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필사 시

신경린 시선집 1...79.80.81.82.83.84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21. 1. 21.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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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
나는 부끄러웠다 어린 누이야

차고 누진 네 방에 낡은 옷가지들
라면봉지와 쭈그러진 냄비
나는 부끄러웠다 어린 누이야
너희들의 힘으로 살쪄가는 거리
너희들의 땀으로 기름져가는 도시
오히려 그것들이 너희들을 조롱하고
오직 가난만이 죄악이라 협박할 때
나는 부끄러웠다 어린 누이야
벚꽃이 활짝 핀 공잘 담벽 안
후지레한 초록색 작업복에 감겨
꿈 대신 분노의 눈물을 삼킬 때
나는 부끄러웠다 어린 누이야
투박한 손마디에 얼룩진 기름때
빛바랜 네 얼굴에 생활의 흠집
야윈 어깨에 밴 삶의 어려움
나는 부끄러웠다 어린 누이야

나는 부끄러웠다 어린 누이야
우리들 두려워 얼굴 숙이고
시골 장바닥 뒷골목에 쳐박혀
그 한 겨우내 술놀음 허송 속에
네 울부짖음만이 온 마을을 덮었을 때
들을 메우고 산과 하늘에 넘칠 때
네 투박한 손에 힘을 보았을 때
네 빛바랜 얼굴에 참삶을 보았을 때
네 야윈 어깨에 꿈을 보았을 때
나는 부끄러웠다 어린 누이야
네 울부짖음 속에 내일을 보았을 때
네 노래 속에 빛을 보았을 때

08.01.14/ 밤 1시 44분


80
함성喊聲

한때 우리는 말을 잃었다.
눈을 잃고 귀를 잃었다.
길은 어둠이 온 고을을 덮고
골목마다 안개가 숨을 막았다.

웃음을 잃고 노래를 잃었다.
어디고 가고 있는가 우리는 몰랐고
누구를 찾고 있는가 우리는 몰랐다.
꽃의 아름다움 저녁놀의 서로움도
우리는 몰랐다.

그러나 우리는 보았다 그날
이 어둠 속에서 일어서는 그들을.
말을 찾아서 빛을 찾아서
웃음을 찾아서 내달리는 그들을.
어둠을 내어모는 성난 아우성을.

구름 사이로 내비치는 햇빛을 보았다.
먼 숲속에 새소리를 들었다.
사람들은 거리를 메우고
이제 이 땅에 봄이 영원하리라 했으나
그러나 아아 그러나
모진 폭풍이 다시 몰아쳤을 때
우리는 잊지 않을리라 비겁한 자의
저 비겁한 몸짓을 거짓된 웃음을.

용기 있는 자들은 이 들판에 내어쫓겨
여기 억눌린 자와 끼어 섰다.
멀리서 울리는 종소리를 듣고 섰다.
저것이 비록 죽음의 종소리일지라도.

한 사람의 노래는 백 사람의 노래가 되고
천 사람의 아우성은 만 사람의 울음이 된다.
이제 저 노랫소리는
너희들만의 것이 아니다.
우리는 모두 어깨를 끼고 섰다.

08.01.14/아침 9시 16분


81
친구여

『씨올의 소리 창간 7주년에 부쳐』

한밤에 눈을 뜨고 있는 친구여
일어나라 일어나라 외치는 친구여

벌판을 짓이기는 바람
거리를 덮는 흙먼지를 우리가
아직 보지 못했을 때

그리하여 부러지는 풀모가지
쓰러지는 나무기둥들을
아직도 우리가 보지 못했을 때

친구여 너는 부르짖었다
보라 보라고 흙담 너머로
쏟아지는 저 꽃이파리를 보라고
찢기고 멍든 꽃이파리를 보라고

한밤에도 잠을 자지 않는 친구여
눈을 떠라 눈을 떠라 외쳐대는 친구여

시골 장터 뒷골목
목롯집 뒷방에 술이 취해 쓰러져
해야 할 일을 우리가
아직 찾지 못하고 있을 때

오직 절망하고
절망하고 뉘우치고
다시 술이 취해 쓰러져 있을 때

친구여 너는 부르짖었다
일어나라 일어나라고 어두운
거리에 깔리는 저 아우성을
들으라고

친구여 한밤에도 눈을 부릅뜨고
일어나라 일어나라 외쳐대는 친구여


08.01.14/아침 9시 24분

82
찔레꽃

아카샤꽃 냄새가 진한 과수원 샛길을
처녀애들이 기운없이 걷고 있었다
먼지가 켜로 앉은 이파리 사이로
벌리 실공장이 보이고 행진곡이 들리고
기름과 오물로 더럽혀진 냇물에서
아이들이 병든 고기를 잡고 있었다
나는 한 그루 찔레꽃을 찾고 있었다
가라앉은 어둠 번지는 종소리
보리 팬 언덕 그 소녀를 찾고 있었다
보도는 불을 뿜고 가뭄은 목을 태워
마주치면 사람들은 눈길을 피했다
겨울은 아직 멀다지만 죽음은 다가오고
플라타너스도 미루나무도 누렇게 썩었다
늙은이들은 잘린 느티나무에 붙어앉아
깊고 지친 기침들을 하는데
오직 한 구르 찔레꽃이 피어 있었다
다가오는 죽음의 발자국을 울고 있었다

08.01.14/아침 9시 27분


83
바람

1

늙은 가로수 헐벗은 가지에 매달려
칭얼댄다 소생하라 소생하라고
도장포 찌그러진 간판에 엉켜 운다
미장원 밝은 유리창을 흔들어댄다
어린 처녀애들이 허벅지를 드러내놓고
킬킬대며 장난질치는 것들을 엿본다

바람은 진종일 읍내를 맴돈다
밥집을 기웃대고 소줏집을 들락인다
싸전 윷놀이판을 구경하고 섰다가
골목을 빠져 언덕 토담집들을 뒤진다

짐꾼의 리어카에 실려 덜덜대며
다시 시장바닥으로 내려와서는
소경 부부 아코디언에 신명을 낸다
저물면 잠을 자러 온다 바람은

갯바닥에 팽개쳐진 어지러운 철거민촌
천막을 들치면 해수 앓는 늙은 아내
극장을 돌며 과일 파는 다 큰 딸
일어나라 일어나라 들쑤셔대도
바람이 녹이기엔 절망이 너무 깊어

이리저리 뒤척이다 거리로 나오는 바람
시계방 입간판을 넘어뜨리고
아직 찬 온 읍내를 흙먼지로 휘덮는다
묵은 나뭇잎을 시궁창에 몰아치고

거짓된 자의 창에 돌이 되어 쏟아진다
비겁한 자의 창에 파도가 되어 깨어진다

2

삼월이 오면 바람이 다시 우리를 속이고
우리가 바람이 되어 진종일 읍내를 돈다

08.01.14/아침 9시 34분


84

오지일기奧地日記


거리에는 아직 가을볕이 따가웠다.
수수밭에 바람이 일고
미루나무가 누렇게 퇘색해도
활석광산으로 가는 트럭이 온 읍내를
먼지로 뒤덮는 추분.

그 탁한 먼지 속에서 나는
한 여자를 알게 되었다
우리는 사랑을 하게 되었나보다
지치고 맥빠진 따분한 사랑을.

사과가 익는 과수원을 돌아
거기 연못을 찾아가면 여자는 이내
말을 잃고 나는 그 곁에서
쓴 막소주를 마셨다

어디에도 내 친구들은 없었다.
연못 위에는 낮달이 떴으나
떠도는 것은 숱한 원귀들뿐이었다
여자는 더욱 말을 잃었지만

삶은 갈수록 답답하고 가을이 와도
읍내는 온통 먼지로 뒤덮였다.
물가 술집 마루에 앉으면
참빗장수들 구성진 노랫가락
물바람 타고 오고

바라보면 멀리 뻗친 고갯길
타박대는 오지 장꾼들 또 일소들.
여자의 치마에 개흙이 붇어 돌아오는
미루나무가 누렇게 퇴색한 언덕길에서

우리는 사랑을 하게 되었나보다
지치고 맥빠진 그 따분한 사랑을.
수수밭에 바람이 일고 추분이 와도
거리에도 지붕에도 간판에도 가슴에도
온통 뿌옇게 먼지만 쌓였다.

08.01.14/ 아침 10시 7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