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시를 읽어야 할 시간

멈추지 않는 나무 /​​강순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21. 5. 14. 1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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멈추지 않는 나무

​강순

 

 

언젠가부터 밤을 읽는 습관이 생겼어요

 

사람들이 사라져간 버스 정류장

내가 읽던 가을밤 열두 시의 페이지는 23쪽

지친 얼굴을 목 위에 매단 알바생은

오지 않는 버스를 기다리며

그 페이지에 갇혀 목이 더 길어져

 

낮 동안 생채기 난 가지들이 위로를 주고받을 때

새들이 떠난 방향으로 병든 잎들

작은 유언도 못 남긴 채 떨어져내려

 

어지러운 소문을 뒤집어쓰고 도시를 돌아 나온 바람

내가 가진 별난 얘기를 나눠 줄게

한밤의 명치를 이리저리 흔들어댈 때

 

당신들이 아직 읽지 않은 오백 권의 시집만큼 뜨거워져

 

당신들은 심장에 박힌 무지개를 찾아 거리를 헤매고

나는 바람의 문장들 중 몇 개의 별점을 해독하는 중

 

은하수를 지키는 직녀는 옷감 대신 책장을 넘기며

죽은 새들을 살려내는 주문을 외고 있다네

직녀야 직녀야 네 이야기는 어디에서 다시 시작되니?

 

슬픔과 희망의 문장들은 일란성쌍둥이 운명

오십삼 페이지 얼룩진 자간에서도 서로를 찾네

 

정류장에 오래 머무는 실업자의 그림자는

주름진 밤을 뾰족하고 날카롭게 치대었던 냄새가 나

 

외로운 미물들이 눈물의 이유를 숨기는 이유는

입이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이지

 

따뜻한 입을 갖지 못한 고양이들이 거리를 부유할 때

나는 읽지 못한 수많은 페이지들을 상상해요

사실, 나도 내 페이지를 다 찾아 읽지 못했어요

 

밤을 읽는다는 건 흔들리고 흔들리는 것

고열 앓는 줄기와 뿌리를 지켜내는 것

 

당신들의 무관심에 어느 날 내가 다 뽑힐지도 모르겠어요

나의 해독법은 오류일까요?

 

 

 

―​​​웹진『시인광장』(2021년 5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