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16) / 근로자를 위하여 - 김신용의 '저녁길'
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16) / 근로자를 위하여 - 김신용의 '저녁길'
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16) / 근로자를 위하여 - 김신용의 '저녁길'
저녁길
김신용
그들의 함성에 중장비의 엔진은 호흡을 멈추었다.
현장 본부 앞마당에서, 머리에 띠를 두르고
답답한 가슴을 치듯 주먹 쥔 손을 흔들며
노동해방가를 부를 때, 파헤쳐진 공사장은
깊은 침묵 속으로 빠져들어 갔다.
우리는 손뼉을 쳤다. 이 땅의 곳곳에서
또 하루의 품을 팔기 위해 모여든 일용 인부들
그들의 힘찬 구호의 외침에 눈물마저 글썽였다.
이 하루, 공쳐도 좋았다. 그 수많은 나날
무릎 꺾여 살아온 노동의 하루쯤 무너져도 좋았다.
(……)
그들의 몸부림에 손톱 하나 보탤 수 없는 우리는
들풀처럼 부끄러웠다. XX토건,
노란 회사 마크가 새겨진 그들의 곤색 잠바 유니폼은
얼마나 부러웠던가…… 이윽고 며칠간의 파업은 끝났다.
그들의 고정급은 올랐고, 시간차 수당도 받게 되었다.
모든 중장비의 심장은 뜨겁게 박동치기 시작했다.
다시 새벽밥 먹은 통근차가 다니고, 우리들은
식반에 담긴 별을 헤아리며 새벽 함바를 나섰다.
여전히 앙상히 손금 드러낸 품삯을 받기 위해
왼종일 삶의 껍질을 벗겨내고, 또 뿔뿔이 흩어지는
저녁길, 그래, 한 사람이라도 더 잘살아야지……
헌 작업복, 흙투성이 운동화 발에 밟히는 공사판은 어스름 속
콘크리트와 철근의 뼈대만 앙상히 도드라져 있어도……
—『개같은 날들의 기록』(세계사, 1990)
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16) / 근로자를 위하여 - 김신용의 '저녁길'
<해설>
내일은 근로자의 날이다. 노동의 숭고함에 대해, 노동자의 거룩한 땀방울에 대해 생각해보는 시간을 갖는다. 김신용은 학교 공부를 거의 하지 못했다. 열네 살 때부터 직업전선에 뛰어들어야 했으므로 중학교 졸업장도 없다. 그러므로 공장에조차 ‘취직’할 수가 없었다. 일용직 노동자로서 건설현장 잡역부로 전전했다. 김신용 시의 공간은 무허가 판자촌, 역전 매음굴, 초량 텍사스, 양동 빈민굴, 쌍문동 아파트 신축공사장, 남대문 인력시장, 감방 마룻바닥, 뱃길 막힌 소래 포구 등 자신이 살았던 곳이다. 그런 곳에서 사는 사람들은 ‘일당’을 번다. 장마가 오면? 일할 곳이 없어 한 주 내내 한 푼도 못 벌 때가 있다. 그럼 채혈병원을 찾아가 헌혈을 하고 빵과 우유를 받아 허기를 달랜다.
이 시에서 ‘우리’는 일용직 노동자들이고 ‘그들’은 노란 회사 마크가 새겨진 곤색 잠바 유니폼을 입고 있는 공장 노동자들이다. 일용직 노동자들은 공장 노동자들이 마냥 부럽다. 며칠 파업을 하니까 고정급도 오르고 시간차 수당도 받는데 우리는 그런 개선을 꿈꿀 수 없다. 하지만 “한 사람이라도 더 잘살아야지” 하고 생각하면서 질투심을 품지 않는다. 우리들은 “콘크리트와 철근의 뼈대만 앙상히 도드라져 있어도” 그 현장에서 질통을 지고, 삽질을 하고, 철근을 옮기고……. 그대들이 살고 있는 집, 다니는 학교, 회사 등 모든 건물은 현장근로자들이 지은 것이다.
파업만 하면 무조건 임금이 오르고 근로조건이 좋아지는가? 박노해의 『노동의 새벽』이나 백무산의 『동트는 미포만의 새벽을 딛고』 같은 시집을 보면 지난 50년 한국 경제발전의 견인차 역할을 한 사람들이 누구였나를 알게 된다. 열악한 근로조건 아래서 “앙상히 손금 드러낸 품삯”을 받고 일했던, 지금 일하고 있는 이 땅의 노동자들에게 무한한 존경심을 보낸다.
출처 : 뉴스페이퍼(http://www.news-paper.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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