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21. 4. 13. 1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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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리퍼

 

이재무

 

 

슬리퍼를 신을 때마다 슬리퍼처럼

편하고 만만했던 얼굴이 떠오른다

슬리퍼는 슬픈 신발이다

막 신고 다니다 아무렇게나 이곳저곳에

벗어놓는 신발이다 언감생심 어디

먼 곳은커녕 크고 빛나는 자리에는

갈 수 없는 신발이다

기껏해야 집 안팎이나 돌아다니다

너덜너덜해지면 함부로 버려지는 신발이다

슬리퍼를 신을 때마다 안개꽃같이

누군가의 배경으로 살았던

오래된 우물 속처럼 눈 속 가득

수심이 고여있던 얼굴이 떠오른다

  

 

 

 

시집『데스벨리에서 죽다』(천년의시작,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