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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의 입술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홍명희

나무의 입술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홍명희 나는 나무의 가느다란 줄기 하나가 내미는 동그란 열매를 손가락으로 받아먹었다 열매는 구운 은행처럼 연한 연두색이었고 말랑말랑했다 혀끝으로 열매를 굴리자 입안에서 노랗고 비린 피라미 맛이 났다 노란 알갱이에서 어린 피라미들이 깨어나기 시작했고 파닥거리며 입속을 헤엄치기 시작했다 입안이 간지러워라고 말하자 나무의 눈이 내 손을 잡아 그리고 눈을 감아라고 말했고 나는 약간의 어지러움을 느끼며 그네에서 막 내린 것처럼 잠시 흔들렸다 마음으로만 눈을 떠 그럼 날 수 있을 거야 나는 홀린 듯 심장 속에 깊이 숨겨 두었던 두 눈을 꺼내 엄지와 검지 두 손가락으로 집게처럼 눈꺼풀을 열었다 작고 낮은 웃음소리가 먼저 흘러나왔고 희미하게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 다니는 것이* 보이기 ..

입춘立春 /송기흥

입춘立春 송기흥 고흥읍 오일장 입구 노점의 고무 함지에서 손바닥만 한 가자미들이 흰배를 까뒤집으며 허공으로 팔딱팔딱 솟구쳐 오르고 있었다 스스로를 들어 올려 땅바닥으로 패대기를 쳐대는 무지막지한 놈들이었다 그런데 집에 와서 손질을 하려고 보니 아이고머니! 제 몸의 절반은 됩 직한 알 주머니 가득 찬 수천만 개의 노란 알들이 흐물흐물 흘러내리고 있었다 결단을 내린 어미의 심정이 거기, 있었던 것이다 ―시집『햇살을 구부리다』(천년의 시작, 2021)

바람의 기억 /홍명희

바람의 기억 홍명희 바람은 시작된 곳으로 되돌아간다 바람의 흔적을 찾아 근원지로 달려갔을 때 이미 바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종적을 감춘 바람의 동굴 속에서 미세한 숨소리를 더듬어 그 옷깃을 잡으려는 것은 바람 속에 녹아 있는 에스메랄다 향을 모아 주머니에 담으려는 것과 같은 몸짓이다 벼락을 동반한 빗속이나 높은 산을 넘을 때를 제외하곤 바람은 언제나 낮은 곳으로 흐른다 여덟 개의 다리를 가진 거미는 몸속에서 진액을 뿜어내어 바람의 방향을 따라 천사의 머리카락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양귀비의 넋은 바람을 타고 흐른다 민들레의 웃음도 바람을 타고 기구처럼 날아간다 지혜로운 여인은 젖은 옷을 말리고 아이들은 하늘로 연을 날린다 수명을 다한 꽃잎은 바람을 핑계대어 사방으로 흩어진다 바람의 기억은 내려앉은 꽃잎..

​내가 걷는 땅 /함태숙​

​내가 걷는 땅 함태숙 ​ 저는 지나가는 옵저버이겠으나 이 땅이 누구의 것인지를 알고 있 습니다 신들이 즐겨 입술을 대는 맹세에 차오르는 두 개의 떨림을 기도하 는 양손을 기도하는 양손을 모으듯이 밑으로 길게 흐르는 원추형 몸을 어깨를 스치며 지나가는 환영이여 석영처럼 각이 져 반짝이는 지 상의 가장 나쁜 쪽으로 건조한 추상의 고원위로 누추한 오두막과 다정한 찻잔과 그리고 낮은 음역대에서 길들이는 땅 속의 구름 빛마다 닿는 다른 면적에서 각기 다른 맛을 지닌 채로 시 간은 저 마다의 고유함을 익히고 정오의 긴 묵상이 순례의 행렬을 늘이는 공중의 땅 다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저는 지나가는 옵저버 먼 곳의 태양을 등지고 어루만지면 빛과 그림자, 손가락 틈새로 당 신의 빰을 만지던 그 감촉이 다..

너무 많은 여름​ /강재남​

너무 많은 여름 ​ 강재남​ 좀 더 행복하거나 덜 불행한 삶으로 가요 좋은 여름과 여름이 키 우는 대로 크는 나무가 있는 곳으로 가요 어정쩡한 날씨는 버려두 고요 비는 죄에 떨어질까 두려워하지 않는대요 누군가 말한 것 같은 데 생각을 굴려도 굴러가기만 하네요 빗물 고인 자리에 여름이 우 거져요 여름이 슬퍼요 생각을 버리기로 해요 딴청 부리기로 해요 나는 걷고 있어요 발자국 있는 곳마다 대추야자나무를 심어요 대추야자나무 열매 를 거꾸로 키워요 배경으로 걸어두기 좋은 구도로요 여름의 직관을 믿어보기로 합니다 말라가는 여름은 생략하면 그만이고요 스물여섯은 견디기 힘든 숫자였어요 그래서 발자국은 말을 잘 듣질 않았나 봅니다 대추야자나무는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걸까요 기다렸다는 듯 쏟아지는 표정 난해하고 불..

푸른 여권 /정한용​​

푸른 여권 정한용 ​​ 여권을 새로 만들었다. 수십 년 만에 바뀐 새 여권은 표지를 푸른색 으로 입혔고, 로고와 디자인도 훨씬 세련되어졌다. 보기 좋으니 성능 도 업그레이드되었을 테다. 세상 밖 더 멀리 갈 수 있을 것이다. 그렇 다면, 이제 떠나야지. 어디가 좋을까?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먼지 나 는 시골길을 다시 걷고 싶다. 터키와 그리스 쪽 지중해 바닷가 마을 에서 두 달쯤 사는 건? 폴리네시아 남태평양 이름 모를 섬에서 다이 빙 실력을 뽐내고 싶기도 하고. 남미도 가야 하는데 거긴 체력이 받 쳐줄지. 호주와 뉴질랜드 가서 캠퍼밴으로 대륙을 일주하는 것도 좋 을 텐데. 꿈은 즐거운 활력이니, 날 말리지 마세요. 지구를 세 바퀴쯤 돌고 나면, 이젠 어머니가 계신 안드로메다에 가고 싶다. 혹시 거기 아니..

철벽녀* /김매희

철벽녀* 김매희 들리는 헛소문에 얼굴에 지는 그늘 선불 맞아 데인 상처 다독여 여미는데 뒤통수 운운하면서 덤터기를 씌우네 끊임없는 혀의 말이 벼락 치듯 맞부딪쳐 솟구치고 나뒹굴며 세상살이 간을 본다 얼마나 더 뒤집혀야 훤한 속내 보일까 믿음을 저버린 채 남발한 수식어들 한때의 감언이설 두드려 덧바르니 보고도 믿기지 않네, 감쪽같은 커버쿠션 * 얼굴 잡티 커버하는 파운데이션 - 《시와문화》 2022. 겨울호

연애대학 결혼학과 /이소영

연애대학 결혼학과 이소영 어릴 땐 자전거 킥보드도 잘 타고 용돈 탈 때 엄마랑 밀당도 잘 하더니 커서는 남들 다 타는 썸 한 번 못 타냐 동창회 동호회 뻔질나게 나가서 우정이다 의리다 골백번 외쳐 봐도 연대가 연애로 읽히는 순간 저지르는 거야 화성에서 온 남자랑 금성 여자도 하듯이 거창한 꿈을 갖고 하는 게 아니란다 결혼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듯 하는 거야 ―『좋은시조』(2022. 겨울호)

월요일, 시간 한 폭 /정해송

월요일, 시간 한 폭 정해송 한적한 놀이공원 바람개비 혼자 돈자 확성기 동요 끄고 휴식하는 아침나절 잘 닦은 거울에 비친 풍경인 듯 참 맑다 실비 묻은 실안개가 바람결에 문양 일고 4월 손이 붓질하는 원근 구도 중심에서 하늘 속 고요를 길어 숨을 잣는 바람개비 응시하는 이쪽으로 날갯짓이 보내는 것 선이며 색깔이며 어순 없는 둥근 말들 내 시력 못 닿는 경계를 마음속에 그려준다 ―『시조시학』(2022. 겨울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