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시를 읽어야 할 시간

필경사 /강신애​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21. 11. 23. 2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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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경사

 

강신애


​ 

악보 베끼는 일로 생계를 유지한 루소

한 권의 책을 읽고

평생 그 책을 베끼는 일을 집업으로 삼은 이스탄불의 사내

  

빗방울 음표들, 고독한 부호들, 빠짐없이

손으로 만들어낸 밤과 낮

극단처럼, 마침표처럼 아름답다

  

오로라를 보기 위해 북극으로 갈 필요는 없어요

오로라* 끝은 핏빛으로 불타고

가는 줄기들 커튼을 휘감으며 핑크빛 향연을 펼친다

 

애틋한 손금 위로 갈라지고 피어오르며

낯선 생의 온도를 나누어주는 가지들

피와 초록의 온도, 머지않아 피어날 흰 꽃의 온도

  

하나의 인생을 읽고

평생 그 생을 베끼는 일을 직업으로 삼을 수도 있다

  

몰입한 눈, 익명의 의지, 빠짐없이

맑은 잉크로 총총 헌화가를 뿌리며

바스락바스락, 필사의 손이 상한 날개를 연주하는 일 년

방안 가득 흩어진 열망이 압축된

푸른 페이지 붉은 페이지

 

* 관엽식물. 

 

 

―새집『어떤 사람이 물가에 집을 지을까』(문학동네, 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