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시조의 당면 과제에 대한 제언
1.
시조는 우리 고유의 자랑스러운 정형시이다. 이는 소리글자인 한글이란 훌륭한 그릇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표기할 우리의 그릇이 없을 때는 한자에 그 뜻을 옮겨서 담기도 하였다. 그래서 그 그릇에 담겨진 형태와 노랫말이 달랐다. 한글에 담겨지면서 언문일치의 온전한 형태가 나타났다. 시조는 3장6구 12음보 45자(43-47)로 이루어진 온전한 정형시를 정격으로 간주한다. 이는 시조부흥 운동기에 이병기와 이은상 등이 발표한 시조형식의 변화를 모색하는 여러 유형에 접하면서 조윤제가 학자적 입장에서 이를 조율하여 발표한 것이 현대시조의 모형이 되었다. 이는 중등학교 교과서와 참고서에 실려 있고, 대학교재를 포함한 시조이론서에 실려 있다. 그래서 오늘날 이를 정격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오늘날 파격을 주장하고 따르는 목소리가 높아 시조의 위기는 이제 그 정체성마저 의심케 한다. 물론 이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도 높다. 이렇게 우리 시조가 오늘날 위기에 처해 있음은 여러 학자들의 글에서나 언론매체를 통해서도 감지한다. 그 위기는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그 하나는 위에서 언급한 형식적인 파괴이고, 또 하나는 시조 교육 부재이다. 이를 살펴보며 오늘날 시조가 처한 현주소를 진단하면서 이를 극복하기 위한 대책을 제언해 보고자 한다.
2.
김대행은 2002년 경남시조 세미나 발표에서 파행을 일삼는 현대시조의 정체성에 대해 재 천명했음을 다음 글에서 볼 수 있다.
“전통은 ‘과거로부터 끼쳐진 것’이라는 역사성과 ‘오늘에도 작동하는 것’이라는 현실성을 본질로 한다. 그러기에 전통은 흘러간 과거라기보다 지금 이 시간에 살아 숨쉬는 과거일 때 진정한 의미를 가질 수 있게 된다. 시조는 이 점에서 전통의 양식이라 할 수 있다.“
라 하여 시조의 정형은 과거의 것이면서 오늘에도 살아 있는 형식으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에 이를 지켜 나감으로써 그 정체성을 확보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시조의 일차적 조건은 그 형식적 특성에 있으며 이것이 시조의 유일한 정체성으로서 오늘날에도 여전히 생명력을 가진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조의 형식적 특성은 지켜져야 한다. 이는 오늘날 시조 형식의 파행을 현대시조의 특권인양 또는 시조의 현대화를 위한 새로운 모색 내지 발전인양 하는 시조시인들에게 반성의 여지를 던져 주는 내용이다. 시조문학 연구자로서, 이론가로서, 학자적인 입장에서 오늘날 파행을 일삼는 시조시인들을 바라보며 일침을 가하는 진단이라고 본다.
김학성은 현대시조의 좌표와 방향에서 “현대시조는 현대 + 시조라는 명칭에서 드러나듯이 현대성과 시조성을 동시에 충족해야 하는 위치에 놓여 있다. 즉, 현대성을 충족해야 역사적 사명을 다하고 사라진 고시조의 빈 공간을 메울 수 있는 존재이유가 되고, 시조성을 확고히 해야 자유시와의 경쟁관계에서 미래를 보장받을 수 있다.“ 라 하여 시조의 현대성과 시조성 곧 전통시로서의 시조의 역사성을 명시하여 이를 현대시조가 안고 있는 문학사적 위상이고 좌표로 제시했다. 곧 현대성을 무시하고 시조성만 추구한다면 현대인의 미의식에 걸맞는 공감대를 획득하기 어렵고 반대로 시조성을 무시하고 현대성으로 과도하게 기울면 자유시와 경계선이 무너진다는 것이다. 이처럼 양쪽으로부터 경계와 비판의 시선을 받는 것이 현대시조가 위치한 현주소라는 것이다. 이는 곧 詩意는 현대성을 추구하고 표출하되 시조의 형식은 정형시로서의 전통성을 고수해야 된다는 것이다.
임종찬은 [문장구조로 본 현대시조]에서
‘장구한 세월을 겪어오는 동안 형태나 내용면에서 부분적인 변화를 겪어왔지만 시조가 정형시로서의 시조(단시조) 속성은 계속 유지되어야만 시조의 존재 이유가 확보된다’
고하여 시조의 존재는 자유시와 확연히 구별되는 정형성에 있음을 진술했다.
신범순은 [시조의 현대적 의미에 대한 모색]에서
“시조의 고정된 형식을 변화시키려는 실험은 '시조혁신론'을 제기했던 가람 이병기 이후 계속 발전하여 오늘날 거의 자유시처럼 보이는 시조들을 만들어내는 데에까지 이르렀다. 시조형식의 열림을 위한 실험은 그러나 이제 와서는 도대체 이러한 실험적 시조가 과연 시조인가 아니면 자유시인가 하는 심각한 의문을 제기하게끔 한다.“
라고 하여 시조의 형식 파괴는 시조혁신론을 제기했던 이병기 이후 지속적으로 발전하여 오늘날 자유시처럼 창작되고 있음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와 함께 이에 대한 타당성 여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고시조에서 보는 ‘하여가’나 ‘단심가’ 등은 그 정갈한 형식과 내용에 있어서 역사적 배경과 더불어 길이길이 빛나는 명시조이다. 이는 우리말의 구조 자체가 시조를 쓰기에 적절하기 때문이다. 조금만 말을 다듬고 함축시키면 시조의 정격을 지킬 수 있다. 그래서 많은 시조시인들이 지금도 그 정격을 지키면서 자유시와 차별화된 어려운 작업을 하고 있다.
시조의 고정된 형식을 변화시키려는 실험은 '시조혁신론'을 제기했던 가람 이병기에서부터이다. 하지만 도남 조윤제가 당시 여러 이론들을 종합하여 내 놓은 것이 시조의 기본 형식인 정격이다. 그래서 그것이 학교 교과서(초,중,고)와 시조이론서(대학교재를 포함해서)에도 실려 있다. 그런데 일부 시조시인들이 가람의 영향을 받아 편한 대로 쓰다보니 그 작품들이 읽히고 읽혀져서 보는 이마다 ‘이렇게 써도 되는구나.’하고 너도 나도 쓴 것이 오늘날 자유시인지 시조인지 모른다는 말까지 나오게 된 것으로 본다. 특히 시조 창작 교실을 운영하고 가르치는 시조시인조차 자유를 구가하며 형식을 파괴하고 있으니 그것이 큰 문제로 제기되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시조 큰 상을 타는 수상작품까지도 정격이 아닌 파격 작품을 즐겨 뽑고 있으니 그것 또한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시조형식의 파괴를 주장하는 이들에게 말하고 싶은 것은 중국의 정형시인 5언 7언 절구가 변화를 요구했으며, 일본의 하이쿠가 변화를 해서 세계화로 뻗어 가는지 한 번쯤이라도 생각했으면 한다.
다음 글을 음미해 보자.
우리가 ‘시조(時調)’를 정형 율격에 안정된 시상을 담는 전통적 시 양식으로 인식하는 관행은 매우 익숙한 것이다. 그래서인지 시조에는 정격(正格)의 정서와 형식이 담기는 것이 가장 어울려 보이고, 그로부터의 파격(破格)을 꾀하는 해체 지향의 언어는 다소 불편해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이 글은 시조형식의 정격에 익숙해 있고 이를 선호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글이다. 그리고 시조시인들이 시조를 쓰면서 시조 고유의 율격을 해체하는 것을 일종의 자기모순으로 치부하고 있다. 현대 시조의 새로운 미학적 활로는, 전통적 형식과 현대적 감각을 결합하여 다가서는 데 달려 있다고 진술한다. 파격을 하고, 파격을 외치는 시조시인들은 한 번 더 되새김질하여 돌아 봐야 할 문제 제기이다.
사실 우리말의 언어구조는 시조를 쓰기에 아주 적절하다. 한 단어의 음절이 거의 2,3,4,로 이루어진다. 그래서 시조의 각 음보(마디)가 가능한 것이다. 두 음보가 짝을 이뤄 구를 이루고 각 구가 짝을 이루어 장을 형성하는 것도 그래서 가능하다. 영어로서 우리네 정서에 맞는 시조를 지을 수는 없는 것이다. 한문으로도 불가능하다. 곧 정형시로서의 그 형식을 지킬 수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시조를 한문으로 옮길 때는 중국의 정형시인 절구에 맞추어 옮기는 것이다. 이렇게 각 나라에 맞는 고유의 시형이 정형시인 것이다. 중국엔 절구가 있고, 일본엔 하이쿠가 있고 유럽엔 소네트가 있듯이 우리에겐 시조가 있는 것이다. 이를 자랑스럽게 생각해야 한다. 이렇게 각 나라마다 그 나라의 언어구조에 따라 고유시를 가지고 있다. 일본의 경우 한자(초서체)를 흘려 쓴 히라가나와 한자를 간략화한 카타가나는 헤이안(平安·794~1192) 시대에 만들어졌다. 때문에 하이쿠는 그것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거라는 지적이다. 실제로 ‘하이쿠의 종장(宗匠)’ 바쇼는 두보, 이백, 소동파, 황산곡의 한시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바쇼의 작품 외 몇 점의 하이쿠를 살펴보자.
①사람을 따라
절에 가니 파리가
합장을 하네. (바쇼)
(5,7,5 ->17자)
②오래된 연못
개구리 뛰어드니
물소리 퐁당! (바쇼)
(5,7,5 ->17자)
③도둑이 와도
들창에 걸린 달은
두고 갔구나. (료칸)
(5,7,5->17자)
④ 내 전생애가
저 나팔꽃 같구나.
오늘 아침은(모리다케, 생애 마지막으로 쓴 시)
(5,7,5->17자)
⑤너무 울어서
텅 비어 버렸는가
매미 허물은. (바쇼)
(5,7,5->17자)
⑥닭이 다투니
모이를 주는 것도
죄가 되는구나 (이싸)
(5,7,5->17자)
**편의상 우리글자수에도 맞춰진 작품을 택했다.
얼마나 깔끔하고 함축적인 표현인가. 일본인의 기질을 보는 듯하다. 이것이 17자로서 세계로 퍼져가는 일본의 하이쿠이다. 그 표현형식이나 내용상의 절제를 자유시와 비교할 수는 없다. 자유시는 자유시로서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다음에서 43-45자 정격을 고스란히 지키면서도 아름답게 읊은 시조 몇 편을 살펴보자.
①
눈물에 대하여/김준
자기와
자기 아닌
또 다른 자기와의
치열한
갈등에서
마지막 속삭임이
마침내
가슴에 닿아
그지없는 환희. (43자)
②
사랑.Ⅱ/이우종
살아서
숨쉴 때만
손목을 잡아 주고(14자)
피어서
있을 때만
꽃이라고 부르지만(15자)
사랑은
무덤에서도
떠오르는 불길인가.(16자)->45자
③
가을산/조 규 영
기분이 좋았던지
뒷산도 저 앞산도(14자)
술 한 잔 마시고서
술기가 오르는지(14자)
빨갛게 물이 들면서
술기운이 돕니다.(15자)->43자
④
상고대의 길/ 신순애
빙점의 산마루에
투명한 얼음 꽃들(15자)
나목의 가지마다
만개한 절정이여(15자)
거듭난 인동의 세월
녹지마라 눈물꽃.(15자)->45자
⑤
봄소식 / 이정자
홍매화
옛 등걸에
마파람이 휘감고서 (15자)
휘어진
등줄기에
잔설을 털어내니(15자)
옹이진
마디마디에
웃음꽃이 터지네. (15자) ->45자
⑥
적막한 봄/정완영
산골짝 외딴집에 복사꽃이 혼자 핀다(15자)
사람도 집 비우고 물소리도 골 비우고(15자)
구름도 제풀에 지쳐 오도 가도 못한다.(15자) ->45자
봄날이 하도 고와 복사꽃 눈멀겠다(14자)
저러다 저 꽃 지면 산도 골도 몸져눕고(15자)
꽃보다 어여쁜 적막을 누가 지고 갈 건가.(16자)->45자
더 해설을 덧붙일 필요도 없다. 아름다운 우리의 시조이다. 하이쿠와 비교하면서 감상해 보기 바란다.
다음은 시조교육 부재에 대한 목소리를 들어보자.
강경호는 [시조 교육을 위한 서론]에서 다음과 같이 오늘날 시조가 처한 위치를 우려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수백 년 동안 우리 선인들이 즐겨온 시조가 우리 시단에서 소외당하고 묵살되다시피 되고 있는 것이 지금의 실정이다. 일본에서는 우리 시조와 유형(類型)을 같이하는 단가(短歌)와 배구(俳句) 같은 정형시가 두 가지나 민족시가로서 육성 발전되고, 범국민적 사랑아래 창성(昌盛)을 이룩하고 있음을 생각할 때 외래의 것에 맹목(盲目)에 가까 우리 만치 영합, 심취하는 우리들의 사대적 자세를 한 번쯤 스스로 반성해 보아야 되지 않을까.
라고 하면서 강경호는 시조가 700여 년 동안 내려온 우리 고유의 전통 시로서 중국의 절구나 일본의 하이쿠를 능가하는 자랑스러운 정형시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경시하는 오늘날의 교육풍토에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시조는 오늘날 유일하게 남아있는 우리의 시가(詩歌)문학인데 교과서 편성에서부터 그 균형성을 잃어버렸음을 지적하며 ‘시조(時調) 하나를 제대로 살리고 가꾸지 못하면서 무슨 주체적 민족문학을 마련하고, 문화의 21세기를 꽃피울 수 있겠느냐’고 역설한다. 현장 교육에 일익을 담당하는 교육자로서 우리 고유의 시형식인 시조가 정당하게 대접받지 못하는 오늘날 교육내지 문화풍토에 개혁의 화살을 던진 것이라 본다.
3.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현대시조의 위기는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그 하나는 형식적인 파괴이고, 또 하나는 시조 교육 부재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시조시인들의 노력과 교육입안자들의 각성이 요구된다.
시조시인들은 정격으로 돌아가 정형시로서의 정체성을 살려야 한다. 하이쿠는 17자로 세계를 누빈다. 한시도 5언 절구 7언 절구 율시로서 전통을 지키고 있다. 우리도 평시조 연시조가 있다. 자유시와 구별이 안가는 어정쩡한 시조는 지양되어야 한다. 시조는 정격으로 가야 시조로서의 정체성과 전통 시로서의 가치가 있다. 파격을 한다고 명시가 나오고 애호가가 쏟아지는 것은 절대 아니다. 시조 시인들이 정격을 지켜 세상과 나를 바라보며 한 수 한 수 정갈하게 읊을 때 시조애호가들도 운율을 따라 이를 애송하며 노래할 것이다.
교육 입안자들은 시조가 우리 고유의 자랑스러운 문학임을 자각하고 우리의 귀한 문화유산에 자긍심을 갖고 후손들에게 물려주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 국민이라면 누구나 우리 한글을 사랑하듯 우리의 시조(時調)문학을 사랑할 것이다. 우리 국민이라면 누구나 우리의 고유시가 있음에 긍지를 갖고 시조 한 두 수쯤은 애송하고 사랑할 수 있도록 그 토양도 조성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주체적 민족문학인 시조가 세계로 향하여 뻗어가게 해야 할 것이다. 문화의 21세기를 부르짖는 현 시점에서 그 첫 번째 열매를 시조에 둔다는 각오로 시조시인들은 창작에 임하고 교육입안자들은 시조의 저변 확대는 물론 후진 양성에 힘을 모아야 할 것이다. ♣ <시조문학 2008년 여름호> 이정자(시인, 문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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