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다시 필사 시

<시>김대호 - 허공 버스 / 먼 날 / 내가 사는 신암 혹은 신앙(제10회 천강문학상 대상 )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21. 1. 19. 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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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

 

1

허공 버스

 

김대호

 

 

허공은 만원 버스다

발 디딜 틈은 고사하고 숨 쉬기도 힘들다

 

곗돈 떼인 여자가 친정 언니에게 무선전화를 한다

말을 내 보내는 동안에도 여자의 몸은 점점 뚱뚱해진다

머리에 파일로 저장된 분노는

압축이 풀리면서 온몸으로 번진다

여자의 입에서는 속기로도 받아적을 수 없는 말들이 쏟아져 나온다

그 일부만 언니의 귀에 담기도 나머지는 허공을 탄다

 

다음 정거장에서

무단 질주하는 카 오디오의 고음이 승차한다

심지어 소리가 되지 못한, 그러나 충혈된 눈빚으로 읽을 수 있는

억울하고 치욕스럽고 한 맺힌 생각들 승차한다

잠자는 사람 헛소리까지 보태진다

이제 허공버스는 멸균 안 된 말과 생각의 승객으로 인해 고약한 냄새까지 난다

무게를 이기지 못해 바퀴가 펑크가 날 지경이다

 

중력도 없이

비어 있다고 믿었던 허공

죽은 다음에 내 혼의 거처가 될 것이라고 상상한 그곳,

무색무취의 노선을 오가는 버스는 지금 만원이다.

 

 

<10회 천강문학상 대상 >

20211151853

 

2

먼 날

 

김대호

 

 

엄마는 허리가 기역자로 굽었다

키가 작아서 평소에도 남보다 바닥을 가까이 보게 되는 신체인데 이젠 바닥의 핏줄까지도 볼 수 있는 지경이 되었다

바닥을 그렇게 자세히 볼 수 있는 자세를 만들지 않아도

엄마 자신이 바닥 인생이었다

 

아버지가 주막에서 돌아오지 않는 동안 두 사람몫 밭일을 했다

엄마의 허리는 밭을 맬 때 수구리고

부엌일을 할 때 수구리고

바느질할 때 수구리고

남편을 기다릴 때 수구리고

잠을 잘 때도 수구린다

모두 바닥 쪽이었다

온전히 허리를 펴서 하늘을 보고 별을 보는 일은 애당초 엄마 인생에서 빠져 있었다

 

이제 엄마의 바닥은 바닥보다

독거노인의 눈 앞에 어른거리는 그리움의 거리이다

그 거리는 손에 잡힐 듯한 거리이다

자꾸 성가시게 눈 앞에 나타나는 죽음의 예감을

유리창에 낀 성에 닦아내듯 걷어내면

그 순간

잠시 얼굴을 보이는 연지곤지 찍은 부끄러운 색시 하나

허리를 편 채 신랑 얼굴에 핀 웃음기를 확인하던 먼 날이 보인다

 

 

<10회 천강문학상 대상 >

 

2021년 216일 오전 904

 

 

3

내가 사는 신암 혹은 신앙

 

김대호

 

내가 사는 신암은 외진 곳이다

포도밭과 축사가 있고 양식장을 가진 송어횟집이 있다

밤에는 뒷산에서 노루나 고라니가 내려온다

이곳에서 위장병이 낫기도 했지만 이곳의 환경이 내 병을 낫게 했다고 믿지 않는다

 

좋은 게 좋은 거 아니냐는 말 속엔 선악이 함께 들어 있다

나는 이곳 주민에게서 이 말을 여러 번 들었다

그때마다 나는 불리해졌다

그때마다 나는 말랐다

이 문장 때문에 거래가 성사되었다

보증을 서서 직장까지 잃은 선배랑 술을 마셨다

죽으려고 하는 선배에게

좋은 게 좋은 거예요, 라고 말할 뻔 했다

죽으려고 하는 사람에게서 힘을 얻으려고 하는 것은 좋은 일인가

지겨운 삶의 의지를 비웃다가

까면 계속 나오는 마트로시카를 생각했다

 

공기 좋은 곳에서 요양하다가 병이 호전되는 사람에게는 말로 할 수 없는 긍정이 있다

그 긍정은 표현할 수 없는 것이기에 애둘러 공기 핑계를 댄다

여기의 공기가 내 병을 낫게 했어요

사람은 변하지 않으면서 변한다

시간도 마찬가지이다

살고 있는 곳이 변하지 않으면서 변한다고 느낄 때

그의 병은 조금씩 호전된다

 

 

<10회 천강문학상 대상 >

 

2021126일 오전 9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