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시를 읽어야 할 시간

신라호텔에서 약속했다 /류흔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22. 1. 18. 0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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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호텔에서 약속했다

류흔


친절은 끔찍했다
편의점은 오늘도 편치 않았고
무심코 내려놓은 발바닥 아래
약속과 함께 보도블록이 기우뚱거렸다
충무로에서 동국대학교 후문을 구경하며
신라호텔에 도착했다 신라는
신나 라고 발음하면 안 된다 신라는
실라 라고 읽음이 옳다 실라호텔에는
준마를 맡기고 투숙한 화랑이 많다
객실 창문을 하나둘 커튼이 지워갈 때
신부들은 다투어 잠옷으로 갈아입는다
지배인이 친절히 인사를 했다
인사가 만사였으므로
나도 예의바르게 인사해주었다
나는 화랑도 신랑도 아닌
이 나라의 평범한 낭도지만
결코 그에게 지배당하지 않겠노라 다짐했다
결국 실라는 망했다 줄여서
실망
마침내 관창이 애마에게 업혀 돌아왔을 때
나는 커피숍에서 단테를 읽고 있었다
단테가 방금 신곡을 발표했다
기다리며 들은 단테의 노래는 지루하고 느려서 안
단테 안단테
고민 끝에 아메리카노를 주문했으니
미국은 아니라는 결론이다
트럼프와 노름이 무에 다른가
지옥과 천국의 거리는 어떠한가
베아트리체와 선덕은?
그의 브리핑을 들어야 하는데
계백은 여태 황산벌에서 오지 않고 있다


- 시집『지금은 애인들을 발표할 때』(달아실, 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