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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 /서일옥

서재 서일옥 책들이 방을 점령군처럼 차지했다 그들이 던져놓은 시끄러운 지식이 자꾸만 쌓이고 있다 부채負債처럼 쌓인다 날마다 어둠 속에서 책들끼리 다툰다 문을 닫아걸어도 귀를 막아보아도 그들의 격한 논쟁이 문틈으로 새어 나온다 이제 버려야 하나? 아직 두어야 하나? 몇 번을 들었다가 도로 놓곤 하지만 글자의 바늘에 찔려 발목을 접질렸다 ㅡ『가람시학』(2022, 제13호)

상처에게 말걸기 /김영재

상처에게 말걸기 김영재 이별을 앞에 두고 연인들 고백하듯 나는 나의 상처에게 이별을 고하리 어쩌다 참으로 오래 우리 함께 지냈다고 바람 부는 산에서 파도치는 바다에서 아파도 말 못하고 바람 불고 파도치듯 먼 나라 소식을 듣듯 그냥 흘려보냈지 마음이 쓰라려도 터놓고 말 못하고 그것이 사랑이란 걸 서로가 몰랐었지 저 혼자 인내하면서 피었다 지는 꽃처럼 ㅡ『가람시학』(2022, 제13호)

꽃적금 통장 /박재숙

꽃적금 통장 박재숙 장구채 노랑등심붓꽃 동강할미 노루귀 금꿩의다리 골든벨 처녀치마 바람꽃 복수초 장미수국 아나벨수국 앵초 산자고 뻐꾹나리 무스카리 물매화 찔레장미 넝쿨장미 들장미 화이트캔디 초화화 칸나 물양귀비 능소화 안개꽃 타래난초 운남앵초 섬말라리 숫잔대 수련 눈꽃 땅나리 아기쥐손이 청화쥐손이 노랑무늬붓꽃 가지피기매발톱 플록스나타샤 으아리매발톱 리아트리스 큰꽃으아리 연잎양귀비 유럽금매화 금화규 물망초 캄파눌라 흰금낭화 레위시아 운간초 풍로초 올해 만기 된 가을 정원 내년 봄엔 이자로 무슨 꽃적금을 들어야 할까 ―시사진집『천 년쯤 견디어 비로소 눈부신 』 (詩와에세이, 2022)

깜깜한 손 /안윤하

깜깜한 손 안윤하 막장의 어둠에 집어넣었으나 끝내 빼내지 못한 손이 석탄박물관에 걸려있다 누런 월급봉투를 외투 속주머니에 넣고 단추를 모두 끼워 닫는다. 이번 달에는 꼭 봉투째 마누라 손에 넘겨주리라. 고등어 한 손, 풀빵 한 봉지, 큰 애 검정 고무신 사 들고 기세등등하게 귀가해야지 시장은 어둑하고 배는 고프고 목은 컬컬하고 선술집 전구가 불그레 작부의 볼이 불그레 밤새 어깨 우쭐대던 검은 손이 불그레 텅 빈 새벽 별이 불그레 또다시 깜깜한 손! 호미로 나물죽 캐는 닳은 손, 밀린 학사금에 동동 구르는 텅 빈 손, 또다시 나락의 밑바닥을 긁어야 하는 막장의 저 손*! * 검은 손 : 문경의 석탄박물관에 걸려있는 손 사진 ―계간『시인시대』(2022년 겨울호)

프리지어 속말 번안하기―성민이 성聖미니 /이명숙

프리지어 속말 번안하기 ―성민이 성聖미니 이명숙 구름 터질까 말까 봄은 이용당했을 뿐 온 누리 거리두기 소울소울 가는 비 꿈인 듯 아치랑아치랑 기다림이 터졌다 사월 우울한 사월 별 헤듯 너를 헤아려 연두 초록 숲속의 심장은 널 가리켜 봄이야 오거나 말거나 콩닥대는 흰 설렘 상상은 바다 건너 새벽을 빌었을 뿐 천진난만 피어나 병알병알 오는 바람 늦둥이 이쁜 손주가 노을 창을 밀었다 ㅡ계간 『시조미학』(2022, 겨울호)

늙은 여우 /김금용

늙은 여우 김금용 벽에 붙은 햇살 몇 올 목에 감고 새벽부터 가쁜 숨 토해내는 매미의 비명 방충망에 달라붙은 채 배 한복판에 붙은 입술을 떨며 날 향해 울부짖네 창 좀 열어봐 떠날 날이 며칠 안남았어 전철 소음 속에서 받은 전화 탓이었을까 짜증내며 뱉어 버린 대꾸, 사랑보다는 이별이 쉬워 그래, 나는 겁쟁이야 무모한 나이가 아니거든 모난 생의 외곽에서 외치는 악다구니 내 영역이 아니라고 돌아서서 바로 직진하지만 몰라 자꾸 뒤통수가 뜨거워 미안해 그렇게 또 나는 못 본 척 도망치고 마네 아무래도 늙은 여우가 됐나봐 ―계간『시인시대』(2022년 겨울호)

막장에는 눈물이 있다 /이화은

막장에는 눈물이 있다 이화은 오전에 시집을 읽고 오후에 드라마 재방송을 본다 막장이다 시집인가 드라마인가 한 끗 차이다 한 끗 차이로 버스는 떠났고 권력은 이동하고 한 끗 차이로 너는 죽고 나는 살고 오전에 드라마를 보고 오후에 시집을 읽을까 한 끗 차이를 두고 갈등한다 인생을 낭비하고 있다 인생이란 말에 울컥 눈물이 난다 눈물이 흔해지니 내 인생도 막장에 다 왔나 보다 베고니아가 겨울 꽃을 견디고 있다 꽃을 눈물이라고 말한 시인이 있었던 것 같은데, 건달처럼 건들건들 또 하루가 왔다 간다 ―계간『시인시대』(2022년 겨울호)

밥 한 끼 /김명인

밥 한 끼 김명인 밥 한 끼 같이 하자는 너의 말에 그래야지 그래야지 얼른 대답했지만 못 먹어 허기진 세월 아니니 어떤 식탁에는 수저보다 먼저 절여진 마음이 차려지리라 애꿎은 입맛까지 밥상에 오른다면 한 끼 밥은 한 술 뜨기도 전에 목부터 메이는 것, 건성으로 새겼던 약속이 숟가락 한가득 눈물 퍼 담을 것 같아 괜한 걱정으로 가슴이 더부룩해진다 ―계간『시인시대』(2022년 겨울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