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시를 읽어야 할 시간
열무 /김신용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21. 2. 18. 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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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무
김신용
채 자라다 만 발육부진 같은, 시간이 거꾸로 흐른 것 같은, 태어나자마자 이미 늙은 것 같은 뿌리를 매달고 저기, 열무가 꽃을 피우고 서 있다. 그래, 세상은 너를 열무라고 부르지만, 너는 열등한 식물이 아니다. 너의 시계는 거꾸로 가지도 않는다. 너는 오직 네 뿌리만큼 작은 숨결을 가지고, 四季가 없는 너의 계절을 만든다. 부드러운 잎과 줄기는 여름 시골 장마당의 열무국수 같은, 그렇게 작은 세계를 꿈꿀 뿐이다. 너의 뿌리는 그런 작은 세계에 머물며, 작은 풀꽃들과 어울려 작은 풀꽃 같은 꽃을 피운다. 그것이 이 지구상에 태어난 너의 의미―. 오직 그것 하나로 뿌리 내려 작은 풀꽃 같은 꽃을 피우며 네가 선 땅을 밝힌다. 그래, 그것이 이 지상에 발을 디딘 이유―, 그러나 네 뿌리를 보면 안다. 그 발육부진 같은 뿌리 속에 어떤 질긴 심이 들어 있는지, 네가 찰나의 섬광 같은 꽃을 피우기 위해 뿌리 속을 어떤 강인함으로 채워 놓았는지―. 그래, 어떤 눈물겨운 작은 숨결이 대지에 뿌리를 내려, 그렇게 백치 같은 환한 낯빛의 꽃을 피우고 있는지―.
-계간『백조』(2020년 겨울호 제4호 복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