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시의 문제점을 진단해본다 /이승하
시집이 꽤 많이 판매되고 있다는 뉴스를 접하고 시집 베스트셀러 순위를 살펴보았다. 시집 부문 2017년 베스트셀러 1위는 김용택 시인이 편한 『어쩌면 별들이 너의 슬픔을 가져갈지도 몰라』이고 2위는 속편이라고 할 수 있는 『어쩌면 별들이 너의 슬픔을 가져갈지도 몰라+플러스』인데 이 두 시집이 작년 연초 1월 21일에 방영이 끝난, 수년 내 최고의 히트작 드라마 <도깨비>에서 주인공 공유가 읽고 있던 시집이었기 때문이라는 후일담은 왠지 뒷맛을 씁쓸하게 한다. 시집 자체의 질적 함량이 독자들의 구매 욕구를 불러일으킨 것이 아니라 텔레비전 드라마의 영향력 '덕분'이라고 하기에 그렇다.
이런 경우는 전에도 왕왕 있었다. 드라마 <시크릿 가든>에 몇 권의 시집이 화면에 비치거나 현빈이 들고 읽자 불티나게 팔렸고, 그러자 아예 세트로 만들어 팔기도 했으니 말이다. 영화 <편지>에는 황동규의 「즐거운 편지」가 인용된다. 한 번도 편지를 써본 적이 없는 남편이 편지를 받고 싶다며 조르는 아내의 생일에 편지 대신 건네준 것이 시였다. 이 시가 실려 있는 『삼남에 내리는 눈』은 순식간에 6만 부가 팔렸다고 한다. 이렇듯 드라마나 영화 ‘덕분’에 시집이 잘 나간 예는 더 있을 테지만 이 정도에서 줄이고, 다시 2017년 시집 베스트셀러를 살펴보자.
3위는 나태주의 『꽃을 보듯 너를 본다』, 4위는 윤동주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5위는 박준의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6위는 고은의 『순간의 꽃』, 7위는 하상욱의 『시 읽는 밤-시밤』이다. 윤동주의 시집을 제외한 나머지 시집들의 두드러진 특징은 짧다는 것(나태주, 하상욱)과 리듬감(나태주, 고은)과 연가풍(나태주, 박준)이라는 것이다. 독자들은 이제 긴 시가 실려 있는 시집과 산문조로 쓴 시집을 구매하지 않고, 예나 지금이나 연애시를 좋아한다. 베스트셀러 시집이 좋은 시집이라는 등식은 성립하지 않는다. 그런데 왜 잘 나가느냐 하는 문제를 놓고 볼 때 단형, 리듬감, 연가풍 이 세 가지는 구매의 원동력이 된다.
미래파 시인을 비롯한 몇몇 시인이 즐겨 쓰는 상당히 긴 시, 혹은 난해 일변도의 시는 독자도 힘들어했지만 시인 자신도 쓰기 힘들었는지 미래파와 그 후예들의 활동이 예전처럼 활발하지 않다. 독자도 외면을 하게 되었지만 문학평론가들도 읽는 것이 힘들어서인지 언급을 안 하다 보니 어느덧 그들이 창작 일선에서 물러서 버린 것이다. 이 시점에 우리가 눈여겨보아야만 할 동인이 있으니 ‘작은詩앗 채송화’다. 2017년 12월에 동인지 제18호를 낸 이 동인의 지금 멤버는 김길녀ㆍ나기철ㆍ나혜영ㆍ복효근ㆍ오인태ㆍ윤효ㆍ이지엽ㆍ정일근ㆍ함순례다. 7명의 동인이 2008년 3월에 창간호를 낸 지 이제 8년이 되었다. 짧은 시 쓰기 운동을 벌이고 있는 이들은 테마시도 써보고 문예지에 실린 짧은 시를 골라내 평을 쓰기고 하고 작고시인의 짧은 시를 소개하기도 한다. 원로(초대시 코너)와 중견과 신인(채송화의 친구들 코너)에게 짧은 시를 청탁해 싣기도 한다. 제18집의 시 세 편을 읽는다.
이만하면 다 태워낸 생이므로 돌이킬 생각 없느니 나 지금 내소사 꽃살문 같은 여자 하나 손잡고 저 검은 전나무 숲길을 걸어 들어간들
들어가서는 다시 나오지 않은들
―오인태, 「내소사, 또는 내연에 들다」 전문
하느님께서
순교 현장의 순교자들을 보시다가
기어이 울음을 터뜨리셨다
나를 모른다고 해라
고통을 못 참겠다고 해라
살고 싶다고 해라
나의 고통이 부족했다면
또다시 십자가에
못 박히겠다고 해라
―김남조, 「순교」 전문
동인 중 한 사람인 오인태의 시는 유머가 있는 짧은 시이고 문예지에서 찾아서 실은 김남조의 짧은 시는 충격과 감동을 준다. 오인태 시의 화자는 나이가 지긋하다. 하지만 “내소사 꽃살문 같은 여자 하나”의 손을 잡고 검은 전나무 숲길로 걸어 들어가려고 한다. 은밀한 곳에서 둘만의 은밀한 시간을 갖기 위해서임을 독자가 모를 리 없다. 그것이 설사 불륜의 사랑이라고 한들 화자는 후회하지 않을 모양이다. 어차피 살 만큼 산 목숨, 무얼 더 바라겠는가 하는 화자의 마음이 읽혀진다. 짧지만 독자의 뇌리에 오래 맴돌 시다.
이 땅에서 하느님을 믿었기에 순교한 이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시인은 생각한다. 그 현장을 하느님이 와서 보았다면 울음을 터뜨렸을 것이라고. 배교를 하고 목숨을 구하라고 외쳤을 것이라고. 제2연에 가서는 내용이 좀 복잡해진다. 삼위일체사상이 내포되어 있는 연이다. 여기서는 나는 하느님(성부)이기도 하고 예수(성자)이기도 하다. 성부가 성자에게 말한다. 네가 기원 30년 4월 7일에 당한 십자가형의 고통이 부족했나 보다. 순교를 각오하고 끔찍한 고통을 당하고 있는 그들 앞에서 네가 다시금 십자가에 못 박히는 형을 당하겠으니 참아달라고 말하라고 한다. 그런데 필자의 이러한 해석이 과연 옳은 것일까? 시가 짧지만 해석이 얼마든지 달라질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시는 또한 각운을 잘 살림으로써 운율이 있는 시가 되게 하였다.
나무는 늙을수록 멋있지
왜 그런 줄 아나?
겉 나이를 먹지 않고
속 나이를 먹기 때문이지
―김영삼, 「자문자답」 전문
초대시인 김영삼의 시도 짧다. 늙을수록 나무는 멋있어지는데, 표면상의 이유는 속 나이(나이테)를 먹기 때문이지만 이 시의 주제는 그게 아니다. 나도 이제 곧 환갑(시인은 1959년생이다), 염색을 하거나 겉으로 멋을 낼 것이 아니라 내면의 성숙을 이룩해야겠다는 다짐을 해보는 것이 이 시의 주제다.
작은 꽃인 채송화의 ‘은근과 끈기’를 본받아 이들은 꾸준히 짧은 시 쓰기 운동을 전개하고 있는데, 그 운동이 널리 확산되기를 바란다. 우리 시가 어느새 ‘횡설수설’이 돼버린 데 대해 이들은 경종을 울리고 있다.
세상에는 운문과 산문 두 가지 종류의 글이 있는데 시인들이 운문을 쓰지 않으면 시는 결국 사라져버릴 것이다. 우리 시가 20세기에 들어와 얻은 것은 자유요, 잃어버린 것은 리듬감, 즉 운율이다. 장장 2,500년 동안 시는 눈으로 읽는 '詩'가 아니라 입으로 읊조리는 '詩歌'였다. 古代歌謠, 鄕歌, 高麗歌謠, 時調(時節歌調), 景幾體歌, 龍飛御天歌, 月印千江之曲, 歌辭……. 歌, 謠, 曲이 반드시 붙어 있었다. 하지만 서구 자유시의 유입 이래 우리 시는 가락을 서서히 잃게 되었고, 결국 독자도 잃게 되었다. 자유시는 ‘운율’이라는 전통을 배격해야지만 ‘자유’를 획득하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서와 사상을 운율적이고 함축적으로 표현한 문학의 한 갈래”라는 시의 정의를 생각해본다면 산문보다 짧기 때문에 시가 아니고, 운율과 함축성이 있어야 시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시는 운율을 잃어버렸고 함축적이지도 않다. 도대체 무엇을 시라고 할 수 있는가?
조동일은 『한국 시가의 전통과 율격』(한길사, 1982)에서 3음보격을 계승한 시인으로 한용운ㆍ김소월ㆍ김영랑을 꼽았고, 4음보격을 계승한 시인으로 이상화를 꼽았다. "2ㆍ3ㆍ4음보의 결합에 의한 새로운 형식의 창조"를 보여준 이로 이육사를 꼽았다. 우리의 전통적 율격을 잘 계승한 시, 아니, "전통적 율격을 새로운 창조를 위해 변형시켜 계승"한 시를 훌륭한 시로 평가했던 것이다. 조동일의 관점에 의하면 지금 이 시대의 시인 중에는 박이도나 송수권, 허형만, 나기철 같은 시인이 훌륭한 시를 쓰는 좋은 시인이 아닐까.
2016년 노벨문학상 수상자는 20세기 최고의 싱어송라이터(음유시인) 밥 딜런이었다. 그가 만든 노래의 노랫말에 담긴 반전사상이나 문명비판사상을 높게 평가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수상 이유의 전부가 아니었다. 스웨덴한림원은 "미국 노래에서 새로운 시적 표현을 창조해내며 귀를 위한 시를 썼다."고 수상 이유를 밝혔다. 이 수상 소식이 우리나라 시단에는 별다른 울림을 주지 못한 것 같다. "귀를 위한 시", 즉 노랫말의 문학성을 높이 산 것이었으며 시 같은 가사를 쓴 시인이었기에 문학상을 준 것이었다. 좋은 노래는 멜로디만 좋아서 되는 것이 아니다. 가사가 좋아야 한다. 좋은 가사란? 시적인 가사여야 한다. 노래로 만들기 위해 썼기에 리듬감을 지닌 것은 당연하였고, 밥 딜런은 거기다 함축성을 지닌 노랫말을 지어 붙였기에 그가 노벨문학상을 받은 만한 사람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소월의 시가 유독 노래로 많이 만들어진 이유가 무엇인가. 민요의 가락이 배어 있는 시가 많았기 때문이다. 지금 그런 시를 쓰는 이가 있는가? 전통을 무시하는 것이 무조건 바람직하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민요조 서정시가 아니더라도 "자기 내부의 감정을 운율적으로 나타낸 시"라는 서정시에 대한 사전적 정의를 상기해본다면 운율의 상실은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이제 연가풍의 시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자. 이런 유의 시를 많이 써보지 않아서 할 말이 없지만 시단에서도 인정받고 독자의 사랑도 받고 있는 시인들, 예컨대 정호승ㆍ김용택ㆍ안도현ㆍ도종환 시인을 생각해보면 답이 나온다. 이들의 시 가운데 연애시로 간주할 수 있는 것이 참으로 많다. 잃어버린 사랑을 다룬 고구려 2대 왕 유리왕이 지은 「황조가」 이후 향가와 고려가요, 시조 중에도 연애시는 꽤 많았다. 유리왕의 「황조가」는 기원전 17년에 창작된 것인데, 그 이후 정말 많은 연애시가 나왔다. 시단에서는 인정해주지 않지만 베스트셀러가 된 연애시집을 낸 시인들도 있다. 류시화ㆍ서정윤ㆍ김재진ㆍ김기린ㆍ이정하ㆍ원태연ㆍ용해원 등이다. 이들이 낸 시집의 판매 권수를 합치면 각자 100만 권 이상을 기록했다. 모두 다 연애시집으로 봐도 좋다.
이상하게도 우리나라에서는 연애시집이 정말 많이 나가서 기획 상품을 만들 듯이 ‘시인 아무개가 엮은 연애시’ 하는 식으로 타이틀을 붙인 시집이 계속해서 나오고 있다. 이렇게 한쪽으로 편중된 독자의 성향이 바람직한 것이라고는 말하기 어렵지만, 시의 발생론 중 하나가 이성을 유혹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하는 학자도 있는 것을 보면 이런 유의 시집이 꾸준히 인기를 유지하는 이유를 무시할 수는 없겠다. 아무튼 박준의 시집이 작년에 이어 올해도 수십 쇄를 찍은 이유는 연애시풍의 시가 많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시집 구매층이 젊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연애시집은 앞으로도 계속해서 독자 대중의 마음을 두드릴 것이다. 다시 말해 소비형 제품이 양산될 수 있다는 것이다. 대체로 베스트셀러 연애시집은 독자의 연애 감정을 가볍게 자극하므로 중층의 의미를 갖기 어려우며, 따라서 단순하거나 유치하다. 독자는 심각하거나 심오한 사랑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지 않는다. 노래방에 가서 부르는 노래가사처럼 뻔한 내용이지만, 내 감정을 대신해준다면 그것으로 만족한다.
네 번째로 지적할 것은 토착어를 잃어버린 데서 오는 것이라고 지적해볼 수 있다. 유종호는 「시와 토착어 지향」(1981)이라는 글에서 이렇게 썼었다. 그가 사용한 '토착어'라는 말은 사투리와 순우리말을 가리킨다.
외래어 및 외래 한자어의 무절제한 수용의 거부와 토착어 지향성이 한국 근대시의 자기발견과 자기동일성 성취에 결정적으로 기여했음을 보았다. (……) 토착어지향의 시인들은 최소한 느낌에 섬세한 구체성을 부여하고 드물게는 느낌과 생각의 통합에 성공했다고도 볼 수 있다. 이때 토착어는 보다 효율적인 통합의 단위로 작용하는 것이다. 그것은 기본적인 국어 단어로서 통시적으로 유서 깊은 역사를 가지고 있고 공시적으로는 많은 사람들의 공유 경험의 분담과 전달에 보다 많이 개입하고 있는 뿌리 깊은 말들이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그의 판단에 따르면 순우리말을 많이 구사한 이상화의 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는 수작이지만 한자어가 잔뜩 나오는 「二重의 死亡」은 졸작이다. 시의 질적 함량을 재는 자가 바로 토착어다. 정지용과 서정주의 성공작과 실패작도 이런 관점에서 평가한다. 모더니즘의 주요 이상이 이국취미와 문명비판인데 우리나라에서는 전자를 많이 취하였고 후자는 덜 취하였다. 일단 먹고사는 것이 문제였고 어느 시기에는 일본어를, 어느 시기에는 영어를 잘해야 지식인으로 대접을 받았기에 그런 것일까. 김경린과 조향의 시를 보면 외래어가 넘쳐나지만 순우리말은 가뭄에 콩 나듯이 나온다. 지금 어느 누가 김경린과 조향의 시를 읽고 있는가? 사투리를 구사한 시도 서정주 사후에 현저히 줄어들었다. 우리 시단의 빛나는 별들을 떠올려본다. 소월과 영랑, 백석과 오장환, 조지훈과 박목월, 김종삼과 박용래, 서정주와 박재삼, 송수권과 문충성……. 사투리가 이들의 시를 빛나게 한 경우가 얼마나 많았던가. 유종호의 관점을 따른다면 지나간 시대에 우리 시단의 총아였던 황병승과 김경주는 낙제점을 받을 것이다. 경남 양산 태생 현대시인 구순희의 시를 보자.
안들 팔짜 드르분 거라 카데예
맨날천날 몸띠이 단도리 잘해야 칸다캐도
안들이 가능 길
새하얀 고무신으로 빨밭길 건능기랑 똑같가카는데
첨엔 고무신 드르버지까바 단디단디 걷다가
한두 빵울 뻘땅물 튕기모
고단새 고무신도 찔척거리고 보선도 푹푹 빠진다카데예
글타가 마, 치아뿌라
낸주게는 푹푹 디디뿐다카덩가예
그라모 기양 끝짱이라 카네예
안들 팔자 조지는 거래예
어마이가 카데예
―「안들은 드릅다」 전문
사투리의 맛이 십분 살아 있는 이 시를 표준어로 썼다고 하자.
여자 팔자 더러운 거래요
매일매일 몸간수 잘해야 한다지만
여자가 가는 길
새하얀 고무신으로 진흙길 걷는 것과 똑같다는데
처음에는 고무신 더러워질까봐 조심조심 걷다가
한두 방울 흙물 튀면
그새 고무신도 질퍽거리고 버선도 푹푹 빠진대요
그러다가 에라, 모르겠다
나중에는 푹푹 디뎌버린다나요
그러면 그냥 끝장이래요
여자 팔자 망가지는 거래요
어머니가 그랬어요
이렇게 무미건조한 시가 되고 마는 것이다. 박경리의 『토지』와 김주영의 『객주』를 빛내는 것 중 하나가 사투리다. 언어의 지역성이 점점 옅어져 가고 있는 시대여서 그런지 「시와 토착어 지향」 같은 글은 생명력을 다한 것 같다. 김경주의 시집에는 비문이 유독 많은데 그의 구문 파괴 행위가 우리말의 가능성을 확대한 것이라며 칭찬을 받는다면 미래에 시라는 것이 과연 설 자리가 있을까. 유행어와 조어, 약어가 난무하는 카피 문구를 묶어 시집이라고 펴내는 하상욱은 21세기 한국 시단이 낳은 불세출의 영웅(?)이다. 노래의 전통을 이은 시가 부정되고 농담 한마디가 시가 되는 세상이다. 기이하고 새로웠기 때문에 하상욱의 시집이 지난 5년 동안 '낙양의 지가'를 올렸겠지만 '하상욱 현상'이 나는 결코 바람직한 현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의 작품을 시라고 불러야 할지조차 애매하다. 아무튼 간결한 발상은 신선하지만 시 구절이기보다 개그 프로의 대사 한 구절로 읽힌다. 촌철살인의 표현력은 미덥지만 이 세계에 대한 융합적인 사고가 과연 그의 시편들에 전개된 것인지 묻고 싶다.
한국 시는 다양한 변신을 거치며 지금에 이르러 있다. 자신만의 고유한 시세계를 세워나가려는 시인들의 고투 또한 치열하다. 그러나 요즈음 시집이 좀 잘 팔리고 있다고 하여 시의 시대가 다시 찾아왔다고 좋아할 수는 없다. 오히려 잘 팔리지 않는 시집들에 어떤 시들이 실려 있는지 눈여겨봐야 한다. 좋은 시는 우리를 감동시키고 경악케 하고 공감의 광장으로 인도하지 않던가.
―『문학 에스프리』 (2018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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