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시를 읽어야 할 시간
어머니의 비밀번호 /한상림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22. 3. 5. 1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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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와 비밀번호
한상림
어머니가 비밀 문을 열어주던 날
비밀은 지키는 것이 아니라 기억하는 거라고
해마다 생일이면 백설기 시루를 장독대에 올려놓고
천지신명에게 빌었다
육남매 뒷바라지에 등허리 굽은 어머니에게
비밀번호는 자식들이고, 나에게는 그냥 어머니다
응급실로 실려 가시던 날 마지막까지
양손에 비밀번호를 꼭 쥐고 놓지 않으셨던 어머니,
가끔 비밀번호조차 기억나지 않을 때
나는 자주 다니던 길도 되돌아온다
길들인 습관처럼 자동으로 숫자를 누르면
비밀번호가 틀렸다고 뜨는 경고창,
세상이 복잡한 건지 내가 복잡해진 건지
비밀번호를 덕지덕지 달고 살면서
어디 숨겨둘 만한 비밀창고 하나 없다
머릿속 어딘가에 깊이 저장해 놓고 몰래 꺼내 봐도
점점 흐려지고 멀어지는 내 기억력을
나조차 믿을 수 없다
저 세상에 가신 어머니 또 비밀번호를 바꾸셨는지
가끔 기억을 클릭해도
어머니는 열리지 않는다
―『모던포엠』(2022, 3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