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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호의 길 위에서 읽는 시] <13>문인수 ‘채와 북사이, 동백지다'

흐르는 물(강북수유리) 2010. 3. 31. 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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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호의 길 위에서 읽는 시] <13>문인수 ‘채와 북사이, 동백진다’
山은 북을 잡고, 江은 소리를… 천둥소리는 휘모리가 되고
  • 시인의 고향마을에 흐르는 백천(白川) 둑을 따라 걸으면 멀리 북쪽에 삼각형으로 뾰족이 솟은 산이 선명하게 시야에 잡힌다. 방울소리가 들리는 산이라 하여 ‘방올음산’(方兀音山)이요, 멀리서 보면 거대한 종이 하늘에 매달려 있는 것 같다 하여 현령산(懸鈴山)이라 부르기도 하는 산이다. 문인수(64) 시인이 떠올리는 고향의 중심에는 신비한 푸른 빛에 싸인 이 방올음산이 늘 솟아 있다. 이 산 아래 사는 사람들의 삶이 종소리가 되어 새벽잠 머리맡까지 스며들고, 아버지의 호방한 기개를 닮은 그 산의 정기는 시의 행간에 그림자로 녹아들었다.

    ◇문인수 시인은 자신의 유년기를 ‘방올음산’이 푸른 종소리를 풀어놓는, 넉넉하고 호방한 유토피아였다고 회고한다.
    경북 성주군 초전면 대장리, 시인의 고향마을. 차에서 내리자마자 길가 텃밭을 가리키며 “저곳이 헛간이 있던 자리”라고 말하는 시인의 눈빛이 흔들렸다. 눈빛 때문이었을까. 아뿔싸, 시인의 집은 흔적만 남아 사진도 찍을 수 없구나, 잠시 속으로 한숨을 내쉬는데 웬 여인이 높은 목청으로 인사를 하며 다가온다. 대문간을 건너오는 그네 뒤편으로 번듯한 집이 세 채나 지붕을 잇대고 모여 있다. 오랜 서울살이를 청산하고 시인의 생가에 내려와 살고 있는 늙은 형수였는데, 으레 시인들의 고향과 유년기는 가난과 불우에 갇힌 경우가 많다는 선입견이 사태를 왜곡했던 것이다. 시인의 아버지는 열댓 명의 식솔이 복작대던 가난한 집안에서 자라나 맨주먹으로 30마지기 농사를 짓는 대농을 이루었다. 3남2녀 중 막내 아들로 태어난 시인은 성장기에 유복한 생활을 누렸다. 아버지는 한눈 팔지 않는 헌걸찬 농부였고, 어머니는 바지런하고 효심 가득한 여인이었다.

    “지리산 앉고,/ 섬진강은 참 긴 소리다.// 저녁 노을 시뻘건 것 물에 씻고 나서// 저 달, 소리북 하나 또 중천 높이 걸린다./ 산이 무겁게, 발원의 사내가 다시 어둑어둑/ 고쳐 눌러 앉는다.// 이 미친 향기의 북채는 어디 숨어 춤추나./ 매화 폭발 자욱한 그 아래를 봐라./ 뚝, 뚝, 뚝, 듣는 동백의 대가리들.// 선혈의 천둥/ 난타가 지나간다.”(‘채와 북 사이, 동백 진다’)
    ◇경북 성주군의 고향집을 찾은 문인수 시인이 그의 생가를 지키고 있는 형수(오른쪽)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방올음산 아래서 나고 자란 덕분에 이런 절창이 나왔겠지만, 소리를 제대로 체화한 사람이 아니라면 쓸 수 없는 시편이다. 산은 무겁게 앉아서 북을 잡고, 강은 길고 유장하게 흐르며 소리를 한다. 게다가 소리북 하나는 하늘에 높이 떠서 장단을 맞추는데, 북을 잡은 사내는 살아온 그 무엇이 마음을 어둑하게 하는지 자세를 고쳐 앉으며 심사를 달래는데, 어디선가 미친 향기가 북채를 정신없이 사내도 모르게 휘두르게 하고, 뚝 뚝 떨어지는 동백의 선혈 위로 천둥 소리가 휘모리로 지나간다. 이 명편으로 문인수 시인은 2000년 김달진문학상을 받았다.

    시인은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부를라치면 한때 늘 상여소리를 불렀다. 여기에 정선아라리도 덧붙였다. 시인의 깊은 고향으로 남아 있는 것 중의 하나가 방올음산과 더불어 ‘소리’였다. 아버지가 술 취하면 흥얼거리던 노랫가락, 행랑채에서 새끼 꼬면서 부르는 소리, 논 맬 때 부르던 소리, 등짐 지고 타작할 때, 도리깨질하고 곡식 퍼서 곳간으로 넣으며 한 말이요 두 말이요 헤아리면서도 부르던 소리, 소리…. 유년기에 들었던 그 소리를 채록해두지 못한 게 한스럽지만, 그는 곧잘 기억을 더듬어 육성으로 재현하곤 했다. 어린시절 같은 마을에 살던 ‘서촌 영감’은 상여소리를 잘 불러 단골 상두꾼으로 초청받았는데 그 영감은 망자의 내력과 가족사를 엮어 한 판 서사시로 선소리를 매기곤 했다. 시인은 나이트클럽에서 상여소리를 부르다 쫓겨나기도 했다. 그 소리를 하고 나면 뭔가 응어리진 게 풀어지는 듯한 나른한 설움을 서러워했다. 

    시인을 모시고 기어이 노래방에서 그날 상여소리를 들어보았는데, 무대용으로 분장한 소리가 아니라 실제 옛날 들녘에서 아늑하게 들었던 토종 소리였다. 그는 대구 수성못 근처 지하 노래방에서 그 소리 한 대목을 들려준 뒤 많은 가사 중에서도 “저승길이 멀다한들 삽작 앞이 저승일세”를 특별히 좋아한다고 했다. 얼마 전 그의 시집 ‘배꼽’ 뒤에 해설을 썼던, 대구 지역에서 특히 활발하게 활동했던 평론가 김양헌이 죽었을 때는 직접 달구소리를 하며 그의 무덤을 다졌다.

    “이 슬픔 중에 낮달이 보인다./ 저, 뭐라 중얼거린 것 같은데/ 달구질 소리에 묻힌다./ 다시 찾으려 하니 정작 잘 보이지 않는다./ 산 아래, 대낮은 여러 갈래 길이 환한데/ 더 여러 갈래 마음이 어둡다./ 구름 옆이었을까,/ 소나무 꼭대기 짬을 뒤져보니 거기 있다/ 낮달은 내처 간다. 분명,/인생에 대한 그 무슨 대답인 것 같은데/ 하늘엔 아무런 지형지물이 없으니/ 저 어렴풋한 말씀을/ 한 자리에 오래 걸어두지 못하겠다./ 또, 달구질 소리에 묻힌다.”(‘낮달이 중얼거렸다’)

    도대체 부유한 집안의 막내아들 출신, 그것도 흔치 않게 아버지를 영웅으로 가슴에 새기고 있고 백수(百壽)를 눈앞에 둔 노모를 모시는 그가 왜, 어쩌다 서러운 달구소리에 빠져들었을까. 어떤 결핍이 그로 하여금 시를 쓰게 만들었는가. 시인의 말을 들어보면 그의 유년과 성장기의 공간은 방올음산이 푸른 종소리를 풀어놓는, 넉넉하고 호방한 유토피아였다. 그 공간에서 시인은 말썽꾸러기 소년이었다. “저 아이는 커서 아무것도 되지 못할 것”이라는 저주에 가까운 말도 들었지만, 소년을 큰 시인으로 만들어낸 것도 결국 말이었다. 초등학교 시절 문예 특활반에 영문도 모르고 배속됐는데, “둥둥둥 흰 구름 어디로 가나/ 김삿갓 할아버지 옷자락인가/ 둥둥둥 흰구름 어디로 가나”라는 동시 한 편을 숙제로 써냈더니, 당시 시인이었던 문예반 선생님이 ‘경천동지할’ 칭찬을, 그것도 ‘융단폭격’처럼 퍼부었다. 생전 칭찬이라곤 변변히 듣지 못했던 소년에게 그 칭찬은 운명적인 선언이 돼버렸고, 그 소년은 지금 늙은 시인으로 살고 있다.

    “지금 저, 환장할 저녁노을 좀 보라고/ 휴대전화 문자메시지가 떴다, 얼른/ 현관문을 열고 내다봤다, 지척간에도 시차 때문인지,/ 없다, 15층짜리/ 만촌 보성아파트 107동/ 기역자 건물이 온통 가로막아 본연의 시뻘건 서쪽이 없다// 시뻘겋게 녹슬었을 것이다/ 그 죄 사르지 않는 누구 뒷모습이 있겠느냐/ 눈물 훔쳐 물든 눈자위, 퉁퉁 부어오른 흉터 같은 것으로 기억하노니/ 아름다운 여분, 서쪽이 없다// 말하자면 나는 이미 그대 사는 곳의 서쪽,/ 이 집에 이사 온지도 벌써 십년 넘었다, 인생은 자꾸/ 한 전망 묻혀버린 줄 모른다. 몰랐다. 다만/ 금세 어두워져, 저문 뒤엔 저물지도 않는다, 어여쁜 친구여/ 무엇이냐, 분노냐 슬픔이냐 그 속 뒤집어/ 널어놓고 바라볼 만한 서쪽이 없다.”(‘서쪽이 없다’)

    “저문 뒤엔 저물지도 않는다”는 구절이 아프다. 더 이상 어두워질 수 없는, 저물래야 저물 수도 없는 막막한 상태야말로 상상할 수 있는 죽음의 초절정 아닌가. 누워 있는 얼굴 위로 관 뚜껑을 덮고 흙을 뿌릴 때 내리는 영원한 어둠…. 시인은 ‘환장한다는 것’의 그 ‘환장’(換腸)을 한자로 풀이해주었다. 속을 뒤집어 널어놓는 것, 그것이 새삼스레 환장이었다. 환장할 서쪽의 마지막 여분의 아름다움- 눈물 훔쳐 물든 눈자위, 퉁퉁 부어오른 흉터 같은 것.

    시인은 일찍이 고교시절부터 ‘학원’지에 시를 발표하는 문사로 우쭐댔지만 어쩌다 스스로 절망하여 동국대 국문과를 중퇴하고 군에 입대하면서부터 문단과 절연한 채 홀로 살았다. 그러다가 나이 마흔이 되어서야 ‘심상’지로 데뷔했는데, 초등학교 교사로 살아오면서 내내 그를 뒷바라지한 아내의 권유로 응모한 것이기도 한데, 이후 그는 서서히 시의 날개를 펴기 시작했다. 만날 백수로 살면서 이런저런 일에 손을 대다 실패하여 아내에게 미안한 ‘1기 백수’(잘나가는 청춘인 줄 알았는데 가장 후회되고 안타까운 청춘이었고 동네 사람들 눈이 부끄러워 서둘러 출근한 척 한 뒤로는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던) 시절을 살았지만, 영남일보 교열기자라는 번듯한 직장에 8년간 다닌 뒤로는 시로도 성공하여 번듯한 ‘2기 백수’(집에 있어도 고샅을 걸어도 누구의 시선도 의식하지 않고 시에 대해서만 고민할 수 있는) 시절을 살아오는 동안 아내가 시인보다 그의 시적 성취를 더 기뻐하여 다행이었다.

    “기차는 이제 아주 오지 않는다./ 지금부터 막 녹슬기 시작한 철길 위에/ 귀 붙여 들어보니 저 커다란 골짜기,/ 커다랗게 식은 묵묵부답 속으로/ 계속 사라지는 꼬리가 있다./ 기나긴 추억이며 고생이며 상처일지라도 결국/ 망각 속으로 전부 빨려드는 것이냐/ 석탄층 깊이 깜깜 쌓여가는 것이냐”(‘오지 않는 절망’ 부분)

    그는 불혹에 늦깎이로 데뷔했지만 여전히 시적 긴장이 흐트러지지 않는 선배 시인으로 후배들에게 존경받고 있다. 이런 이야기를 전했더니 그는 “내 시가 설사하듯 반복된다면 숨이 붙어 있는 한 시는 쓰겠지만 발표는 중단하겠다”며 “이미 후배에게 농담처럼 나 자신은 판단하지 못할 터이니 미리 충고해 달라”고 부탁했노라고 말했다. 주변에서 그의 명편으로 꼽는 ‘쉬’는 각자 찾아서 읽어볼 일이지만, 자신의 시 ‘채와 북 사이, 동백 진다’를 스스로 참고한 속편 ‘달북’은 이 자리에서 보고 싶다. 유정한 어머니, 환하게 젖은 얼굴, 자지러지게 번지는 소리의 변두리, 그리고 투둑, 타개지는 새 생명 만월을.

    “저 만월, 만개한 침묵이다./ 소리가 나지 않는 먼 어머니./ 아무런 내용도 적혀 있지 않지만/ 고금의 베스트셀러 아닐까/ 덩어리째 유정한 말씀이다./ 만면 환하게 젖어 통하는 달,/ 북이어서 그 변두리가 한없이 번지는데/ 괴로워하라, 비수 댄 듯/ 암흑의 밑이 투둑, 타개져/ 천천히 붉게 머리 내밀 때까지/ 억눌러라, 오래 걸려 낳아놓은/ 대답이 두둥실 만월이다.”

    조용호 선임기자 jhoy@segye.com

      ■문인수 연보
    ●1945년 경북 성주 출생
    ●1966년 동국대 국문과 중퇴
    ●1985년 ‘심상’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 ‘늪이 늪에 젖듯이’ ‘세상 모든 길은 집으로 간다’ ‘뿔’ ‘홰치는 산’ ‘동강의 높은 새’ ‘쉬!’ ‘배꼽’
    ●김달진문학상, 미당문학상, 노작문학상, 한국가톨릭문학상, 시와시학상, 편운문학상,대구문학상 수상