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의 매력은 첫째, 감동에 있다/ 시인 이승하
21세기에 들어 시집이 예전처럼 안 나가는 것은 사실입니다. 냈다 하면 베스트셀러가 되는 시인도 있기는 합니다만 대다수 시인이 이제는 인세 수입에 대한 기대를 버리고 어느 기관이나 재단에서 주는 지원금을 받기를 원합니다. 시인들이 독자의 외면을 당연시하게 되었으니, 아직도 시를 쓰고 있는 저 같은 사람은 무척 처량해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제가 좋아하는 시인 김소월과 만해가, 윤동주와 이육사가, 박용래와 김종삼이 시를 써서 끼니를 해결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시에 대한 그들의 순교자적 자세가 오히려 제게 위안을 줍니다. 시인은 죽으나 사나 독야청청(獨也靑靑)해야지 금전에 눈이 어두우면 안 되지요. 중국 당나라 때 이백과 두보는 필력을 앞세워 벼슬길에 오르고자 했지만 그것이 여의치 않자 올곧은 시인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그래서 고난의 세월을 보내게 되지요.
서양에서나 동양에서나 시의 역사는 산문의 역사보다 훨씬 깁니다. 수천 년 시의 역사를 보면 시인의 수는 정말 너무 많아 도저히 헤아릴 수 없습니다. 300년 당나라의 역사에 이름을 뚜렷이 남긴 시인의 수는 2,300여 명, 그들의 시 4만 8,900여 수가 청나라 강희제 46년(1707년)에 편찬된 《전당시(全唐詩)》에 실려 있습니다. 이름 없이 스러져간 시인의 수는 이보다 훨씬 많을 터, 몇 십만인지도 알 수 없지요.
우리나라에만 있는 독특한 신인 등용문으로 신춘문예란 것이 있습니다. 서울과 지방 할 것 없이 신문사마다 공모하는 신춘문예에 많게는 수천 편, 적게는 수백 편의 시가 투고된다고 합니다. 문예지가 수백 종에 이르는데, 각 문예지마다 신인 공모를 하고 있으니 해마다 등단하는 시인의 수는 실로 엄청날 것입니다. 시집이 잘 나가건 안 나가건 상관없이 문학 저변 인구가 이렇게 많은 것이지요. 이렇게 많은 사람이 시에 관심을 갖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시에 독특한 매력이 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여러 신문에 시가 매주 실리는 것도 시의 가치를 인정해 주어서일 것입니다. 시의 가치 중 첫 번째는 시가 우리에게 감동을 준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들도 감동적인 시를 써보고자 애를 쓰기 바랍니다.
흰 구름에 빨간 고추잠자리
볼 수는 없지만
샘물에 떨어진 은행잎 건지며
가을이 온 줄을
나는 알아요.
샘물에 두 손 담그면
아, 여름날 차갑던 샘물이 따뜻해요.
충주 성심맹학교의 어린 학생이 쓴 동시입니다. 눈먼 아이가 체험한 내용이 그대로 시가 되었습니다. 날씨가 차가워지는 가을에는 샘물이 오히려 따뜻하게 느껴지는데, 저로서는 시를 쓴 아이의 마음이 더 따뜻하게 다가옵니다.
초능력 둘리가 될 수 있다면
날개 달린 나비가 될 수 있다면
아프리카 배고픈 어린이에게 날아가
사탕이랑 초코파이랑
많이 많이
어린이날에 선물할 수 있게
알라딘의 요술램프가
있으면 좋겠어요.
― 〈나의 꿈〉 전문
동시치고도 되게 시시하다고요? 정신지체로 고생하는 초등학교 5학년 아이가 쓴 동시입니다. 아이 자신은 십자가를 지고 한 세상을 살아가고 있으면서도 남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 즉 측은지심과 자비지심을 갖고 있어 우리를 감동시킵니다. 감동적인 시는 여운이 남습니다. 가슴이 뿌듯해지기도 하고 콧잔등이 시큰해지기도 하지요. 김종삼의 이런 시는 어떤가요.
물 먹는 소 목덜미에
할머니 손이 얹혀졌다.
이 하루도
함께 지났다고,
서로 발잔등이 부었다고,
서로 적막하다고,
― 〈묵화〉 전문
둘 다 발등이 부었을 정도니 얼마나 가혹한 노동의 날이었을까요? 밭갈이를 마친 저녁, 소도 지쳤고 할머니도 지쳤습니다. 물을 먹는 소가 가련해 할머니는 소 목덜미에 손을 얹었지요. 삶이란 참으로 적막한 것이지만 두 생명체 사이를 있는 교감, 곧 유대감이 독자의 마음을 따듯하게 합니다. 이 한 폭의 묵화가 주는 감동은 밀레의 〈만종〉이나 박수근의 〈아기 업은 소녀〉에 못지않습니다.
여러분은 살아가다 감동적인 일을 보고 듣지 안습니까? 텔레비전을 보다가 눈시울이 뜨거워진 적이 없습니까? 영화를 보다가 눈물을 흘린 적이 없습니까? 시인은 감동을 전하는 사람입니다. 한국 현대시가 위기를 맞았다고는 하지만 수천 년 역사를 지속해오고 있는 이유 중 하나가 ‘감동’일진대, 여러분은 감동적인 시를 한 편 써보기 바랍니다. 감동의 시는 기교의 시가 아니라 정신의 시, 영혼의 시입니다. 울림이 있는 시, 떨림이 있는 시는 시대를 초월할 수 있습니다. ‘감동’이 너무 부담스러우면 주변의 몇 사람이라도 십분 공감할 수 있는 시를 써보십시오. 《두시언해》나 《두보시선》에 실려 있는 시는 특히 감동적이니, 다시 한번 읽어보십시오. 감동의 힘이 1200년도 더 지난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를 울게 합니다.
늙은 처는 다른 지방에 부탁하고 老妻奇異縣
열 식구가 바람과 눈에 가려 살았으니 十口隔風雪
누군들 오래 안 돌볼 수 있겠는가? 誰能久不顧
가서 함께 기갈을 나누고자 하네. 庶往共飢渴
문에 들어서니 울부짖는 소리 들리는데 入門聞號咷
어린 놈이 굶어죽었다 하네. 幼子飢已卒
내 어찌 슬퍼하지 않을 수 있으리요? 吾寧捨一哀
이웃사람도 같이 흐느껴 우네. 里巷猶鳴咽
부끄럽구나, 아비 되어 所愧爲人父
밥 없어 일찍 자식이 죽었으니! 無食致夭折
― 〈서울시 봉선현에 가며 읊은 오백 자(自京赴奉先縣詠懷五百字)〉 부분
안록산의 난에 기근이 겹쳐 초근목피(草根木皮)로 근근이 목숨을 부지하던 두보 일가는 다 함께 앉아서 굶어죽을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하는 수 없이 식량을 구하러 외지를 떠돌던 두보가 두고 간 식구들 소식이 궁금해 견딜 수가 없어 쌀 한 포대를 짊어지고 고향 어귀에 이르렀습니다.
어느 집에선가 몇 사람이 통곡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불길한 예감이 들어 집으로 달려갔더니 딸아이가 방금 굶어죽었다고 하지 않습니까. 아사한 자식을 보는 아버지의 심정이 어땠을까요. 이 시 속에 나오는 유명한 대목, “대궐 문 안에는 술과 고기가 썩은 내를 풍기나/ 길에는 얼어 죽은 시체가 뒹구네/ 영화와 빈곤이 지척 사이에 있으니/ 처량한 마음 이루 말할 수 없네.”에는 두보의 분노가 담겨 있고, 이 분노는 독자의 가슴을 저리게 하는 감동을 줍니다. 또한 자신의 불행에 짓눌리면 타인의 고통은 아랑곳하지 않는 경우가 많은데 “묵묵히 생업 잇는 사람들이나/ 변경 멀리에 있는 병졸들 생각하니/ 걱정은 종남산 높이만큼 쌓여/ 끝없이 흐트러져 걷잡을 수 없구나” 하면서 동시대인의 아픔을 보듬고 있습니다. 두보의 시를 읽고 있노라면 중국 당나라의 서민들뿐만 아니라 우리 선조들이 겪었을 아픔도 함께 떠오르면서 감동의 강물에 몸을 던지게 됩니다. < ‘詩 어떻게 쓸 것인가? 이승하 교수의 시쓰기 수업(이승하, 도서출판 Kim, 2017)’에서 옮겨 적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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