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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안 하는 애인 /박라연

아무것도 안 하는 애인 박라연 이 세상 모든 눈동자가 옛날을 모셔와도 마시고 만져지면서 닳아지는 물질이 이제 저는 아니랍니다 생각하는 일만 허용되는 색깔로 살게 되었습니다 천근만근 애인의 근심만은 입에 물고 물속으로 쿵 눈빛마저 물에 감기어져 사라질 태세입니다 그림자의 손이 아무리 길게 늘어나도 ㅉ이 ㅃ으로 ㄴ이 ㅁ으로 쳐질 때 있습니다 한계령에 낙산사 백사장에 우리 함께 가요,라고 말할 뻔했을 뿐입니다 생각만으로 벼린 색이 되는 날이 제겐 있었어요 그림자 스스로 숨 거두어 가주던 그날 배고픈 정신의 찌 덥석 물어주는 거대한 물방울의 색깔을 보았습니다 ㅡ시집『아무것도 안 하는 애인』(문학과지성사, 2022)

그린랜드* /이명숙

그린랜드* 이명숙 종말의 첫 문장은 그냥 몸으로 써라 끝장난 삶의 무대 수면제에 취하고 소문은 입을 막아도 매일매일 붉었다 바람보다 팽팽한 별빛은 별의 바깥 혼돈을 바라보는 삼색 고양이처럼 지문을, 지운 비문은 혼몽하게 웃었다 최초가 최후보다 먼저 와 문을 열면 최후가 최초를 믿어 일찍이 추락하면 상상을 주문하리라 공감 한 컷 찍으리라 * 미국 영화(2020) ㅡ해남문단 40호 『어너 풍경』(한국문인협회해남지부, 2022)

다 끝난 것처럼 말하는 버릇 /이명선

다 끝난 것처럼 말하는 버릇 이명선 내려다볼 수 있는 미래는 더 먼 미래로 가야 볼 수 있을까 말린 과일을 접시에 담으며 먼저 늙겠다는 네가 어느 순간 늙어 시계가 걸린 벽을 바라보았다 너의 테 없는 안경을 쓰고 양 떼가 이동 중인 초원을 거닐 수 있다면 움트는 새벽을 맞게 될지도 몰라 그간의 일에 슬픔이 빠지고 ​ 사람의 손을 네가 먼저 덥석 잡아 줄 리 없으니 내가 아는 너와 지금의 너는 다른 사람일 수도 있겠지만 다시 너에게 오는 사람이 지금의 너를 알아봐 주는 사람이면 좋겠다 ​ 나는 살갑게 네가 올려다볼 세상을 상상하면서 조금 더 늙어 버려 식탁에 앉아 말린 과일을 놓고 생애주기가 다른 바다생물 이야기에 벌써 눈부신 멸망을 본 듯 말하고 있다 ​다 끝난 것처럼 말하는 버릇을 우린 아직 버리지 못..

저 말이 가자 하네 /​오승철

저 말이 가자 하네 ​ 오승철 ​ ​ 사진작가 권기갑의 말 한 마리 들여놨네 고독은 고독으로 제련하란 것인지 삼백 평 눈밭도 함께 덤으로 따라왔네 ​ 10년 넘게 거실 한 켠 방목 중인 그 말이 불현듯 투레질하네 이 섬을 뜨자 하네 나처럼 유목의 피가 너에게도 있는 거냐 ​ 살아야 당도하는 사나흘 뱃길인데 해남인지 강진인지 기어이 가자 하네 고향도 하룻밤 잠시 스쳐가는 거처란 듯 ㅡ반연간『화중련』(2022, 하반기호)

홍엽전정紅葉傳情​ /오종문​​

홍엽전정紅葉傳情 ​ 오종문 ​ ​ 선 채 겉옷을 벗는 나무들이 소란하다 사는 게 별거냐며 초록이 빠져나가고 과묵한 햇빛 한 점이 당단풍에 내린다 ​ 산이 산을 가두고 물소리가 날 가둘 때 건널 수 없는 거리 마음에 이르기까지 먹먹한 가랑잎 하나 바람길을 묻는다 ​ 모든 것 입적을 한 이산 저산 적막강산 한 권 자서전 끝낸 그 환한 몸 밖에서 누군가 헌정한 말씀 고삐 풀고 웃는다 ​ ​ ​ ㅡ반연간『화중련』(2022, 하반기호)

분꽃의 시간​ /전연희​​

분꽃의 시간 ​ 전연희 ​ ​ 침목을 세며 걷던 어린 날이 지워졌다 ​ 자욱한 어둠 속에 벼랑을 젓던 날개 ​ 찢기고 부러지고서야 걸음 못내 멈추었다 ​ ​ 내 꿈이 무어 그리 무겁고 커다래서 ​ 어깨는 저려오고 무릎은 고단한가 ​ 길섶에 나앉은 분꽃 환히 웃는 저녁녘 ​ ​ ​​ㅡ시조집 『다시 토르소』(책만드는집, 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