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시를 읽어야 할 시간

뫼비우스의 띠 /고순심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22. 2. 25. 1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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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뫼비우스의 띠

 

  고순심

 

 

  황혼 즈음 붉은 꽃을 가슴 깊이 숨겨둔 갑옷이라고 하고 흐릿하게 멀어져가는 한 사람의 눈빛을 감추는 안경이라고 하고 세상은 참 좁지만 80 C컵의 가슴으로 보아야 하는 거라서 숫자 뒤에 알파벳 대문자로 크기를 매기는 거라고 웅얼웅얼 사방으로 내달리는 그녀의 말들을 간신히 가두고 잡아당기는 신경의 끈 만약, 어깨끈이 없으면 마냥 흘러내린 갑옷의 끝은 어디일까? 그녀는 가끔 한 손을 어깨 위로 올려 꼬인 끈을 바로잡으려고 하는데 한 번 꼬인 운명은 영원히 풀 수 없는 수수께끼와 같아서 막연한 당신의 침묵처럼 겉과 속을 알 수 없는 뫼비우스의 띠와 같아서 서로에게 닿을 수 없어 그리움에 미어지다가 결국 다음 생에 만나야 뛸 수 있는 심장이라면, 먼 생을 돌고 돌아온 해지는 언덕에서 가시를 잔뜩 세운 채 붉게 일렁이는 꽃을 당신은 알아보기나 할까?

 

 

 

―『시와소금』(2022, 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