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읽기·우리말·문학자료>

시 비평 행위의 허무함과 보람 ― 김승일 비판 /이승하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20. 9. 4. 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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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비평 행위의 허무함과 보람

― 김승일 비판

 

이승하

 

 

어느 문학평론가가 사석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한때 우리 문단에서 최고의 논객이었던 백철의 평론을 누가 읽습니까. 한국 문단을 쩌렁쩌렁 호령했던 조연현의 평론을 누가 읽습니까. 연구자들도 그들이 비판했던 작품을 읽지 그들의 평론은 읽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요즘 시를 쓰고 있습니다.”

 

대학 시절, 시를 가르쳤던 노시인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문학평론가는 소의 등에 앉아 있는 파리 같은 존재지. 소가 꼬리로 치면 멀리 날아갔다가 금방 달려드는 귀찮은 존재, 잘난 척하지만 그런 존재지. 절대도 평론가가 될 생각은 하지 말기를 바란다.”

 

문학평론가가 환영을 받지 못하는 것은 일제강점기 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시인들은 평론가와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나누지만 그가 나가면 좋지 않게 말하는 것이 다반사다. 그러나 비평이나 비판이 부재한 문단은 사상누각이 될 것이다. 우리 시단이 현재 직면한 큰 문제는 3多(많아진 문학상과 문예지, 시집)와 3少(줄어든 문학 담론과 논쟁과 비판이다)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예나 지금이나 독자(문학평론가도 여기에 포함된다)의 따끔한 충고는 창작자인 시인으로서는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시인은 평론가에게 반격을 한다.

 

80년대 해체시의 선두주자였던 박남철 시인은 1988년에 의미 깊은 시집 『반시대적 고찰』이란 제2시집을 도서출판 한겨레를 통해 간행한다. 이 무명의 출판사는 몇 년 지속되지 못하고 문을 닫았고, 이 시집 또한 시인의 첫 시집 『지상의 인간』이 불러일으킨 반향에 미치지 못한 채 희귀본 시집이 되고 말았다. 당시 문단에 떠돈 소문은, 문학평론가 김현이 쓴 해설이 시인의 마음에 영 들지 않아 자신을 등단시켜주고 첫 시집을 내준 출판사(문학과지성사)에 찾아가 원고를 찾아와 신생 출판사인 한겨레에 홧김에 대던지듯이 던졌다는 것이었다. 이 시집의 해설은 송제홍이라는 신진 비평가가 ‘결별, 그리고 사회학적 상상력으로의 전환’이라는 제목으로 썼는데, 시집의 시대적 혹은 정치적 의미를 잘 짚어낸 글이었다.

 

소문의 진상을 밝힌 사람은 평론가 김현, 애초에 해설을 썼던 바로 그 당사자였다. 도서출판 한겨레가 일찍 문을 닫음으로써 졸지에 죽은 시집이 돼버린 『반시대적 고찰』을 도서출판 세계사에서 재출간해주기로 했을 때, 출판사는 사장되었던 김현의 해설이 그때까지 남아 있는지 확인해보고자 했던 모양이다. 김현은 1990년 6월 27일에 작고했는데 놀랍게도 1999년 1월 28일자로 출간이 된 세계사 간 『반시대적 고찰』에 자신의 해설을 올리고 나서 다음과 같은 부기한다.

 

부기:이 글의 분석의 대상은 박남철의 『반시대적 고찰』(겨레, 1988)이다. 이 글은 원래 그 시집의 해설로 씌어졌으나, 시인은 그것을 받아들이기를 거절했다. 나는 오랫동안 이 글을 발표하지 않았다. 버릴까 하였으나, 그래도 아직 유효성이 있다고 판단하여 발표한다.

 

죽은 김현의 부활? 이 부기를 쓴 이는 김현이 확실한데, 시집의 발간 시점은 김현이 죽은 지 9년 뒤인지라 귀신이 곡할 노릇이다. 아무튼 세계사에서도 이 시집의 발간이 알 수 없는 이유로 아주 늦춰진 모양이다. 김현의 해설 「방법적 인용의 시적 성과」는 “박남철의 시는 과격하다”라는 문장으로 시작된다.

 

박남철의 시는 과격하다. 그의 시가 과격하다는 것은 그것이 우리가 흔히 만나는 일반적인 시와 많이 다르다는 것을 뜻한다. 그의 시는 기다림ㆍ외로움ㆍ쓸쓸함…… 등의 근원 정서를 직접적으로 표출하는, 문학 잡지에 실리는 대부분의 시와 많이 다르다. 그의 시도 그 근원 정서들과 어떤 형태로든지 연계되어 있지만, 그 관계는 간접적이고 우회적이어서, 그것의 직접적 표출에 익숙한 시의 독자들을 놀라게 한다. 그는 때로는 사각형을 그려놓고, 그것이 텔레비전에 관한 시라고 우겨대기도 하고, 그의 아들이나 신문에서 크게 다뤄졌던 사람의 사진을 그대로 실어놓고, 그것을 시로 읽어주길 강요한다.

 

어떤 필자든 시집 해설에서는 작품에 대해 비판을 거의 하지 않는 법이다. 김현도 ‘과격하다’, ‘강요한다’는 표현을 쓰긴 했지만 시집의 의미를 제대로 분석하고 시집의 의의를 엄정히 평가한 글을 썼다고 여겨진다. 하지만 김현의 해설이 못마땅했던 박남철은 시집 원고를 다른 출판사에 넘기는 행위를 통해 해설자에게 자신의 ‘분노’를 전했다. 그렇다, 창작자는 평론가의 비평에 대해 종종 분노한다. 언급을 안 해주는 평론가가 야속하고 언급하면서 칭찬만 해주지 않는 평론가가 원망스럽다. 게다가 평론가가 오독을 할 때, 시인의 원망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반격을 가한다.

 

김현은 성찬경의 등단 초기작인 「달」이라는 시를 읽고 『자유문학』지의 월평에서 비판했는데, 성찬경 시인은 세월이 아무리 흘러가도 김현의 그 글이 잊히지 않아서 1991년 9월호 『현대시학』의 기획특집 ‘오독된 나의 시’에서 30년 전 일을 들춰낸다.

 

문학평론가 김현 씨가 “…이여”, “이여”가 마구 거듭되는, 마치 素月풍의 낡은 유성기 판을 틀어놓은 듯한 이 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고 상당히 격렬한 어조로 비판을 하고 나선 것이다. 그 당시 김현 씨는 막 문단에 등단할 무렵이었다. 너무 패기에 치우쳐서 시의 모든 면을 두루 살필 여유가 없었던 게지, 하는 생각이 들어 필자는 침묵으로 일관하고 말았지만, 당시의 김현 씨가 이 시의 핵심적인 요점을 꿰뚫어보지 못했구나, 하는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평론가 김현은 1962년 3월에 등단했으므로 등단 다음해에 쓴 문예지 월평이야 기억에서 깨끗이 지워졌을 것이다. 하지만 비판의 대상이 된 시를 쓴 시인은 30년 세월이 지나도 그날의 충격이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오독된 나의 시’ 특집에서 김춘수는「꽃」에 대한 독자들의 반응을 납득할 수 없다고 말한다. 이 시를 연애시로 읽고 대상이 누구인지 알고 싶다며 편지를 보내오는 많은 독자에게 답장을 해주지 않고 있다가 1999년에 이르러서야 “인간존재의 원래적 고독상이라고 할까, 그것을 서로가 인식함으로써 전개되는 어떤 연대의식(도덕관) 같은 것을 이 시는 형상화하려고 했다”고 밝히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시인이 작품 끝에 일일이 시작 메모나 해설을 붙일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 특집 지면에서 홍신선은 신대철의 평을, 이건청은 신동욱의 평을, 이성선은 김혜순의 평을, 이기철은 최하림의 평을, 김영승은 정효구의 평을 오독의 예로 들면서 왜 잘못 읽었는지 때로는 엄중히, 때로는 겸손한 어조로 따지고 있다. 이들 외에 이흥우ㆍ박이도ㆍ유승우ㆍ송수권ㆍ김혜순ㆍ정한용ㆍ김신용 등은 특정한 비평가를 거론하지 않으면서 일반 독자나 주변의 지인들이 자기 시를 잘못 이해한 사례를 들고 있다. 아마도 청탁이 100명 시인에게 갔더라도 100명 모두 할 말이 있을 것이다. 일찍이 자크 데리다가 말하지 않았던가. 모든 책 읽기는 다 오독이라고. 평론가는 자신의 관점에서 말할 뿐인 것이다. 문제는 오독에 있는 것이 아니라 대단치 않은 작품에 대한 으리으리한(?) 상찬에 있지 않을까.

 

2013년에 나온 시집 가운데 큰 화제를 모은 김승일의 시집 『에듀케이션』을 읽어보았다. 4쪽 이상 되는 시가 12편이나 되는데 전문을 인용하기에 너무 길어 비교적 짧은 시 세 편을 예시한다.

 

엄마가 양파를 튀겼어. 나는 그 양파튀김이 어린이날 선물인 줄 미처 몰랐지. 그래서 맛있게 먹은 것인데. 먹고 보니 어린이날 선물이었고. 깜짝 놀란 나는 체하고 말았던 것이다.

 

변기에 한가득 게워내면서. 내가 양파를 다 게워낸들 선물을 또 사줄 리는 없잖아. 나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지만. 내가 하루 종일 운다고 해서 선물을 또 사줄 리는 없다는 것을.

 

나는 너무 잘 알았다. 초등학교를 졸업하면 어린이날 선물을 받지 못한대.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법이 그렇다니까. 양파가 마지막 선물이었어. 마지막 선물을 토해버렸어.

 

화장실 안에는 시계가 없고 거실로 나가야 시계가 있고. 오후 세 시쯤 되었을 거야. 아홉 시간. 내 마지막 어린이날이 고작 아홉 시간 남았다는 걸. 굳이 확인할 필요는 없지.

 

화장실 문을 잠그고. 바닥에 누워 낮잠을 잤다. 양파튀김이 제일 좋다고 네가 저번에 얘기했잖아? 엄마가 문을 두드렸어. 틀린 말은 아니니까 할 말은 없고. 그저 엄마가 알아주기를. 오늘이 얼마나 중요한 기념일인지. 엄마가 알아주기를.

 

나는 신께 기도드렸다. 그렇게 중요한 기념일인데 화장실 안에서 허비하다니. 너도 참 바보로구나. 차가운 타일 바닥에 엎드린 채로. 내가 얼마나 낭비한 걸까?

 

그러나 내가 낭비한 만큼 엄마가 나를 이해한대도. 엄마는 또 양파를 튀길 것이다. 최선을 최선을 다해.

 

― 「왜 초등학교를 졸업하면 어린이날 선물을 받지 못하는가?」 전문

 

문학과지성 시인선 410번인 이 시집에는 이런 유의 시가 꽤 된다. 이 시에서 도대체 ‘시적인 것’은 무엇일까? 일단 운문이 아니라 산문이다. 동시인 것도 같고 청소년 시인 것도 같다. 발랄한 언어유희로 볼 수도 없고 통통 튀는 상상력의 산물도 아니다. 아이가 쓴 일기 같다. 시적 화자가 군에 간 20대라고 해도 시의 분위기는 별로 바뀌지 않는다.

 

군대에서 세례를 받은 우리들. 첫 고해성사를 마치고 나서 운동장에 앉아 수다를 떨었다.

 

난 이런 죄를 고백했는데. 넌 무슨 죄를 고백했니? 너한테 신부님이 뭐라 그랬어? 서로에게 고백을 하고 놀았다.

 

우린 아직 이병이니까. 별로 그렇게 죄진 게 없어. 우리가 일병이 되면 죄가 조금 다양해질까? 우리가 상병이 되면…… 고백할 게 많아지겠지? 앞으로 돌아올 후임들한테, 무슨 죄를 지을지 계획하면서. 우리는 정신없이 웃고 까분다.

 

웃고 까부는 건 다 좋은데. 성사를 장난으로 생각하지 마. 우리가 방금 나눈 대화도 다음 성사 때 고백해야 돼. 어렸을 때 세례를 받은 동기가 조심스럽게 충고를 하고.

 

역시 독실한 종교인은 남다르구나. 너는 오늘 무슨 죄를 고백했는데? 우리는 조금 빈정거렸다.

 

나는 생각으로 지은 죄도 고백하거든. 대부분 끔찍한 것들이라서. 알려줄 수는 없을 것 같아.

 

팔다리를 잡고 간지럼을 태웠는데도. 너는 절대 고백을 하지 않았고. 그래서 우리는 겁이 났다. 저 독실한 신자 녀석이. 끔찍한 생각을 하고 있어서.

 

― 「같은 부대 동기들」 전문

 

이 시도 일기 같다. 시가 반드시 깊은 사색의 결과물일 필요는 없다. 일상의 소소한 일도 얼마든지 시가 될 수 있다. 그런데 이 시를 읽고 든 첫 느낌은 ‘시를 참 쉽게 쓴다’는 것이다. 가벼운 마음으로 붓 가는 대로 쓴다면 신변잡기에 불과한데, 이런 시가 1987년생 젊은 시인이 낸 첫 시집의 대종을 이루고 있다. 대상에 대한 깊은 사유나 인생사의 비의에 대한 탐색을 20대 시인에게 요구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언어를 갖고 그저 “정신없이 웃고 까분다”는 느낌만이 편편의 시를 읽을 때마다 강하게 든다. 마침표를 자주 찍는 것만이 이색적이라고 할 수 있을지. 이런 시가 나는 도무지 좋은 시, 훌륭한 시, 뛰어난 시라고 여겨지지 않는다. 물론 불안과 방황의 나날을 보내고 있는 젊은이들의 심정을 대변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만 편편의 시가 수작이라고 평가하고 싶지는 않다. 그런데 해설을 보니 문학평론가 함돈균 씨는 이 한 편의 시에 대해 아주 길게 쓰고 있다. 이 시가 너무나 훌륭하다는 것이다.

 

김승일 시집의 비성년 화자들이 모인 자리를 우리는 ‘공동체’라고 불렀다. 정확히 말해 공동체에 근접하는 어떤 것이라고 말했다. 그의 시에서 애인과 친구들, 형제는 적어도 ‘사회’에 속하지 않는다. 거기에는 사회적 효용도, 계약도, 규칙도, 목적도 없다. 대신 그들은 나눌 수 없는 존재의 내밀성 그 자체를 나눈다. 그 내밀성은 때로는 저마다 겪은 학대의 경험이고, 때로는 자신이 키우던 고양이 머리가 배달되는 그 자신만의 ‘더한 꿈’이며, 때로 그것은 똥과 오줌을 타인 앞에서 배설하는 자가 느끼는 수치심이다.

 

그런데 그들이 나누는 것의 목록에는 이 시에서 보는 것처럼 ‘고해성사(고백)’도 있다. 고백을 고백한다? 부대 동기들을 ‘같은’ 부대 동기들로 묶는 것은 신의 대리자인 신부에게나 들려준 그들 저마다의 은밀한 고백이다. 그건 다름 아닌 그들의 ‘죄’다. “정신없이 웃고 까”부는 이 고백놀이는 신과 마주한 자리에서나 발설되는 지극한 내밀성의 놀이화다. 이 놀이의 놀라움은 그 내밀성이 지닌 절대적 밀도에서 비롯된다. 고해성사란 어떠한 타인에게도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함으로써, 그 말함의 형식 자체로 신을 단독자로서 마주하는 존재론적 도약의 체험이 아닌가. 여기서 발생하는 게 바로 ‘종교(적인) 것’이다. 단독자로서 신과 마주하는 이 고백의 형식이 그 형식 자체로 종교적인 체험이 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이 고백의 성격이 말 되어질 수 없는 것을 말한다는 절대적 내밀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 절대적 내밀성은 그것이 곧 자신의 ‘죄’라는 점에서 비롯된다. 그것은 누군가에게 학대받았던 한 인간이 오히려 누군가를 학대했던(학대할 수 있는) 자일 수 있음에 대한 자각이고, 자기 죄에 대한 무의식적 인식이며, 인간 개체의 저 바닥에 똬리를 틀고 있는 자기 안의 ‘쥐’이기도 하고 ‘똥’이기도 한 것을 자각한 자들이 대면하는 수치심이기도 할 것이다.

 

김승일의 여러 시들에서 유년시절 부모에게 또는 학교에서 학대받았던 친구들은 이 시에서는 고백을 고백하는 은밀한 놀이를 통해 ‘같은 부대 동기들’이 된다. “우리가 상병이 되면…… 고백할 게 많아지겠지? 앞으로 들어올 후임들한테, 무슨 죄를 지을지 계획하면서” 벌이는 놀이는 윤리적으로 의미심장하다. 그들의 놀이는 학대받던 자가 학대자이거나 또는 학대자가 될 수도 있다는 자각(일병과 상병에게 학대받던 모든 이병은 곧 일병이 되고 상병이 된다), 아직 짓지도 않은 미래의 죄, 그러므로 세상의 죄가 내 죄일 수도 있다는 자각을 통해 모종의 ‘공동체’에 접근하는 놀이이기 때문이다. 이 윤리적 지평의 자리, 이 동기들이 모여 노는 여기는 아무리 보아도 ‘사회’가 아니다.

 

병영 내 군인들의 종교생활을 신과 신 앞에 홀로 선 인간(단독자)의 관계로, 사병들 간의 갈등을 인간의 원죄의식과 윤리의식, 그리고 유년기의 상처와 폭력에 대한 고찰로 해석한 것이다. 이 글이 시에 대한 온당한 해석으로 봐지지 않고 지나친 확대해석으로 본 것은 나의 판단착오일까? 김승일의 「같은 부대 동기들」을 아무리 되풀이해 읽어보아도 이렇게 거창하게 설명하고 고평해야 될 시로 여겨지지 않는다. ‘시적인 것’은 어디에서도 발견하기 어렵고, 같은 부대 동기들이 나누는 그저 그런 대화가 시의 전부다. (참고로 말하면 시인은 아직 군대에 갔다 오지 않았는데 이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시인의 또 다른 시도 비슷한 작법으로 쓴, 일기 같은 시이다. 좀 길지만 시집의 두 쪽을 차지하고 있다.

 

동생의 마음이 이해 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나도 양아치였으니까. 그렇지만 나는 깨달아버린 것이다. 학교에 가지 않는 양아치보다는 학교에 가는 양아치가 더 멋있다는 사실을.

 

부모가 죽고 세 달이 흐르자, 숙제가 밀리면 그 숙제는 하지 않는다. 그것이 형의 방식. 형이라서 라면을 먹어, 역기도 들고, 찬송하고, 낮잠을 때리지. 형이라서, 형이라서 배탈이 났어요. 나는 학교에 늦게 간다. 하고 싶다면 너도 형을 해. 그러나 네가 형을 해도. 네가 죽으면 내 책임이지.

 

학교에서, 나는 농구하는 애. 담배 피우는 애. 의자로 후배를 때린 선배. 아버지가 엄마보다 늦게 죽을 줄 알았어. 자주 앓는 사람이 오래 사는 법이니까. 부모가 동시에 죽고, 이제 누가 화장실 청소를 하나? 형이라서 배탈이 났어요. 이십 분 간격으로 물똥을 눈다. 창피하게. 동생이 옆에서 샤워를 한다. 구석구석.

 

친구들이 모두 집에 돌아간 뒤에도 나는 학교에 남아 침을 뱉는다. 구령대에서, 나는 침을 멀리 뱉는 애. 부모가 죽고 세 달이 흐르자. 부모가 죽고 네 달이 흐른다. 그리고

 

운동장을 가로지르며 동생이 뛰어온다. 변기에서 쥐가 튀어나왔어. 괜찮아. 내일부터 학교에 오자. 똥은 학교에서 누면 되지. 그래 그러면 된다.

 

― 「부담」 전문

 

왜 이 시의 제목이 ‘부담’일까? 부모 부재시에는 동생이 형에게 부담스럽다는 뜻일까? 이 시에서도 부모를 잃은 형제의 이야기가 흡사 동화의 한 대목처럼 펼쳐진다. 김승일은 시의 산문화만 꾀하는 것이 아니라 에세이화나 일기화, 동화화를 꾀하고 있다. 이야기가 펼쳐지는 것은 좋지만 “형이라서, 형이라서 배탈이 났어요.” 같은 대목은 얼토당토않다고 해야 할지 황당무계하다고 해야 할지. 청소년기에 대한 향수를 일깨우는 측면이 없지 않지만 시가 되기 위한 장치들―예컨대 은유과 환유, 역설과 반어, 상징과 환상 같은 것들 중 어느 것도 쓰지 않고 있다. 그래서 청소년기 소년이 쓴 일기 이상의 의미를 찾기 어렵다. 극단적으로 말해 김승일의 『에듀케이션』은 시집이 아니라 산문집이다.

 

김승일 시인이 나의 이런 평을 오독이라고 하며 반격을 가해 올지 모르겠지만 좋은 시와 좋지 않은 시에 대한 나의 판단기준은 당분간 흔들리지 않을 것 같다.

 

모 시인과 대담을 한 적이 있다. 문학상 중 하나를 수상하게 된 시인의 특집호에 내가 질문을 하고 그 시인이 대답을 하는 방식이었는데 시인은 바쁘다고 하면서 서면으로 질의응답을 하자고 했다. 사진도 찍고 오랜만에 얼굴도 좀 보자고 했지만 한사코 거절하면서 서로 질문지와 답변지를 주거니 받거니 하자고 해서 질문지를 성의껏 써서 보냈다. 답변지를 받은 뒤에 내가 보충질문을 할 수 있게끔, 그리고 직접 만나서 대담한 것처럼 자연스럽데 대화를 나누는 식으로 원고를 고쳐야 하니 당신이 쓴 답변지를 보내달라고 여러 번 전화했는데 계속 바쁘다고 했고 며칠만 며칠만 하면서 전화를 끊었다. 그 시인으로부터 끝내 답메일이 끝내 오지 않은 채 책이 나왔다. 그의 시에 대해 평문을 여러 차례 쓴 이는 나밖에 없어서 시인은 나를 지목한 것이었지만 95%의 칭찬은 당연한 것이었고 5%의 비판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시인은 나의 그간의 글과 성의껏 한 질문 하나 하나에 대해 무섭게 반격하고 성토하면서 속 시원하게 복수를 하였다. 독자는 비판의식을 지닌 타자다. 타자의 칭찬에 힘을 얻을 수 있지만 비판에 대해 이렇게까지 민감하게 대응할 필요가 있을까. 문학평론, 함부로 할 것이 아니다. 하지만 온당한 비판이 없고 문학상 심사평 같은 상찬만이 횡행할 때 우리 시의 미래는 지금보다 더욱 어두워질 것이다.

 

 

 

 

 

이승하 시인ㆍ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