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시를 읽어야 할 시간

나무들의 아우슈비츠 /정재원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21. 9. 3. 0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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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들의 아우슈비츠

 

정재원

 

 

바람이 부는 동안

풀냄새와 휘발유 냄새가 났다

 

빨간 물감 칠하는 것은 노을이 아니었다

전기톱, 톱날을 저녁이 허리로 받아내고 있었다

 

벌목 표시,

빨간 물감 칠해진 나무들은

한 그루씩 한 그루씩 잘려나갈 것이다

 

공포에 질린 그늘은 듬성듬성 뚫렸다

풀벌레 소리 점점 희미해졌고

새들은 환청을 앓으며 멀리 날아갔다

 

굴참나무가 끌려간 산밑

구부러진 아랫길은 이제 단풍나무 그림자를 받아 안고

또 다른 괴담을 만들어냈다

 

달은 고개 돌리고

구름 속에서 나오지 않았다

 

새도 나비도 벌레도

다 떠나고 없는 깜깜한 숲

 

너는 누군가

그렇다면 나는 누군가,

물음과 울음 사이로 죽음의 향이 점점 더 짙게 번지고

 

나무들의 그림자가 다시 출렁거렸다

 

 

 

―시집『저녁의 책과 집을 잃은 노래』(문예바다, 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