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시를 읽어야 할 시간
필경사 /강신애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21. 11. 23. 20:47
728x90
필경사
강신애
악보 베끼는 일로 생계를 유지한 루소
한 권의 책을 읽고
평생 그 책을 베끼는 일을 집업으로 삼은 이스탄불의 사내
빗방울 음표들, 고독한 부호들, 빠짐없이
손으로 만들어낸 밤과 낮
극단처럼, 마침표처럼 아름답다
오로라를 보기 위해 북극으로 갈 필요는 없어요
오로라* 끝은 핏빛으로 불타고
가는 줄기들 커튼을 휘감으며 핑크빛 향연을 펼친다
애틋한 손금 위로 갈라지고 피어오르며
낯선 생의 온도를 나누어주는 가지들
피와 초록의 온도, 머지않아 피어날 흰 꽃의 온도
하나의 인생을 읽고
평생 그 생을 베끼는 일을 직업으로 삼을 수도 있다
몰입한 눈, 익명의 의지, 빠짐없이
맑은 잉크로 총총 헌화가를 뿌리며
바스락바스락, 필사의 손이 상한 날개를 연주하는 일 년
방안 가득 흩어진 열망이 압축된
푸른 페이지 붉은 페이지
* 관엽식물.
―새집『어떤 사람이 물가에 집을 지을까』(문학동네, 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