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시를 읽어야 할 시간
찌그러진 주전자가 부르는 울어라 열풍아 /박정화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22. 3. 22. 1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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찌그러진 주전자가 부르는 울어라 열풍아
박정화
장터 돌아앉은 골목 끝 백마관
쉰 술 냄새가 춤추던 홀
찌그러진 주전자들이 반짝반짝 웃고 있다
이름이 마담인 엄마와 내 눈을 마주보지 못하는
동갑내기 친구가 사는 술집
내 사친 회비를 꿀떡 삼키고 아버지를 빼앗아 간
유년이 아프던 그곳
내일을 준비하러 노을이 산 넘어가면
아버지의 시간은 지금이 시작인 듯
자전거 뒤에 자반 한 손 묶어놓고
수박등의 손짓 따라 백마관 유리문 속으로 스르르 흡수된다
하늘로 치솟은 올림머리와
치맛단 잘잘 끌며 웃음 헤픈 색시들과
통곡하듯 부르는 울어라 열풍아
주전자 뚜껑과 젓가락도 떼창을 하는 골방
뜨거운 바람도 밤을 새고 아버지도 밤을 지샌다
일 년 농사 다 바치는 아버지와
내 꿈도 주전자처럼 찌그러지던 날
미운 그 친구 마담 엄마를 버리고 밤 기차를 탔다
부지깽이 두드리며 장단 짚던 술집 딸내미
어느 항구 선술집에서 울어라 열풍을 열창하고 있다는 바람의 소식과
주전자만큼 불러오는 아버지의 배는 간경화 꽃이 만발해
쉰 고개에서 봄을 따라갔다
TV 화면에 트로트 한 자락 흐르고
살풋 봄잠 속으로 용서가 덜 된 아버지 다녀가면
눈 흘기며 밀어내던 나보다 더 가여운 친구의 눈물과
백마관 벽에 매달려 울어라 열풍을 토해내던 주전자들
잊히면 더욱 좋을 풍경들이
아물지 않는 상처의 생살처럼
기억을 헤집으며 기어 나온다
―시집『메디슨 카운티의 다리로 갈 거야』(문학과사람, 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