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22. 2. 16.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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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황 

 

박해람

 

 

머리맡을 정하지 못해

잠이 옮겨 다닌다

내가 옮겨 다닌 집들은 향向을 사상쯤으로 알고 있었다

동쪽 울타리 밑으로 은일자*가 따라다녔고

향념에선 파초라든가 비파 같은 갱지들이 피고 졌다

그것들을 따다 한낮엔 밝은 종이로 쓰고

밤엔 검은 종이쯤으로 치부했다.

한 채의 집이 얼마나 많은 주변과 소쇄를 몰고 다니는지에 대해

외간의 책들로는 배우지 못했다.

수상受賞의 제목들이 빼곡히 꽂혀 있는 숲을

놀란 초식들이 달려갔다.

그런 날은 뿔이 두근두근 뛰었다

십리 밖에 취하는 신발을 벗어두고

그 옛날 아버지의 취한 옷소매를 그리워했다

한 번 아들로 태어난 사실은 바뀌지 않고

어쩌다 아버지가 된 사실도

저잣거리를 지나면서 알게 되는 것이다

위로를 추렴하는 모임에 참석하고

시인으로 철없는 결구를 짓고

사람으로 뻔뻔한 치욕을 편들었다

이만하면 죽기 딱 좋은 과오라는 생각이 든다

흰 꽃이 익으면 함께 부슬부슬 봄날의 궂은 날씨로 반죽한 국수를 먹으로 가자고 했고

어쩌다 맨 정신의 친구에게 술 취한 당호를 부탁하고

허언처럼 들고나는 문을 세웠다

무료의 손끝을 모아

정원을 꾸미는 날들이 쏠쏠하다

마른고추를 거둬들이는데 소나기가 묻어 있다

그럭저럭 머리말을 너무 많이 읽는다

 

 

*도연명陶淵明

 

 

 

―시집『여름밤위원회』(시인의일요일시집, 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