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신춘문예 시조 총평
이 봉 수 (시조시인, 문학평론가)
이제 현대시조는 자유시의 흉내 내기와 고시조 개념의 두꺼운 탈을 벗고 정격시조의 시대를 열어 가고 있다.
2012년 주요 일간지의 신춘문예 시조는 3가지 면에서 일단 긍정적으로 평가할 만하다.
첫째, 고시조개념의 시조 범주에 속해 있던 사설시조나 엇시조는 신춘문예 광장에서 멀리 퇴장하고 평시조만 현대시조로서의 자리를 잡아 가고 있다. 평시조 정형으로 한국형 현대정형시를 만들고 굳혀 나갈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다.
둘째, 2수 이상의 연시조가 신춘문예의 주를 이루며 표현의 범위를 넓히고 대다수 연시조는 수의 구별이 뚜렷하고 3장 6구가 반듯하다. 아직도 자유시를 흉내 내어 수의 구별을 없애고 심한 파형을 한 경우가 없지 않으나 매년 조금씩 개선되어 정격으로 가고 있다.
셋째, 19C 서정시나 사랑시를 벗어나 다양한 현대생활을 자유롭게 그려내는 쪽으로 방향이 잡혀있다.
한 편 오늘날의 신춘문예는 태생적인 환경 때문에 부정적인 면도 여전히 남아있다.
(1) 많은 경쟁자 중에서 특별히 돋보이기 위하여 추상적인 표현으로 독자를 속이기도 하고, 많은 시어를 낭비해 가며 여러 수(首)로 부풀려 역작(力作)인 양하거나 현학적(衒學的)인 글 장난으로 명작인 양 으스대며 관심을 끌기도 한다.
(2) 작품의 문학성에 중점을 두지 않고 일회성 인기영합적인 시사문제를 다루거나 작품 밖에서 주(註)를 달아 상황설명을 하며 높은 점수를 바라기도 한다.
(3) 심사위원들의 편견, 자질 또는 실수 때문인 심사 잘못도 눈에 띈다.
(4) 신춘문예는 문학단체가 아닌 언론사가 운영하므로 응모자는 1회 당선만 바라고 심사자는 1회 결과 발표로 책임이 면해지는 반짝 행사가 되어 표절시비, 중복투고, 당선취소 등으로 얼룩지기도 한다.
이하 2012년도 12개 언론사의 신춘문예시조를 조명하여 본다.
[2012 신춘문예 작품들]
1. 중앙일보 연말시상
< 대상 >
누이감자
권갑하
1
잘린 한쪽 젖가슴에 독한 재를 바르고
눈매가 곱던 누이는 흙을 덮고 누웠다
비릿한 눈물의 향기
양수처럼 풀어놓고
2
잘린 그루터기에서 솟아나는 새순처럼
쪼그라든 시간에도 형형한 눈빛은 살아
끈적한 생의 에움길
꽃을 피워 올렸다
3
허기진 사연들을 차마 말로 못하는데
서늘한 눈매를 닮은 오랜 내력의 깊이
철없이 어린 꿈들은
촉을 자꾸 내밀었다
<신인상>
힘
- 도룡농
박 희 정
산다는 건 어떤 불의에도 굴하지 않는 건지
산이 무너지고 터널이 지나가도
천성산 도룡뇽 부부 헤어지지 않았다
무성한 탁상공론 아랑곳하지 않은 채
수맥을 이어주는 무량한 저 생명들
에둘러 제 터를 찾아와 목숨 끈을 잇는다
짝을 짓는다는 건 천상의 기도같은 일
통설을 깨트려서 세상의 귀 열어놓고
대성늪 봄볕 가득한 유백의 알을 보라
* 심사위원 심사평 심사위원: 장경렬 박기섭 정수자 (대표집필 박기섭)
권갑하의 ‘누이 감자’는 누이와 감자의 심상을 교묘하게 접합하면서 생존의 진경을 담아낸 작품이다. 자칫 애상에 빠지기 쉬운 주제를 밀도 있게 견인하며 뛰어난 서정의 성취를 보여준다. 허기진 생에 대한 연민, 그로 말미암은 눈물의 향기가 오랜 내력의 깊이에 닿아 있다. 비근한 소재의 변용이 이채롭거니와, 초·중장의 시상을 수렴한 종장의 결구 또한 견고하다. 올 한해 시조단의 표지(標識)가 되기에 부족함이 없다.
박희정의 ‘힘’은 생태환경의 정서에 밀착하고 있다. 무참히 자행된 훼손과 파괴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끈질기게 목숨 끈을 잇는 무량한 생명들의 전언이 절실하게 다가온다. 그 전언이 순명의 늪에 유백의 알을 남긴다. 그것이 자연의 힘이다. 그런 힘으로 행간의 긴장을 다잡는 데 진력하기를 빈다.
* 필자의 종합평
(주: 중앙일보는 신춘문예대신 연말 종합시상을 한다. <대상>과 <신인상>은 기성 시인 중에서, <신인문학상>은 당년도 시조백일장 입선자 중에서 선발한다.)
<대상> 수상작은 3.4 또는 4.4의 자리에 심지어 2.6 또는 5.2 까지 들어앉아 있는, 시조정형을 무시한 사이비 시조이다.
또한, 작품의 구조상 매 수마다 번호를 붙여 놓은 것은 무슨 의미인지 알 수가 없다. 3수 연시조라면 굳이 번호를 붙일 필요가 없고 각 수가 서로 연결고리가 없는 독립된 단수라면 각각 분리하여 3편의 시조로 해야 할 것이다. 제목이 같고 내용이 서로 다른 작품들은 제목 끝에 번호를 붙여 구별하는 것이 통례이다.
수상작 누이감자 1은 갓 심어 놓은 땅속의 감자, 2는 자라서 꽃이 핀 감자, 3은 촉이 올라오는 감자를 묘사하고 있다. 3수는 서로 밀접한 연결고리가 있어 연시조임이 분명하다. 따라서 굳이 매 수마다 번호를 붙일 필요가 없다.
더 중요한 것은 촉이 올라오는 3이 꽃이 핀 2보다 앞에 놓여 둘째 수가 되어야 무난한 작품이 되겠다. 시조형식에도 어긋나고 내용상 순서도 맞지 않아 명작은 고사하고 보통 수준에도 못 미치는 작품이라 하겠다.
<신인상>수상작은 파형음보가 많은 것도 모자라 수의 구별마저 없애버리고 자유시 흉내를 낸 사이비시조이다.
국책사업에 제동을 걸고 천문학적인 국가손실을 초래한 사건을 개인적인 판단으로 과대 포장하여 황홀한 무지개인 양 변조한 작자와 이를 심사한 심사위원들의 편견과 수준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수준 높은 예술작품은 언제 어디서 누가 보아도 거부감이 없는 내용이며 아름다운 표현물이어야 한다. 설사 천성산 도롱뇽이 국가손실액보다 수 십 배의 가치가 있고 바로 멸종이 되므로 그들의 주장이 옳다고 치더라도 이런 시사문제를 다룬 작품은 일회성으로 끝날 뿐 오랫동안 독자를 붙들어 두지는 못할 것이다.
수상작은 [도롱뇽]의 철자도 [도룡농] [도룡뇽] 등으로 틀리게, 그리고 제목과 본문에서 서로 다르게 쓰고 있다.
이 작품 또한 흠이 많아 보통 수준에도 못 미치는 작품이라 하겠다.
<중앙신인문학상>
역에서 비발디를 만나다
유영선
이번 역은 여름역 초록그늘 여름역입니다
온도가 조금 올라도 모세혈관 불붙는 사람
심장을 던져버리고
내리시면 됩니다
눈빛마다 불이 붙는 가을역 곧 도착 합니다
南도 北도 한때는 저리 붉어 아팠는데
타는 몸 놓아버리고
바람처럼 내리세요
가슴에도 얼음 얼어 겨울역도 투명 하군요
눈물의 달빛 사다리 환승할 분 내리세요
초승달 허리에 피는
살풋 그리움 안고
다음 역은 꽃잎 날리는 아지랑이 봄 역입니다
노랑제비 애기똥풀 별빛보다 밝은 마음
손끝에 하늘 물 들 때까지
활짝 펴고 날으세요
* 심사위원 심사평 심사위원: 오승철 오종문 이종문 강현덕 (대표집필 오종문)
소통 꿈꾸는 따뜻한 마음, 신인다운 발상 돋보여
이 시조는 다소 미흡한 측면이 없는 것은 아니나 몰개성하고 정석화된 기존의 시풍에 편승하지 않고 나름의 개성을 획득하고 있다. 단절된 세상과 소통을 꿈꾸면서 마음 시린 이들의 삶을 따뜻하게 감싸 안아 희망의 봄으로 안내하는 현실 서정의 참신함과 신인다운 발상이 돋보였다.
* 필자의 작품평
형식상으로는 역시 많은 음보가 깨져 있어 3.4조의 시조리듬은 멀고 자유시의 리듬이 혀끝에 달려 있다.
내용면에서는 베네치아의 작곡가 비발디(Antonio Lucio Vivaldi, 1678-1741)의 ‘4계’를 연상하며 계절을 묘사한 작품인데 더운 여름에서 시작하여 화려한 봄으로 마무리하였다. 대다수 시에서 시적 화자가 자아(나)임에 비하여 이 작품의 시적화자는 열차 안내원으로, 독자에게 계절을 안내하는 형식의 색다른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형식과 내용 면에서 기성 시인의 <대상>과 <신인상>당선작보다 흠이 적고 신선한 맛이 있는 우수한 작품이다.
2. 조선일보
외계인을 기다리며
양해열
끽해야 20광년 저기 저, 천칭자리
한 방울 글썽이며 저 별이 나를 보네
공평한 저울에 앉은
글리제 581g*!
낮에 본 영화처럼 비행접시 잡아타고
마땅한 저곳으로 나는 꼭 날아가리
숨 쉬는 별빛에 홀려
길을 잃고 헤매리
녹색 피 심장이 부푼 꿈속의 ET 만나
새큼한 나무 그늘에서 달큼한 잠을 자고
정의의 아스트라에아,
손을 잡고 깨어나리
비정규직 딱지 떼고 휘파람 불어보리
낮꿈의 전송속도로 밧줄 늘어뜨리고
떠돌이
지구별 사람들
하나둘씩 부르리
*생명체가 존재하기에 적합한 조건을 갖춘‘또 다른지구’가 골디락스존 (GoldilocksZone)에서 최근에 발견되었다.
* 심사위원 심사평 심사위원: 한분순
환상을 현실적으로 녹이는 힘이 일품
당선작은 현실인식과 상상력의 결속이 시원 발랄하다. 이미지와 율격의 능숙한 조직
으로 구(句)와 장(章)맛을 살리며 단형의 구조미도 돋운다. 환상을 현실적 맥락 안에
녹여내는 힘 또한 일품이다.
거기에 ‘비정규직 딱지 떼고 휘파람 불어보리’에 머물지 않고 ‘떠돌이/지구별 사람들/
하나둘씩 부르리’로 나아가며 노마디즘 정신 같은 꿈의 건강성과 낭만성을 곁들였다. ‘초인’ 아닌 ‘외계인을 기다리’는 오늘을 살면서 배제당한 현실 속의 또 다른 ‘외계인’ 같은 ‘떠돌이’들과 함께하려는 자세와 신인다운 패기도 크게 보았다.
* 필자의 작품평
시조형식은 거의 지켜지고 있으나 깨진 음보가 많아 자수정형에는 미치지 못한다.
시적 화자는 비정규직 직장인으로 지구 외의 생명체가 존재하는 별을 발견하였다는 뉴스를 접하고 우주를 여행하며 현실에서 도피하고 싶은 심정을 토로하고 있다. 4수 중 3수가 뉴스내용과 그에 관련된 상상의 세계이며 마지막 1수가 현실로 돌아와 자신의 처지와 희망을 표출한 내용이다.
이 작품은 우주에 관한 상상의 세계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정작 독자에게 전하고자 하는 핵심인 비정규직 문제는 작게 다루었다. ‘비정규직’은 밥에 섞인 돌 같이 느닷없이 나타나 이질적이며 제목에 걸맞지 않다. 외계인이 비정규직 문제까지 해결해 주는가?
한 편 천문학 용어인 행성 [글리제 581g] 또는 그리스 신화 [아스트라이아(Astraea)] 등은 깊은 지식이 없는 독자들에게 작자의 ‘자기 지식 과시(誇示)’용으로 보이기 알맞겠다. 작품 밖에서 설명을 달기까지 하며 [글리제 581g]을 부각하여 시인지 천문학강의인지 모르게 하였다. 시는 시로 시작하고 시로 끝나야 한다. 학문이 아니며 주장과 논리가 아니다.
3. 동아일보
눈뜨는 화석
-천마총에서
황외순
소나무에 등 기댄 채 몸 풀 날 기다리는
천마총 저린 발목에 수지침을 꽂는 봄비
맥 짚어 가던 바람이 불현듯 멈춰선다
벗어 둔 금빛 욕망 순하게 엎드리고
허기 쪼던 저 청설모 숨을 죽인 한 순간에
낡삭은 풍경을 열고 돋아나는 연둣빛 혀
고여 있는 시간이라도 물꼬 틀면 다시 흐르나
몇 겁 생을 건너와 말을 거는 화석 앞에
누긋한 갈기 일으켜 귀잠 걷는 말간 햇살
*경북 경주시 황남동 고분군에 속하는 제155호 고분.
* 심사위원 심사평 심사위원: 한분순 민병도
상상력 깊은 역사 읽기 돋보여
‘눈뜨는 화석’은 감각적인 언어 구사와 상상력 깊은 역사 읽기를 보여줘 당선작으로
선택하였다. 부장품과 화석을 일체화시키는 과감한 비약마저도 현장시의 한계를 보완하는 역량으로 읽었기 때문이다.
* 필자의 작품평
비교적으로 깨진 음보가 적은 작품이다.
[낡]은 [나루]의 방언으로 시의 감상을 어렵게 하고 있다. 시는 대다수 일반인이 쓰는 보편어로 다듬어야 독자에게 감명을 주게 될 것이다. 자수정형에는 못 미치나 [고여 있는/ 시간(이라도)] [몇 겁 생을/ 건너와/ 말을 거는/ 화석] 등 표현이 이채롭다.
4. 서울신문
연암, 강 건너 길을 묻다
김종두
차마 떠나지 못하는 빈 배 돌려보내고
낯선 시간 마주보며 갓끈을 고치는 연암,
은어 떼 고운 등빛에 야윈 땅을 맡긴다.
근심이 불을 켜는 낯선 세상 왼 무르팍,
벌레처럼 달라붙은 때아닌 눈발 앞에
싣고 온 꿈을 물리고 놓친 길을 묻는다.
내일로 가는 길은 갈수록 더 캄캄해
속으로 끓는 불길 바람 불러 잠재우면
산과 들, 열하熱河를 향해 낮게낮게
엎드린다.
* 심사위원 심사평: 심사위원: 한분순 이근배
세련된 감각적 재단 돋보여
시조의 본질을 지키면서 감각의 세련된 재단으로 수려한 완성도를 확보했다. 주제로 정한 시점이 과거이나 박제된 이야기로 흐르지 않고 동시대와 교감할 수 있도록 생기를 불어넣은 형상화가 뛰어났다. 기승전결에서도 매끈한 흐름으로 긴 호흡의 이야기를 탄탄하게 직조하여 주시할 만한 정점에 이르렀다.
* 필자의 작품평
수의 구별을 없앤 변형시조이다. 자유시처럼 3수를 붙여 쓰고 [차마/ 떠나지 못하는/ 빈 배/ 돌려보내고] [낯선 시간/ 마주보며/ 갓끈을 고치는/ 연암,]과 같이 시조정형을 비틀어 버려야 속이 시원하고 작품성이 있는가?
구도자의 심정으로 여행을 떠나는 연암 박지원을 그린 작품으로 사극을 보는 기분이다. [열하熱河]는 한글과 한자를 모두 읽으라는 강요(强要)인가? 글은 말의 표기수단이므로 국어기본법과 통례에 따라 표기해야 한다. ‘熱河’는 괄호에 넣어야 할 것이다.
5. 부산일보
탯줄
- 거가대교에서
황외순
찰싸닥,
손때 매운 그 소리를 따라가면
갓 태어난 핏덩이 해 배밀이가 한창이다
어둠을 죄 밀어내며
수평선 기어오른다
비릿한 젖 냄새에 목젖이 내리는 아침
만나고픈 열망하나 닫힌 문을 열었는가
섬과 섬 힘주어 잇는
탯줄이 꿈틀댄다
당겨진 거리보다 한 발 앞선 조바심을
여짓대던 해조음이 다 전하지 못했어도
짠물 밴 시간을 걸러
마주 앉은 저 물길
* 심사위원 심사평 심사위원: 이우걸
팽팽한 긴장감과 신선한 비유 빛나
당선작은 팽팽한 긴장감과 신선한 비유가 확연히 빛났다. 꿈과 희망을 내장(內藏)한 개안(開眼)의 풍경이야말로 새해 아침에 어울리는 가락이기도 했다.
* 필자의 작품평
약간의 파형음보를 제외하면 자수정형에는 못 미치지만, 정격에 가깝다.
핏덩이 같이 솟아오르는 해, 섬과 섬을 탯줄로 잇는 거가대교 그리고 무슨 말을 할 것 같은 해조음을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제목의 탯줄이 거가대교임을 선명하게 드러내지 못하고 셋째 수는 [조바심] [짠물 밴 시간] 등 추상적인 시어를 남용함으로써 초점이 흐려져 의미가 제대로 전달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명사 [물길]로 끝을 맺어 글의 완결미를 실종시켰다.
6. 국제신문
떠도는 섬
-어느 독거노인의 죽음
유헌
엎어진 숟가락처럼 섬 하나 놓여 있다
막걸리 쉰내 나는 툇마루만 남아서
밤마다 갯바람소리 환청에 떨고 있다
느릿느릿 애 터지게 바람이 불어온다
둘이 같이 살아보자 옆구리 토닥이던
파도가 밀려왔던 자리, 절벽이 생겨났다
무연히 쓸어보는 방바닥엔 흰머리뿐
파도에 멍든 자리 동백꽃이 새살 돋고
창문을 더듬는 햇살, 하얗게 질려간다
칠 벗겨진 양철대문에 파도소리 출렁인다
그물코에 빠져나간 한숨들을 깁는가
오늘도 뱃고동소리 속절없이 지나간다
* 심사위원 심사평 심사위원: 정해송 전일희
하나의 제재를 집요하게 이미지로 조형
'떠도는 섬'은 독거노인의 죽음이라는 하나의 제재를 집요하게 이미지로 조형하여 현실 문제를 부각시킨 점이 우리의 마음을 더 사로잡게 했다.
* 필자의 작품평
깨진 음보가 많은 파형시조이다.
동백꽃이 새살 돋는 어촌, 낡은 집 툇마루, 한 생애를 마치고 섬처럼 놓여 있는 독거노인의 죽음을 담담하게 잘 그려 내었다.
7. 매일신문
비브라토
김석이
호수 위에 떠 있는 백조의 발밑으로
수없이 저어대는 물갈퀴의 움직임
점선이 모여서 긋는 밑줄이 떠받치는 힘
차선 위를 달리는 자동차의 바퀴들
꿈틀거리는 지면을 가속으로 쫙쫙 펴는
평평한 길 아래 있는 주름들의 안간힘
나뭇잎을 흔드는 바람의 손가락들
소리의 맹점 찾아 이리저리 누를 때
닫혔던 물꼬를 틀며 길을 여는 강물소리
부딪쳐야 파문으로 밀려오는 그림자
짓눌려야 짓물러야 풀어지는 소리 가닥
발끝에 온힘을 모아 중심을 잡고 있다
* 심사위원 심사평 심사위원: 이정환
주제의 깊이·시적 긴장 모두 제대로 구현
시조는 엄연한 정형시이므로 기율 곧 정형률을 잘 숙지하고 형식을 자유자재로 부리는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김석이 씨의 '비브라토'... 신선한 제목에서 비롯된 시적 긴장감이 네 수 전편에 고르게 깔려 있다. 음의 떨림 현상인 ‘비브라토’라는 음악 용어에 착안하여 결국 사람살이가 어떠해야 함을 구체적이면서도 명징하게 육화한 '비브라토'는 ‘물갈퀴, 자동차 바퀴, 바람의 손가락들’을 동원하여 주제를 탄력적으로 잘 구현하고 있고, 끝수에서 인생에 대한 품격 높은 자세를 보인다. ‘짓눌려야 짓물러야 풀어지는 소리 가닥’이라는 대목에서 고개를 절로 끄떡이게 하는 깊이를 획득하고 있는 점을 특히 눈여겨볼 일이다.
* 필자의 종합평
깨진 음보가 많고 수를 구별하지 않아 시조정형을 찾을 수 없는 1연 12행의 자유시이다.
심사위원은 ‘시조는 엄연한 정형시’라 하면서 정형을 무시한 작품을 뽑아 자가당착(自家撞着)에 빠져 있다.
[백조의 발밑으로 수없이 저어내는 물갈퀴]? 물갈퀴는 백조의 발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 또 [발밑으로]와 [발밑을]의 차이를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다. [평평한 길 아래 있는 주름들]? 길의 주름이 아니고 길 아래 또 자동차가 지나간 주름들이 있는가?
당선작은 말잔치로 기교를 부려 시의 품위를 높이려고 하였지만 [밑줄이 떠받치는 힘] [주름들의 안간힘] [길을 여는 강물소리] [파문으로 밀려오는 그림자] [짓물러야 풀어지는 소리 가닥] 등 알 수 없는 추상적인 시어들로 오히려 의미전달을 방해하고 내용이 산만하여 초점이 무엇인지 알 수 없게 하였다.
8, 경남신문
바람의 뼈
- 불일암
유선철
단순한 무대는 화려하고 장엄했다
오롯한 발자취, 죽음마저 연주였다
고요는 달빛을 풀어
그의 뜰 쓸고 갔다
모서리 동그마니 묵언에 든 나무 의자
그 아래 하얀 뼈가, 말씀이 묻혀 있다
망초꽃 흔들어놓은
바람이 거기 있다
* 심사위원 심사평 심사위원: 하순희 이달균
‘자신의 시’를 창작하는 힘 가져
‘바람의 뼈’는 시조가 필연적으로 가져야 하는 함축과 가락을 안으로 잘 갈무리하고 있어 안정적으로 정형률을 다스리는 힘을 보여준다. 무엇보다 신춘문예용 작품이 아닌 자신의 시를 창작하고 있어 신뢰를 갖게 한다. 이런 안정감은 반대로 날선 시대를 향한 시대정신을 담지 못한다는 비판에 직면할 수도 있다.
* 필자의 종합평
당선작은 깨진 음보가 많고 수의 구별이 없는 6연 8행의 자유시이다. 심사위원이 찬양하는 ‘정형률을 다스리는 힘’은 ‘정형을 깨는 힘’인가?
시적 화자는 불일암을 지나가는 바람의 뼈라고 하였다. 눈에 보이지 않고 손으로 잡을 수 없는 바람을 형상화하기가 쉽지 않지만 [죽음] [고요] [묵언] 등 추상어는 바람과 직접 연결고리가 없어 바람을 형상화하는데 도움을 주지 못하고 있다.
9. 경상일보
애기똥풀 자전거
박성규
색 바랜 무단폐기물 이름표 목에 걸고
벽돌담 모퉁이서 늙어가는 자전거 하나
끝 모를 노숙의 시간 발 묶인 채 졸고 있다
뒤틀리고 찢긴 등판 빗물이 들이치고
거리 누빈 이력만큼 체인에 감긴 아픔
이따금 바람이 와서 금간 생을 되돌린다
아무도 눈 주지 않는 길 아닌 길 위에서
금이 간 보도블록에 제 살을 밀어 넣을 때
산 번지 골목 어귀를 밝혀주는 애기똥풀
먼지만 쌓여가는 녹슨 어깨 다독이며
은륜의 바퀴살을 날개처럼 활짝 펼 듯
페달을 밟고 선 풀꽃, 직립의 깃을 턴다
심사위원 심사평 심사위원: 이근배
당선작 <애기똥풀 자전거>는 시적 발상이 참신하면서도 시상을 풀어나가는 솜씨가 자재롭다.
수명을 다해 버려진 자전거를 한 생명체로 되살려 놓으면서 “애기똥풀”을 등장시켜 빛나는 비상을 이끌어내는 생각의 힘이 4수의 시조에서 긴장감을 늦추지 않는다.
“색 바랜 무단 폐기물 이름표 목에 걸고”로 운을 떼고서 “페달을 밟고 선 풀꽃, 직립의 깃을 턴다” 의 마무리까지 빈틈이 보이지 않는다.
* 필자의 종합평
자수정형에는 못 미치나 음보율이 있는 파형시조이다.
이 작품은 내용면에서 처음 2수는 쓸모없이 버려진 자전거를, 다음 2수는 희망 있는 애기똥풀을 묘사하여 병치은유의 기법을 동원한 우수작이다. 다 같이 아무도 눈길 주지 않는 하찮은 존재이지만 애기똥풀은 희망을 불태우며 폐기물과 극명한 대조를 이루고 있어 독자에게 생의 용기와 감명을 주고 있다.
[제 살을 밀어 넣을 때] [직립의 깃을 턴다] 등 표현도 돋보인다.
10. 영주일보
아바타 한 켤레
문제완
잠이 깬 새벽녘에 물끄러미 바라보니
현관 쪽 신발들이 제 멋대로 잠들었다
고단한 입을 벌리고 코를 고는 시늉이다
늘 그렇게 아옹다옹 하루를 부대끼다
저들도 가족이라 저녁에 모여들어도
서로가 지나 온 길을 묻는 법 절대 없다
오고 가는 내 모든 길 묵묵히 따르느라
굽도 닳고 끈도 풀린 가여운 내 아바타여
부푸는 밤공기를 안고 나처럼 누웠구나
* 심사위원 심사평 심사위원 이승은(글). 강문신
서정의 진경과 흥미로운 상상력
온종일 주인의 행적을 낱낱이 알고 있으면서도 ‘서로가 지나온 길을 묻는 법 절대 없다’는 아바타의 단호한 내면세계를 흥미로운 상상력으로 풀어냈다. 사물의 실체를 바탕으로 하되 견고한 현실 감각과 자기심화과정에 성공을 거둔 작품이다.
* 필자의 종합평
약간의 깨진 음보가 있는 파형시조이다.
현관에 벗어 놓은 신발들을 의인화하여 부대끼며 살아가는 생에 대한 안쓰러움을 그려내고 있다. 뛰어난 발상이나 표현기법은 없지만, 신인작품으로는 손색이 없다. 깨진 음보를 정리하면 의미를 흩트리지 않고 자수정형까지도 개작이 가능하겠다.
11. 농민신문
호박(琥珀) 속의 모기
권영하
호박 속에 날아든 지질시대 모기 한놈
목숨은 굳어졌고 비명도 갇혀 있다
박제된 시간에 갇혀 강울음도 딱딱하다
멈추는 게 비행보다 힘드는 모양이다
접지 못한 양날개, 부릅뜬 절규의 눈
온몸에 깁스한 관절 마디마디 욱신댄다
은밀히 펌프질로 흡혈할 때 달콤했다
빠알간 식욕과 힘, 그대로 몸에 박고
담황색 심연 속에서 몇 만년을 날았을까
전시관에 불을 끄면 허기가 생각나서
호박 속의 모기는 이륙할지 모르겠다
살문향(殺蚊香) 피어오르는 도심을 공격하러
* 심사위원 심사평 심사위원: 민병도 백이운
상상력·소재의 확장 돋보여
이 작품은 행간마다 상상력의 힘이 느껴지고 소재의 확장이라는 측면에서 좋은 점수를 받았다.
* 필자의 종합평
음보정형은 잘 지켜지고 있으나 자수정형에는 못 미치는 작품이다.
아득한 세월, 호박 속에 갇혀서 온전한 형체를 보존하여 온 모기, 모기향을 뿌린 현대의 도시를 공격하러 호박을 깨고 나올지 모르겠다는 컨시트(conceit)가 돋보인다.
12. 불교신문
암자에 홀로 앉아
박 상 주
날 좀 때려주오
천년고찰 범종 치듯
안으로
다져놓은
전탑(塼塔)언어 청태(靑苔)눈물
빈 골짝
다 쏟아 붓고
나비 되어 가련다
* 심사위원 심사평 심사위원: 고 은
청각.시각 대비 살려낸 ‘묘경’
당선작 시조는 종소리와 ‘청태눈물’이라는 청각 시각의 대비를 살려내는 묘경을 이루었다. 다만 ‘때려라’라는 거센 표현이 산사 환경을 작위적이게 했다. 하지만 기승전결이 썩 좋았다.
* 필자의 작품평
시적 화자는 조용한 암자에서 명상에 잠겨 있다. 살면서 쌓아 놓은 말과 눈물을 모두 버리고 가벼이 가고 싶으니 ‘마치 범종을 치듯이 나를 때려 깨워 달라’고 서원(誓願)한다.
심사위원은 청각과 시각을 대비한 공감각적 작품이라고 찬양하지만 [범종]은 소리를 내는 ‘물건‘(시각적)이지 ‘소리’(청각적)는 아니므로 심사를 잘 못 한 셈이 된다.
당선작은 (1)초장이 거의 정격이지만 자수정형에는 못 미치고 (3434가 아님), (2)전탑(塼塔), 청태(靑苔) 등 어려운 한자를 동원하여 신세대 젊은이들이 읽기 어렵게 하였으며, (3)종장의 [빈 골짝]은 [빈 골짝에]라야 시의 흐름이 부드러운데 3자 틀에 억지로 구겨 넣어 의미전달을 방해한 것 등 사소한 흠이 있지만, 시조의 형식과 내용 양면에서 다른 신춘문예당선작에 비하면 수작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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