 그것은 풍자가 깎아내리고, 헐뜯고, 꼬집고, 비아냥하고, 비판하고, 고발하는 기능으로 작용하는데, 통징도 속성상 악에 대한 개선의 의도는 본질적으로 비슷하기 때문이다. 통징이 암시적이고 상징적인 수법에 의존되고, 풍자는 그런 의도의 노출이 전진 배치되는 점에서 외양적으로 다소 차이가 있다」고 했다.


특히 현대문명의 자연환경 파괴현상과 물질문명의 결과로 오는 배금주의 사상의 부패성을 통탄하고 통징하는 것은 형이상시가 사회구원의 측면에서 볼 때도 얼마나 시대적 상황에 부응하면서 현실을 깊이 체감하며 쓴 시인가를 알 수 있다. 이런 형이상시의 특성 때문에 형이상학파 시운동은 주로 존던(John Donne)이나 조지 허버트(George Herbert), 앤드류 마블(Andrew Marvell), 헨리 본(Henry Vaughan) 등과 양심을 가진 기독교인들이 다수 참여했다.


 


태초에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


축복의 단지를 곁에 두시고, 말씀하시길,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그에게 주겠노라,


이 세상 여기저기 흩어진 부를


이 한 줌에 다 모으리라."


 


그래서 먼저 힘이 길을 뚫자, 이어서 아름다움,


다음엔 지혜·명예·쾌락이 흘러 들어갔다.


거의 동이 날 무렵, 하나님은 잠시 멈추셨다.


모든 보물 중에 혼자만 남아,


안식이 맨 바닥에 있음을 보시고.


 


그리고 말씀하시기를, "만약 내가


이 보석조차 인간에게 부여한다면,


나보다도 내 선물들을 더 숭배할 것이니,


자연을 지은 하나님 대신, 자연에서 안식할 것이요,


결국 우리 둘 다 패배자가 되리라."


 


"그러므로 다른 축복은 누리나, 늘 목마른 불안에 젖게 하리라.


인간은 풍요롭되 피로에 시달리게 하라. 그리하여 적어도,


선(善)이 그를 인도치 못하면, 피로함이 그를


내 품에 던질 수 있도록."


-조지 허버트, 「도르래」전문-



도르래로 물건을 끌어올릴 경우, 그 물건이 땅바닥에 붙어있을 때의 무게는 재로이지만 그 물건을 끌어올려 가장 높은 목적지점에 올려놓을 때의 무게는 가장 힘든 상태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땅바닥에 잘싹 달라붙어 세속생활에 젖어있을 때가 가장 편안한 삶을 살아갈 때임과 동시에 절대자 하나님과 가장 멀리 떨어져있는 상태이다. 그렇지만 그와 반대로 힘들고 어려운 고난의 세월을 살아갈 때일수록 하나님께 매달리고 의지하는 삶이기 때문에 하나님과 가장 가까이에 있다.


  조지 허버트는 이 시에서 태초에 조물주는 인간을 창조하면서 축복의 단지에 힘과, 아름다움과, 지혜와 명예· 그리고 부와 쾌락 등을 흘러들어가게 했으나 안식만은 넣어주지 않았다고 했다. 그 이유는 인간은 고달픈 삶을 통해서만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와 매달리면서 더욱 경건한 생활을 유지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도르래가 의미하는 형이상시의 순수한 통징임을 알 수 있다


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이 시는 절대자인 하나님에게 가까이 하면서 경건하게 사는 고된 인생과 하나님을 멀리 하면서 저속하게 사는 안일한 인생, 이런 오늘날의 기독교 신앙의 양극화 된 전체적인 현상을 도르래를 통해서 교묘히 결합한 형이상시의 기상을 보여주고 있다.


이 시에서 경건생활과 세속생활의 이질성을 나타내는 형이상학적인 상태를 물리적으로 작동하는 도르래를 통해서 폭력적으로 결합한 기상(Conceit)과, 또한 형이상시의 특징 3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과학적이고 신학적인 의미를 도르래라고 하는 생경한 용어를 인용한 점에서도 이 시가 형이상시의 특징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보다 더욱 대표적인 특징의 하나인 형이상시의 순수한 통징이 위의 예시에서 그 좋은 사례를 볼 수 있다.


 


이상과 같이 형이상시의 특징은 주관적인 개인의 사상이나 감정 등을 객관적 상관물에 이입시켜 표현함으로써 시인 자신의 감정이 조절되고 객관화되어 몰개성의 경지로 끌어올렸고, 그들의 기상적 비유를 통해서 동떨어지고 상반된 세계를 폭력적으로 결합함으로써 추상적이고도 형이상학적인 인식이 감각적인 형태로 구상화하는데 성공을 거두었다. 그리고 순수환 통징을 통해서 인류구원의 목소리를 높이는 기능을 발휘하게 되었다.



♠ 형이상시의 현대적 의미


  형이상시는 17세기 드라이든이 존던의 시가 너무 철학적이라는 비판으로부터 명명된 말이다. 이렇게 형이상시운동이 처음부터 많은 조소와 비난을 받으며 출항했고 17세기 형이상시가 가장 찬란한 꽃을 피웠다가 18세기에 들어와서 극도로 관념적이고 지적이었던 신고전주의와 개인의 감정과 열정을 중시했던 19세기의 낭만주의 사조로 인해서 잠시 매몰되었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와서 그리어슨이 형이상시들을 재수집하고 편집하면서 비로소 다시 빛을 보기 시작했다. 엘리엇, 리처드, 랜슴 보우건 등이 뒤를 이어 앞 다투어 형이상시를 재평가함으로써 21세기에 이르러서는 더욱 형이상시가 큰 각광을 받게 되이다.


어느 시대든지 그 시대에 대두되었던 문예사조는 그 당시에만 반짝 빛을 보다가 매몰되든지, 아니면 새로운 문예사조에 흡수되어지는 것이 상례이지만 17세기의 형이상시만은 20세기에 들어와서 다시 재조명되고 부활하여 21세기에 들어와 더욱 그 찬란한 문학성을 인정받게 된 것은 그만큼 형이상시가 완벽한 시의 기법을 갖추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T.S. 엘리엇은 그의 저서 〈형이상파 시인들 The Metaphysical Poets〉에서 형이상학파 시인들은 사상과 감정의 융화를 이룰 수 있었지만 다음 세대의 시인들은 "감수성의 분열" 때문에 그러한 융화를 이루지 못하고 지적이거나 정서적인 측면을 강조하는 반쪽 작품밖에 만들어내지 못했다고 했다. 즉 그는 ‘형이상학파 시풍을 어떠한 체험도 소화하고 흡수할 수 있는 감수성의 메카니즘’으로 보았고 ‘감성과 지성이 분리된 상태가 아니라 혼연 일체로 만들 수 있는 능력, 통일된 감수성(Unified Sensibility)"을 지녔다고 했다.


우리 한국시가 신시로 출발하기 시작한 1900년 초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지성이냐 감성이냐, 관념이냐 탈관념이냐, 정서냐 감각이냐, 추상화냐 구상화냐, 관념시냐 사물시냐, 모더니즘이냐 포스트모더니즘이냐 등의 제반문제를 가지고 많은 논란이 이어져왔다. 특히 20세기 후반에 들어와서 모더니즘의 시의 결함을 배격하고 포스트모더니즘이 대두되면서 해체시가 확산되어 한국시문학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1931년경에 김기림에 의해서 당시의 낭만주의적 요소를 지양하고 새롭게 탄생된 모더니즘 시는 우리나라에서는 주로 주지주의와 이미지즘 경향의 시를 뜻한다. 모더니즘의 시는 개성보다는 몰개성으로, 의미보다는 이미지, 통일성보다는 단편적 경향으로, 그리고 철저한 언어를 통한 회화성의 추구와, 이미지의 조형성, 이성을 주로 한 합리주의적인 성향이 짙고 자신의 지역성을 초월한 코즈모폴리턴(세계주의자)적 관심을 갖는다. 또 모더니즘은 이분법적 개념인 광명과 흑암, 정신과 물질, 영혼과 육체, 신과 인간, 참과 거짓, 선과 악, 미와 취 등의 양극적인 대립개념으로 사물을 판단하고 그 중 상위계렬에 속한 것만 취하고 하위계열에 속한 것을 버린다.


이런 모더니즘의 결함을 지적하고 일어난 시운동이 포스트모더니즘으로서 정해진 틀을 깨고 자유스러운 특징의 시법을 구사했다. 모더니즘처럼 사물의 상위계열만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하위계열까지도 모두를 받아드리고 소화시키는 기능을 가졌다. 포스트모더니즘 문학의 시조인 자크 데리다의 해체논리에 따라서 모든 것을 해체함으로써 전통적 가치관과 절대적인 진리관을 배제하고 창조적인 가치관과 상대적인 진리관을 가지고 모든 것을 판단하기 때문에 존재에 대한 문제의 정답은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일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존재의 가치를 폭넓게 받아드려 시인의 시야를 넓히고 존재의 의미를 심화시키는 데 많은 공로가 있기는 했으나, 포스트모더니즘 시의 속성이 너무도 많은 것을 해체시킨 나머지 탈중심, 탈규범 탈신성, 털권위, 탈구조, 탈언어(언어 이탈), 거기다 다원주의, 로칼리즘 등의 편향된 속성을 드러냄으로써 역시 2분법적인 한계를 벗어날 수 없었다.


특히 포스트모더니즘이 모더니즘에 나타난 형식의 틀과 이미지와 이미지의 조형으로 인한 응축된 형태를 해체시킴으로써 풀어쓰기시, 대화시, 이야기시, 소설시 등와 같은 산문시로 전향되었다. 이에 대해서 박진환 교수는 그의 저서 「현대시학과 시법」에서 ‘ 실제로 포스트모더니즘을 표방하면서 써서 발표한 시편들을 보면 형식은 훌륭한 산문을 성립시키고 있으나 그 산문 속에 시를 성립시키는 요소는 발견하기 힘든 경우가 많다. 형상의 해체가 시의 존재양식까지 해쳬시켜 버렸다는 느낌을 떨쳐버릴 수가 없는데 이러한 생각이 과연 필자만의 것인지 의구심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고 했다.


이런 점을 감안할 때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모든 장점과 결함까지도 다 보완하고 양극화된 현상을 폭력적으로 결합할 수 있는 시의 기능이 오직 형이상시의 통합적 감수성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통합적 감수성은 사물시와 관념시의 편향성까지도 보충하여 제3유형의 시로 변용하는 기능성을 가졌다. 문덕수 교수는 그의 저서 「오늘의 시작법」에서 ‘30 년대 미국의 비평가인 랜슴은 사물시와 관념시를 비판하고, 바람직한 시로서 형이상시를 내세우고 있다.시가 사물의 이미지만으로 이루어지는 것도 한계가 있고, 관념이나 의지만으로는 편협한 것이 되므로 사물과 관념, 감각과 사상이 통합된 시가 가장 바람직한 시라는 것이다’ 라 헸다. 즉 사물시와 관념시의 한계성과 편협성을 보완하고 결합한 시가 형이상시라는 것이다.


 


박진환 교수도 그의 저서 「21C 시학」에서 ‘21세기의 시가 왜 형이상시어야 하느냐’에 대해서 두 가지 부분으로 나누어 말하기를 ‘ 첫째는 형이상시가 19세기의 시적 본질인 관념이나 사상을 20세기 시의 본질인 사물이나 이미지 일변도의 편향성을 극복, 제 3유형의 시로 제시됐다는 점과 둘째는 20세기 모더니즘 시가 정신적 어둠을 예견하고 그 어둠을 밝히기 위해 빛의 광원을 지성에 찾음으로써 구원일 수 있었듯이, 21세기 시도 시대적 분화 및 핵화가 수반하는 시대적 위기의 요인을 하나의 질서로 결합, 합일, 통일시킴으로써 구원에 값할 수 있다고 믿고 있는 메타피지컬 포위트리의 역할 또한 동궤의 것이란 지적이다.’ 라 했다. 이 말은 형이상시가 첫째는 19세기의 관념시와 20세기이 사물시의 결함을 극복하고 통합할 수 있는 제3유형의 시요, 두 번째는 순수한 통징을 통한 구원의 기능을 가진 시라는 것이다.


전자에서도 언급한바와 같이 형이상시의 이런 기능 때문에 17세기에 잠간 반짝했던 이 시운동이 200여년 만에 다시 부활하여 21세기에 가장 각광받는 시의 모델로 다시 등장하게 된 것이다.


신규호도 그의 논문 「왜 형이상시인가」에서 21세기의 시가 이런 탁월한 시의 가능성을 가진 형이상시임을 간조하면서 ‘모더니즘의 허무주의나 리얼리즘의 현실주의로 어두웠던 20세기를 극복하고, 보다 창조적이고 수준 높은 예술성을 지닌 21세기 시를 창작하고자 고심하는 마당에 한 번 주목해 보아야 한다고 본다.’ 라 했다. 이 말은 극도로 난맥상을 이룬 20세기 한국시의 편협성을 극복하고 새로운 돌파구와 진로를 모색하기 위해서는 21세시의 시는 오직 형이상시라야 한다는 것이다.


그 외에도 21세기에 접어들면서 형이상시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일기 시작한 것은 우리 문단에 가장 비중 있는 시인이며 평론가인 문덕수 교수를 비롯해서 성찬경 박진환 신규호 김지향 홍문표 교수 등 중량급에 속한 시인들이 앞으로의 한국시의 진로가 형이상시에 있음을 앞 다투어 피력하고 이 분야에 대한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영적이고 정신적인 세계를 추구하는 종교인의 생활정서가 형이상학적인 것일 때 객관적 상관물과 정서적 등가물을 통한 형이하학적 세계의 구상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통일된 감수성으로 모든 것을 통합하는 데서만 가능하다. 여기에 형이상시의 절묘한 시의 기능을 찾아볼 수 있다.


앞으로 우리가 시의 선구자적인 사명을 다하기 위해서는 아무거나 먹어도 다 소화시킬 수 있는 잡식동물처럼 이 세상에서 양극화되고 이질화된 모든 것을 수용하여 소화시키고 시로 변용시킬 수 있는 감수성의 소유자가 되어야 한다. 즉 무의미시 속에서 참된 의미를, 탈관념시 속에서 참된 관념을, 초현실 속에서 참 현실의 의미를, 가상세계에서 현실세계의 모든 이미지를. 시인의 경험을 통해서 마음속에 사이버 공간에 저장된 무수한 이미지들을 링크하여 엮어진 집합적인 결합까지도 다 수용하는 폭넓은 통합된 감수성을 가질 필요가 있다.


이것은 17세기에 대두된 형이상시가 20세에 들어와 재조명된 그런 상태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모든 시대에서 완벽하고 영원한 시의 창조적 가치를 보존하고 발전시켜갈 수 있도록 형이상시가 새로운 시운동을 열어가야 할 것이다. 이것은 통합적 감수성을 특징으로 한 형이상시에서만이 가능하다.


 


♠ 맺는 말


 


형이상사가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은 이질적인 양극화를 폭력적으로 통합하고 일체화하는 시의 컨시트와 그 과정에서 발생되는 긴장, 그리고 의미의 탄력성과 밀도가 한데 어울리어 시의 균형 있는 질서를 유지하고 패러독스와 아이러니, 풍자와 순수한 통징으로 시의 구원성을 구현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형이상시가 지성적이면서도 절재 있는 감정처리와 참신한 감각적인 이미지를 통한 구상화를 이루면서 포스트모더니즘이 극복하지 못한 모더니즘의 한계성을 뛰어넘고 관념시와 사물시를 통합한 제3유형의 시의 모텔일 수 있다는 점에서 21세기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갈 시운동이 아닌가 생각된다. 많은 시인들이 뛰어넘지 못한 시의 편향성을 통합된 감수성으로 극복하고 모든 상반되고 이질적인 사물을 결합하고 융화하여 우리 나름대로의 한국적인 형이상시를 개발하고 발전시켜나가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본다. 그렇게 될 때 미래지향적인 시의 전형적인 모델케이스로 새롭게 거듭나면서 생명감 있는 유형의 시로 발전해 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