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시를 읽어야 할 시간
도장을 팠다 /정홍순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21. 11. 9. 18:40
728x90
도장을 팠다
정홍순
충장로 도청 앞에서 인장 명인에게, 한 자에 만오천 원씩 주고 도장을 팠다 한 달 식권 값도 더 되는 삯, 선뜻 퍼주고 도장을 팠다 탄피만 한 상아, 한글로 새겨야 깨지지 않는다고, 떨면서 파던 명인의 손끝이, 광주를 더 슬프게 하였다 팔십칠년, 망월동에는 새 무덤이 늘어났다 비석에 그 이름 새겨지는 동안, 나는 인감도장을 팠다 혁명의 유월, 도장나무 까만 열매같이 가슴마다 검정 리본 달고, 독재 목 놓아 파내고 있는 동안, 나는 상아도장을 새겼다 붉은 피 묻혀 찍지도 못할 뼈다귀, 나도 낯선 내 이름을 팠다 코끼리처럼 죽은 유월의 아들, 도장밥에 대가리 박을 때마다, 꽃보다 더, 그 이름 붉게 떠오르는 도장을 팠다
ㅡ시집『향단이 생각』(문학의 전당, 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