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감상해 보자
날, 세우다 /정지윤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21. 5. 18. 2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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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세우다
정지윤
동대문 원단 상가 등이 굽은 한 노인
햇살의 모퉁이에 쪼그리고 앉아서
숫돌에 무뎌진 손가락 쉼 없이 갈고 있다
지난밤 팔지 못한 상자들 틈새에서
쓱쓱쓱 시퍼렇게 날이 서는 쇳소리
겨냥한 날의 반사가 주름진 눈을 찌른다
사방에서 날아오는 눈초리를 자르고
무뎌진 시간들을 자르는 가위의 날
꽉 다문 노인의 앞니가 조금씩 닳아간다
늘어진 얼굴에서 힘차게 외쳐대는
어허라 가위야, 골목이 팽팽해지고
칼칼한 쇳소리들이 아침 날을 세운다
ㅡ시조집 『참치캔 의족』(책만드는집, 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