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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쪽과 능지 - 마당 한구석 그나마 햇빛이 들지 않는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20. 7. 9.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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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쪽과 능지

- 마당 한구석 그나마 햇빛이 들지 않는 {능쪽에} 병풍을 치고 시신을 모셔두었는데 열한시도 되지 않아 마당은 다글다글 햇빛이 끓어오르고 있었다. 《하성란(2008): 그 여름의 수사》 (남한)
- 요새 더 {능지의} 오물통에서 썩으며 돋는 곰팡이처럼 때도 장소도 가리지 않고 나타나는 광고장들이였다. 《리복은(1986): 암운》 (북한)

‘능쪽’은 ‘햇빛이 들지 않는 쪽’을 나타내는 방언이다. 표준어 ‘음지쪽’에 해당하는 말이다. ‘능지(-地)’는 ‘볕이 잘 들지 않는 그늘진 곳’을 가리키는 말로, 표준어 ‘음지(陰地)’와 같다. 아래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양달쪽과 양지쪽’과 ‘응달쪽과 음지쪽’은 표준어와 문화어가 다르지 않다. 그런데 ‘능쪽’과 ‘능지’는 남한에서는 표준어가 아니지만 북한에서는 문화어로 다루어지고 있다. ‘양지짝’과 ‘능달’도 그러하다.

- 태남이는 손수 딸의 관을 짜고 제일 좋은 옷으로 갈아입혀 뒷산 {양지짝에} 고이 묻었다.
《박완서(1990): 미망》 (남한)
- 그렇게 {양지짝에} 엎드려 있으면 스르르 잠이 들어, 마냥 잘것만 같았으나,
진하는 더욱 군모를 눌러쓰고 무슨 생각엔지 잠겨갔다.《김영석(1955), 이청년을 사랑하라》 (북한)
- 쉴참에 농장원들은 {능달이} 든 나무아래에 모여서 오락회를 열었다.《조선말대사전(2017)》
- 매매네는 양지동산에 새집을 짓고 곱슬이네는 {능지}동산에 새집을 지었답니다.
《전병두(1988): 동화언어형상과 감정적 뜻빛갈을 가진 어휘》 (북한)

‘능쪽’, ‘능지’, ‘능달’ 등에서 ‘능’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 그 {냥반} 형님의 거문고도 들어 보고 그 {냥반의} 피리도 들어 봤지요.
{냥반이} 피리에는 귀신이에요. 《홍명희(1939): 임꺽정》

국어에서 ‘ㄹ’은 어두에 올 수 없다는 제약 때문에 ‘량반>냥반>양반’과 같은 변화를 경험하게 된다. 그런데 원래부터 ‘ㅇ’이었는데 이것이 본래 ‘ㄹ’이나 ‘ㄴ’이었을 거라고 오해해서 이 ‘ㅇ’을 ‘ㄹ’이나 ‘ㄴ’으로 고쳐 쓰는 경우가 있다. 언어학에서는 이런 현상을 ‘과도 교정(過度校正)’1)이라고 한다.
‘능지, 능달’ 등의 표기가 나타나게 된 것은 바로 과도 교정의 결과이다. 즉, ‘응지, 응달’의 원형이 ‘능지, 능달’일 것으로 잘못 알고 쓴 것이 널리 퍼지게 된 것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뜻이다. 1) 과도 교정: 일정한 언어 사회에서, 어떤 어형을 규범에 맞게 적으려다가 오히려 부정확한 형태로 고치게 되는 일.《우리말샘》

- 이 지방의 자연지명에서는 아직도 《덜골》(절골), {《낭디말》(양지말)} 같은 방언이 더러 쓰이고 있는데서 그것을 알수 있다.《최완호(1997): 자연지명의 방언을 두고》 (북한)
- 한 농장안에서도 벌이 다르고 비탈진데가 다르며 {능지쪽과} 양지쪽이 다르고 이 골짜기가 다르고 저 골짜기가 다르다.《조영찬(1990): 주체농법을 관철한 보람》 (북한)
- 유독 원술이네 멍멍이는 주인이 노루를 따르고 있는데 신이 나서 무슨 변이 난 듯이 짖어대며 뜨락을 나서고 삼수천을 건너 {능달쪽} 산볼을 향하여 내달리고 있다.《리병수(1981): 붉은 지평선》 (북한)
- 아직도 숲속 {능달지에는} 눈무지가 흰곰처럼 웅크리고 있었다.《감자꽃》 (북한)

위에 제시된 용례들은 모두 북한에서 쓰인 것이다. 아래 표에서도 알 수 있듯이 ‘양지’, ‘음지’와 관련된 어휘들은 남한어에 비해 북한어에서 훨씬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위 표에서 남한의 ‘엄지, 엉지, 움지, 응지’와 북한의 ‘울디, 움디’는 모두 한자어 ‘음지(陰地)’의 변이형들이다. 그리고 북한어에서만 나타나는 ‘남석쪽, 낭석쪽, 남세기, 남쇠기’는 한자어 ‘남석(南夕/南席)’과 관련되어 있는데, ≪조선말대사전≫에서 ‘남석’은 ‘해볕이 잘 드는 남쪽으로 구석진 땅’으로 풀이되어 있다.
‘남쇠기, 남세기’는 ‘남석’에서 변한 ‘남속’에 접사 ‘-이’가 결합된 말인 것으로 보인다. ‘남속+-이>남소기>남쇠기>남세기’와 같은 소리의 변화를 겪은 것이다. ‘백달’은 한자어 ‘백(白)’이 결합된 것으로 보이며, ‘성지’와 ‘승지’는 한자어 ‘상(霜)’이 결합된 것으로 볼 수도 있으나 확실하지는 않다.
요즘 남북 관계가 심상치 않다. 남북 관계가 ‘능지’에서 벗어나 ‘낭지’로 펼쳐졌으면 하는 바람을 이 땅에서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과 함께 나누고 싶을 따름이다.

글: 이길재(겨레말큰사전 남북공동편찬사업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