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ㅍ /윤은영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21. 8. 12. 1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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ㅍ
윤은영
풉, 하고 아주 잠깐 웃었을 뿐인데 입안에서 팝콘처럼 ㅍ이 터져 나왔다
ㅍ들이 이내 뭉쳐서는 모로 누운 하나의 커다란 사다리가 되었다
좌절한 사다리였다
나는 그것이 너무 무거워 바로 세우지 못하고 그저 넘어 다녀야만 했다
매일 밤 책상 위에서 미래를 빚었다
아침이면 펄펄 끓는 세상에 미래를 조금씩 떼어서 넣었다
도통 익지 않는 내 미래
사다리는 묵묵히 내 방에 누워 있기만 했다
젖은 날개를 신속히 말려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더 높이 도약하기를! ; 내 콧구멍을 비염으로 넘어뜨린 꽃가루 같은 말이 떠다녔다
노오력 노오력 노오력 ; 때 아닌 모기가 날아들어 이명 같은 울음을 던져 놓았
다
세우려는 몸부림이 과해질수록 사다리는 더 단단히 방바닥에 박혀 버렸다, 이건 2020톤쯤 되겠다
저 위에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베란다 창살들 멀쩡한 ㅍ들이 비웃고 있다, ㅍ의 공간 사이로 내 희망은 머리가 끼었다
세울 수 있으면 세워 봐, 올라올 테면 올라와 봐
세상의 모든 사다리들이 나를 내려다보며 비웃고 있었다
―시집『시옷처럼 랄랄라』(미네르바, 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