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상>
1
허공 버스
김대호
허공은 만원 버스다
발 디딜 틈은 고사하고 숨 쉬기도 힘들다
곗돈 떼인 여자가 친정 언니에게 무선전화를 한다
말을 내 보내는 동안에도 여자의 몸은 점점 뚱뚱해진다
머리에 파일로 저장된 분노는
압축이 풀리면서 온몸으로 번진다
여자의 입에서는 속기로도 받아적을 수 없는 말들이 쏟아져 나온다
그 일부만 언니의 귀에 담기도 나머지는 허공을 탄다
다음 정거장에서
무단 질주하는 카 오디오의 고음이 승차한다
심지어 소리가 되지 못한, 그러나 충혈된 눈빚으로 읽을 수 있는
억울하고 치욕스럽고 한 맺힌 생각들 승차한다
잠자는 사람 헛소리까지 보태진다
이제 허공버스는 멸균 안 된 말과 생각의 승객으로 인해 고약한 냄새까지 난다
무게를 이기지 못해 바퀴가 펑크가 날 지경이다
중력도 없이
비어 있다고 믿었던 허공
죽은 다음에 내 혼의 거처가 될 것이라고 상상한 그곳,
무색무취의 노선을 오가는 버스는 지금 만원이다.
<제10회 천강문학상 대상 >
2021년 1월 15일 18시 53분
2
먼 날
김대호
엄마는 허리가 기역자로 굽었다
키가 작아서 평소에도 남보다 바닥을 가까이 보게 되는 신체인데 이젠 바닥의 핏줄까지도 볼 수 있는 지경이 되었다
바닥을 그렇게 자세히 볼 수 있는 자세를 만들지 않아도
엄마 자신이 바닥 인생이었다
아버지가 주막에서 돌아오지 않는 동안 두 사람몫 밭일을 했다
엄마의 허리는 밭을 맬 때 수구리고
부엌일을 할 때 수구리고
바느질할 때 수구리고
남편을 기다릴 때 수구리고
잠을 잘 때도 수구린다
모두 바닥 쪽이었다
온전히 허리를 펴서 하늘을 보고 별을 보는 일은 애당초 엄마 인생에서 빠져 있었다
이제 엄마의 바닥은 바닥보다
독거노인의 눈 앞에 어른거리는 그리움의 거리이다
그 거리는 손에 잡힐 듯한 거리이다
자꾸 성가시게 눈 앞에 나타나는 죽음의 예감을
유리창에 낀 성에 닦아내듯 걷어내면
그 순간
잠시 얼굴을 보이는 연지곤지 찍은 부끄러운 색시 하나
허리를 편 채 신랑 얼굴에 핀 웃음기를 확인하던 먼 날이 보인다
<제10회 천강문학상 대상 >
2021년 2월 16일 오전 9시 04분
3
내가 사는 신암 혹은 신앙
김대호
내가 사는 신암은 외진 곳이다
포도밭과 축사가 있고 양식장을 가진 송어횟집이 있다
밤에는 뒷산에서 노루나 고라니가 내려온다
이곳에서 위장병이 낫기도 했지만 이곳의 환경이 내 병을 낫게 했다고 믿지 않는다
좋은 게 좋은 거 아니냐는 말 속엔 선악이 함께 들어 있다
나는 이곳 주민에게서 이 말을 여러 번 들었다
그때마다 나는 불리해졌다
그때마다 나는 말랐다
이 문장 때문에 거래가 성사되었다
보증을 서서 직장까지 잃은 선배랑 술을 마셨다
죽으려고 하는 선배에게
좋은 게 좋은 거예요, 라고 말할 뻔 했다
죽으려고 하는 사람에게서 힘을 얻으려고 하는 것은 좋은 일인가
지겨운 삶의 의지를 비웃다가
까면 계속 나오는 마트로시카를 생각했다
공기 좋은 곳에서 요양하다가 병이 호전되는 사람에게는 말로 할 수 없는 긍정이 있다
그 긍정은 표현할 수 없는 것이기에 애둘러 공기 핑계를 댄다
여기의 공기가 내 병을 낫게 했어요
사람은 변하지 않으면서 변한다
시간도 마찬가지이다
살고 있는 곳이 변하지 않으면서 변한다고 느낄 때
그의 병은 조금씩 호전된다
<제10회 천강문학상 대상 >
2021년 1월 26일 오전 9시 1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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